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87화 (87/106)

〈 87화 〉 86. 중대사항

* * *

“후… 하… 후우…. 여긴 올 때마다 긴장되네….”

“용사.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다만….”

“후우…. 그래. 나는 용사다…. 나는 용사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용사를 바라보며, 그레이시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현실 앞의 커다란 문, 그 앞에 서서 왕을 알현하길 기다리는 용사는 누가 봐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기에.

용사는 차분히 호흡을 가라앉히며, 웅장하고 거대한 알현실 앞 복도를 둘러보았다.

벽에는 고풍스럽고 근엄한 장식이 조각되어 있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묵묵히 서 있는 왕실 근위대는 한층 더 위압감을 가져다주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면, 고대의 용사와 마왕의 신화적인 전투를 그려낸 천장화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성검으로 마왕의 목을 베어 내리는 용사와, 그런 용사의 검에 쓰러지며 처참히 울부짖는 마왕.

“마왕….”

천장화에 그려진 마왕은,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의 마왕이었다. 머리 위로 솟아 난 뿔, 흉악한 이빨과 발톱, 붉은 눈, 악마 같은 날개….

잠시 천장화를 멍하니 쳐다보던 용사는,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렸다.

“와…. 저 사람들은 교대도 안 하나?”

근위대 기사는 조금 전의 자세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용사의 순수한 감탄에, 그레이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교대는 하루 네 번씩 행해지고 있다. 다만, 교대를 하는 시간이 노출되면 교대를 하는 찰나에 왕궁이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교대 시간은 극비에 해당하지.”

“와…. 뭔가… 멋있네. 판타지 세계 기사들은.”

“판타지?”

“…그런 게 있어.”

“흠… 그런데….”

어딘가 언짢은 표정을 지은 그레이시가, 복도의 벽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근위대 기사에게 다가갔다.

그레이시가 다가가자, 창과 방패를 들고 있던 기사가 칼 같은 제식을 선보이며 돌아섰다.

“근위대장님을 뵙습니다!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그래. 일은 할만한가?”

“예! 왕실을 수호한다는 숭고한 사명에, 더없이 기쁜 마음 가짐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음. 훌륭해. 아주 훌륭하다.”

“감사합니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기사의 어깨를 두들겨주는 그레이시를, 용사와 아드리엔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아드리엔. 그레이시가 사단장 모드에 들어갔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알 것 같네.”

그레이시는 아드리엔과 용사의 수군거림을 한 귀로 흘려 들었다.

“그래. 계속 수고해 주고… 음?”

“예! 명심하겠…?”

순간, 그레이시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기사의 경직된 몸이 더욱 뻣뻣하게 굳었다. 근위대장이 코앞에서 얼굴을 찡그리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무, 무슨 문제라도….”

“자네. 검 손질은 꾸준히 하고 있는 건가?”

용사와 아드리엔, 그리고 근위대 기사의 눈이 동시에 기사의 허리춤에 달린 검으로 향했다. 용사가 실눈을 뜨고 검을 노려 보았으나, 검은 새것처럼 멀쩡했다.

“…뭐가 문제라는 거지?”

“글쎄. 나도 잘….”

그레이시가 검을 잡아당기자,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이 매끄럽게 끌러져 나왔다.

“여기, 보이나?”

“아….”

자세히 보니, 검날의 끝 부분, 크로스 가드와 맞닿은 부분이 조그맣게 녹슬어 있었다. 기사의 눈이, 처음으로 동요하며 크게 흔들렸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지.”

그레이시가 사람 좋게 웃음에도, 근위대 기사의 입꼬리는 좀처럼 올라갈 줄을 몰랐다.

건너편에 서 있는 그의 맞선임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무기의 손질은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유사시를 대비해야 하는 근위대의 입장에서, 무기의 상태는 무엇보다 중요하니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만 가보지.”

“영광이었습니다!”

다른 근위대 기사들이 죽일 듯이 노려 보고 있음을, 방금 전 그레이시에게 지적당한 기사가 울상을 짓고 있음을, 그레이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젊고 혈기 넘치는 근위대 기사의 참모습을 본 것 같아, 뿌듯한 미소를 띠며 용사에게 다가갈 뿐이었다.

“하여튼…. 인간들은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데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왕실을, 나아가서 왕국의 근간을 수호하는 숭고한 이들이다. 아드리엔. 불경한 발언은 삼가도록.”

“그래, 그래….”

울상을 지은 채 몸을 부르르 떠는 근위대 기사를 아련하게 보고 있길 잠시,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알현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때가 되었나 보군.”

