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88화 (88/106)

〈 88화 〉 87. 그녀와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 * *

“아침….”

아침. 음. 아침.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오히려 더 어지러워진 것 같았다.

커튼을 쳐 놓은 탓에, 방은 아직 어두웠다. 창문에 쳐진 커튼 틈새로, 새파란 아침 햇살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드르렁…. 퓨우우…. 드르렁…. 으으음….”

“흠냐…. 흐무….”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채 자고 있는 로빈과 마야의 옹알이가 인상적이었다. 어제 그렇게 술을 마구잡이로 들이켰으니, 아마 점심때가 되어서야 깨어나지 않을까 싶다.

용사 파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왕궁을 들렀다 온다더니, 결국 하루를 꼬박 넘겼네.

어제 의자에 앉아 그대로 곯아떨어졌던 로이먼과 이사벨은, 벌써 볼 일을 보러 나갔는지 방 안에 없었다.

하여간, 종교인들이란.

나는 몸을 일으켜, 한동안 침대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제 뭘 했더라.

모두와 함께 로웰에게 의뢰받았던 일 얘기를 나누고, 또….

“…아.”

그래, 참. 알렉시스 공녀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었지.

알렉시스 공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곧 아카데미의 개학을 기점으로 우리와 잠시 떨어져 지내게 된다. 아마 올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도, 곧바로 우리와 함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아카데미.”

아카데미의 임시 교사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였다.

우리 파티의 유일한 탱커인 알렉시스 공녀가 없으면, 어차피 모험도 글러 먹었다. 하릴없이 돈만 쓰며 기다릴 바에는, 돈도 벌고 알렉시스 공녀와도 만날 수 있는 아카데미에서 일을 하면 어떨까?

아쉽게도, 마왕군과 대치해야 하는 용사 파티는 여기에 동참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다들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그동안 잠시 바깥에 나가 있었던 알렉시스 공녀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아마 깜짝 놀라겠지.

물론, 까다롭기로 유명한 왕립 아카데미에 교사로 등용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아카데미에서 아무런 권유도 받지 못한 우리는 어련할까. 다들 능력은 적당히 있으니, 우리를 보증해 줄 연줄이 필요하겠지.

용사의 추천을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쉽게도 용사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닐뿐더러, 아카데미와 어떠한 친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용사라지만, 용사의 추천을 믿고 어중이떠중이들을 무턱대고 받아들일 만큼, 아카데미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카데미 총장부터가 이미 대마법사 인지라, 말 다했지 뭐.

그런 고로,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존재한다.

하나는, 레인저에서 나름대로 높은 위치에 있는 파멜라 교관에게 부탁하는 것. 파멜라 교관도 레인저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만큼 어느 정도 짬이 있어서, 매년 아카데미에 출장을 나가는 레인저 교관을 선발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나와 로빈 정도면 어떻게든 되겠지.

또 하나는, 알렉시스 공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알렉시스 공작에게 직접 부탁하는 것이다.

알렉시스 공작은 나와 어느 정도 안면을 튼 사이이다. 예전에는 알렉시스 공작에게 본인에게 직접 가신 제의를 받았었다.

내 능력을 보곤, 알렉시스 공녀의 호위 기사로 들어와 달라고 했었지, 아마. 그때의 나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말이다.

물론, 알렉시스 공작은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직 알렉시스 공녀가 떠날 때는 아니므로, 조만간 가까운 시일 내에 알렉시스 공녀와 함께 찾아가면 될 것이다.

이쪽으로 갈 경우, 나와 로빈뿐만 아니라 모두 각자의 적성에 맞게 임시 교사로 채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장점이 존재한다.

“그나저나, 와일러도 만나 봐야 하는데…. 아직 수도에 있으려나?”

와일러도, 물론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있다. 가서 제대로 된 사과를 해야겠지만…. 아무래도 로빈이 깨어 있을 때, 함께 가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러니까, 일단 기각.

“그러면….”

우선, 레인저 양성소에 들러야겠다. 그다음에는… 길드에 가서, 갈란의 현상금을 받아먹고…. 또….

“…이 정도면 되겠구만.”