“그러게…. 가자.”

“어후, 허리야…. 대체 왜 이렇게 오래 세워 두는 거야?”

그녀들은 곧장 알현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 * * * *

“오늘은 참 기쁜 날입니다.”

탁자에 술잔을 내려놓으며, 탁자에 빙 둘러앉은 일행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흐헤흐…. 별이 보인다아….”

루나의 눈이 벌써 풀린 것 같긴 했지만, 설마 벌써 취하진 않았겠지. 방금 게 첫 잔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한 차례 젓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슬픈 날이기도 하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내가 시간을 질질 끌기 시작하자, 로이먼이 술잔을 기울이며 다음으로 나올 말을 재촉했다.

“형제님. 슬슬 말씀하시죠.”

“그래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루나. 나 저기 저 육포 좀….”

“손이 없으십니까? 직접 가져다 드십시오. 실비아.”

“너, 너 말 다 했어?!”

“아니, 다들 조용히….”

“아! 알겠다! 저 알겠어요! 맛있는 걸 잔뜩 사 와서, 지갑이 가벼워지셨구나!”

“…로빈. 그건 아닌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마야! 내 감은 틀리지 않는다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좌중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일동 주목!!!!!!!!!”

난잡하게 뒤섞이던 잡음들이 뚝—! 끊어졌다. 이래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술을 곁들이면 안 된다는 건데.

그래도 오늘은 날이 날이기도 하고, 술이 빠지면 섭섭한 자리였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나는 한 차례 숨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우리 오스틴 파티의 일동 여러분. 그리고, 저기 저 용사 파티의 끄나풀 한 분 포함.”

“누구보고 끄나풀이라는 거에욧!!!”

“…아무튼, 오늘은 여러분들께 말씀드려야 할,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두 가지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발끈한 이사벨이 지랄 발작을 할 뻔했으나, 내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자 곧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게 되었다.

“우선, 첫 번째.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오스틴. 그냥 반말로 하지 그러나. 언제부터 우리에게 존댓말을 했다고….”

“아잇, 시팔. 그래. 우선 첫 번째! 너희들도 알다시피…. 잠시만….”

나는 가방을 들어 올려, 오늘 낮에 로웰에게서 받아 온 메텔하임 지하 수도의 지도를 꺼내어 바닥에 굴렸다. 지도 두루마리가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펼쳐지자, 모두의 시선이 지도로 향했다.

“너희들도 로이먼에게 들었으니 잘 알겠지만, 최근 메텔하임 지하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저 땅속 깊은 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하 공간이 발견되었으니, 마탑과 모험가 길드, 그리고 대성당 쪽에서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중이지.”

“음. 지난번에 하르만에서 들었던 이야기 말인가요?”

“바로 그겁니다. 알렉시스 공녀님.”

우리들 중에서 그나마 엘리트에 가까운 알렉시스 공녀답게, 이해가 아주 빨랐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자연스럽게 한 차례 쓰다듬어 주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 지하 공간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끙끙대고 있는데, 우리의 친구 베키가 여기서 돈 냄새를 왕창 맡았단 말이지.”

“돈 냄새라?”

실비아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실비아는 우리 인간 측의 사정을 잘 모를 테니, 이쪽 사정을 모를 만도 하다.

“도시의 지하에, 그것도 왕궁이 자리 잡고 있는 메텔하임의 지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하 공간이 발견됐는데, 어중이떠중이들을 마구 들여보낼 수는 없잖아?”

“일리가 있네요. 저희 성기사단들이 투입되기에는, 교국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요.”

“응. 아마 마탑 쪽에서도, 마법사들을 무작정 들여보내는 것에는…. 회의적일 거야. 누가 뭐라 해도, 어쨌거나 …. 마법사들은 고급 인력이니까….”

이사벨과 마야가 훌륭하게 부연 설명을 해 준 덕분에, 내 걱정과는 다르게 다들 이해를 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벌써 헤롱헤롱 거리는 루나 빼고.

“그래. 이사벨과 마야의 말이 맞아. 이런 일에 그런 고급 인력들을 투입하자니, 수도 시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하게 될 것이 걱정될 것이고, 무엇보다 얼마나 위험할지 모르는 일에 함부로 아까운 인재들을 보내기는 꺼려질 거야.”

“몇 안 되는 숙련된 모험가들을 막 들여보내자니, 막상 이런 일에 전문인 모험가 길드에서 반대했겠군요. 그렇다고 아무나 막 들이자니,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이 날 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그렇지. 로빈의 말도 맞아.”