할 일이 정해졌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목욕을 한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어느새 단잠에서 깨어난 실비아가 침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실비아?”

“으음…. 아, 오스틴…. 어디가…?”

“레인저 양성소에 다녀 올 생각이야. 잠시 볼일이 생겨서.”

“기다려어…. 나도…. 하아암…. 나도 같이 가자….”

“그래. 그럼 빨리 씻고 나와.”

실비아의 걸음걸이가 이리저리 뒤틀렸다. 잠에 취한 나머지, 보기에도 기괴하게 흐느적거리는 춤을 추는 실비아를 겨우 욕실에 집어넣었다.

“씁…. 이것도 조만간….”

경화시킨 와이번 가죽으로 만든 정강이 보호대가, 생각보다 많이 헤져 있었다. 하긴, 거친 흙바닥을 아무렇게나 구르고, 슬라이딩도 하고….

이렇게 생각해 보니, 안 찢어진 게 신기할 정도네.

“…그냥 새로 하나 사야겠다.”

“응? 뭘 사?”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나?

어느새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실비아가, 내 옆에 서서 졸린 눈을 비비고 서 있었다.

“하아암…. 그런데, 우리끼리만 나가?”

“다른 애들은 다 자고 있으니까…. 굳이 억지로 깨울 필요도 없고.”

“그래…. 이제 가자….”

실비아의 눈이 자꾸만 감겼다.

제발 부탁이니까, 길바닥에 드러눕지만 말아 줘.

* * * * *

“아으…. 머리야….”

“그러게 적당히 마시지 그랬어.”

“하지만, 육포가 술이랑 너무 잘 어울렸는걸…. 대체 누구야? 그 흉악한 육포를 만든 사람은.”

“…내가 만들었는데?”

“…그래. 어쩐지 너무 맛있더라.”

숙소를 나온 나와 실비아는, 어제 로웰을 만나러 갈 때 함께 걸었던 상업 구역을 다시금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잠에 취해 비척거리던 실비아의 걸음걸이도,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멀쩡해졌다.

다만, 대신이라고 할까. 숙취가 한꺼번에 몰려온 모양인지라, 나와 함께 걷는 내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뭐 실수라도 저질렀나 싶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우선, 레인저 양성소에 가야지.”

“레인저 양성소?”

실비아가, 마치 ‘그게 뭔데.’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냐고 묻는다면…. 글쎄.

“응. 레인저 양성소.”

“레인저 양성소라면…. 오스틴,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할 수 있도록 키워내 준 곳이지?”

“…그렇지. 하지만, 실비아.”

“으, 응…?”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려, 실비아의 어깨를 턱! 짚으며 입을 열었다.

“거긴 그냥 병신 동네야.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사람을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게 할 수 있나. 이런 걸 연구하는 곳이 바로, 레인저 양성소야.”

“어…. 그, 그래…?”

“밥도 좆같이 맛없지, 할 짓이라고는 훈련이나 운동밖에 없지, 전우라는 새끼들은 하나같이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지….”

레인저 양성소.

나는 그 빌어먹을 양성소와 관련해서, 좋은 기억이라곤 눈곱 만치도 없다. 마지막 실전 투입 때는 동료들도 잃었고…. 그냥 온갖 부조리와 개 좆같은 것들만을 모아놓은 연옥이라고 보면 된다.

밥은 더럽게 맛이 없었고, 막사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나는 막사에서 쥐가 안 잡히는 날을 본 적이 없다. 그에 반해 지급되는 장비들은 쓸데없이 품질이 좋았다는 점이, 오히려 더 열 받는 포인트였다.

지금은 조금 개선되어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맥스를 양성소에 추천한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여하튼, 이렇게 지옥 같았던 나의 양성소 생활 속에서, 그나마 몇몇의 친절한 동기들과 파멜라 교관 만이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그나마 웃으면서 레인저 양성소를 수료할 수 있었다.

고마운 사람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방금 건 농담이고. 아무튼, 그냥 레인저를 양성하는 곳이야. 별 거 없어.”

“아하…. 그래? 난 또 엄청 낙후된 곳인 줄 알았지.”

인간들의 전투 병력 중 최상위를 다툰다는 레인저. 실비아는 그 레인저를 양성하는 곳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것 같아 보였다.