그러자, 로빈이 대뜸 내게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내가 의미를 모르고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자, 로빈이 내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저는 왜 안 해 주세요?”

“어, 어. 그래….”

나는 로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아….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 마탑과 대성당, 그리고 모험가 길드. 이 세 곳에서 탐사대를 꾸리기로 합의를 한 모양이야. 아마 상당히 위험할 테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음…. 아직 정해진 사항은 아니야, 실비아. 너희들의 의견도 들어는 봐야지. 나 혼자서 결정할 일도 아닌 것 같고.”

비록, 마야와 이사벨을 제외한 나머지 용사 파티는 아직 왕궁에서 돌아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셋에게는 나중에 따로 물어볼 생각이다.

베키가 주기로 한, 막대한 보수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나처럼 돈만 보고 무리한 모험에 뛰어드는 이들이 없길 바랬기 때문이다.

미지에 발을 들여야 한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다만, 어느 정도의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라. 또한, 이번 일에 참여함으로써 마탑과 대성당, 모험가 길드에 빚을 지워 두는 것이다.

이처럼 위험한 일임에도, 이들은 뛰어들 것인가.

다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 명이라도 하기 꺼려진다면 곧바로 관둘 거야. 그러니까, 하기 싫은 사람은 굳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 조금이라도 꺼려진다면, 부담 없이 말해도 괜찮아.”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하나요?”

이사벨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해 주었다.

“1년. 아마 첫 탐사대가 투입되기까지, 어림잡아 1년 정도가 걸릴 거래. 그 전까지만 대답해 주면 돼.”

“그러면… 조금 더 고민해 보는 게 좋겠네요. 급한 일도 아니니까요.”

“이사벨의 말이 맞아. 다들 각자 잘 생각해 보고, 나중에 나한테 따로 얘기를 해 줘. 용사와 아드리엔, 그레이시에게도 내가 따로 언질을 해 둘게.”

이사벨의 말이 명안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림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아…. 그리고… 이제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이야.”

“또 있어?”

마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일곱 쌍의 초롱초롱한 눈들을 보니, 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에라이. 그냥 지르고 보자.

“…사실, 알렉시스 공녀님께서… 아마 조만간 우리 파티를 떠나실 것 같아.”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나는 천천히 팔을 쓸어내렸다.

방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다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술잔을 들이켜던 입을 헤— 벌리곤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실비아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내 말에 퍼뜩 술이 깼는지, 또렷하게 나를 바라보는 루나의 눈동자 역시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렸다.

“말 그대로야. 알렉시스 공녀님께서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번에 우리와 함께 한 건 순전히 아카데미의 방학 기간을 이용하신 것뿐이었어. 곧 방학이 끝날 테고, 그렇게 되면 본가에도 돌아가셔야 할 것이고, 또….”

“자, 자, 잠깐만요! 아니, 이렇게 갑자기요?!”

내 팔을 뿌리치고 나를 올려다보는 로빈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무겁게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어. 수도에 도착하면, 알렉시스 공녀님께서는 아마….”

“오, 오르엔! 거짓말이지? 응?!”

로빈은 내 말에서 희망을 찾기 힘들어지자, 이번에는 알렉시스 공녀에게 직접 물어보기 시작했다.

알렉시스 공녀의 표정이 서글퍼졌다. 그녀는 로빈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나직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대신, 금방 돌아올 테니까….”

“거짓말….”

“설마, 이런….”

“흑…. 싫은데, 싫은데에….”

방 안은, 나와 로이먼을 제외하곤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엉엉 우는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나도 울컥해지는 기분이었다.

“…여러분. 저, 잠시….”

눈물을 글썽거리던 알렉시스 공녀는, 결국 참기 힘들어졌는지 방 문을 열고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그녀를 눈짓으로 배웅해준 뒤, 아직도 훌쩍거리는 이들을 토닥여 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나와 로이먼을 제외한 모두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분위기가 말 그대로 씹창이 나 버렸다.

“자, 자! 다들 그만! 그만 울어! 뚝!”

“흐윽…. 선배님…. 어, 어떻게 안 될까요…? 이렇게 떨어지기 싫은데….”

“자! 다들 잠시 조용!”

내가 손뼉을 마주치며 말하자, 모두가 순식간에 울음을 뚝 그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뭐 사이비 교주라도 된 기분이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일행들에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알렉시스 공녀와 그녀의 가문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잔꾀가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