미안하지만, 실비아. 거기는 낙후된 곳이 맞아.

“그나저나, 실비아.”

“응? 왜?”

“너는…. 오빠 생각은 안 나냐?”

“…아가토 말이야?”

“…응.”

실비아의 표정이 복잡 미묘해졌다. 예전에는 아가토가 미웠다지만, 지금의 실비아는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이다.

과거, 실비아보다 아가토가 더욱 총애를 받았던 것은, 아가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마왕군에서 활동하던 그때도, 아가토는 실비아의 뒤를 봐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고.

“나는… 잘 모르겠어. 응.”

“…그래. 얼마가 걸리던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아가토와의 관계는 잘 매듭지어.”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나만 해도, 용사 파티와 완전히 쫑 났다가 최근에야 화해했으니까.

실비아 역시 내 진심 어린 조언을 듣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분위기를 무겁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미안.”

“으응…. 아냐. 괜찮아. 어차피 아가토… 오빠와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다고, 나도 얼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다행이고.”

“으음…. 그래서, 양성소에 간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야?”

“아무래도 길드에 가야겠지. 갈란의 현상금을 받아야 하니까.”

실비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갈란…. 그래. 갈란. 갈란도 죽였지, 우리.”

“슬픈 일이야.”

“슬픈 일이지.”

“기쁜 일이기도 하고.”

“아하하…. 그것도 그렇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도시 외곽까지 와 있었다.

이 길… 엄청나게 익숙하다. 가끔 휴가를 나왔을 때, 이 거리에서 로빈과 함께 술을 마시곤 했었다.

저 멀리, 지난 몇 년 동안 질리도록 봐 왔던 레인저 양성소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야…. 바뀐 게 전혀 없네. 그립다, 그리워….”

“저기구나….”

우리는 발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온갖 추억이 깃든 레인저 양성소의 입구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우리는 입구 코앞에 멈춰 섰다. 저 안쪽에서, 살인 병기로 거듭나고 있을 미래의 레인저들의 힘찬 구령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도 저렇게 개처럼 구를 때가 있었는데. 잠시 추억에 젖어 있자니, 실비아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스틴. 오스틴.”

“어, 어. 잠시 다른 생각하느라…. 왜 불렀어?”

“저게 뭐야…?”

“…음?”

내 시선이 실비아의 손가락을 타고 움직였다. 그 끝에는….

그 끝에는….

“어… 뭐라고 쓰여 있는…. 101기… 오스틴… 용사 파티 최종… 합격…? 저건 또 뭐… 설마, 저거 오스틴이야?”

“…….”

그 끝에는…. 내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박힌, 심지어 그 옆에는 내 얼굴을 그리려다가 실패했는지, 아주 우스꽝스럽게 생겨서 인간이긴 한 건지 구분도 가지 않는 얼굴이,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흉물이 걸려 있었다.

레인저 양성소, 입구에. 떡하니. 커다랗게 말이지.

* * * * *

“후아…. 힘들어라….”

파멜라 교관은, 오늘도 고된 훈련 지도로 피로가 쌓인 어깨를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젊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차기 레인저 인재들을 기르다 보니, 어느새 나이는 서른 중반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으나, 파멜라 교관은 아직 은퇴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주름, 아직 없고. 처진 살, 아직 없고. 다크 서클, 아직 없고. 피부는….

“이 정도면 아직 현역이지. 후훗….”

아직 어디 가서 꿇리는 외모는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음?”

그렇게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꼼꼼히 살피고 있자니, 방 바깥의 복도가 조금 어수선한 것이 느껴졌다.

쿵! 쿵! 쿵! 쿵!

누가 감히, 이 양성소 최고참인 파멜라 교관의 집무실 앞 복도를, 저렇게 발을 굴러가며 걷는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얼빠진 얼굴로 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누군가의 분노에 찬 발길질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거세게 열렸다.

쾅!!!

“야 이 씨발 늙다리 아줌마야!!!!!!!!! 당장 튀어나와!!!!!!!!!”

“누가 아줌마야!!!!!!!!!”

오랜만의 재회는, 최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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