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88. 티키타카
* * *
“누가, 누가 이딴…!”
혀가 꼬였다. 말을 더듬거렸다. 도저히 내 혀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한계치를 넘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인해, 머리 꼭대기까지 뜨거운 열기가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내 허락도 없이, 이 씨발…!”
입구에 걸려 있던 형편없는 현수막을 마구 구기곤, 있는 힘껏 바닥에 내팽개쳤다.
“내가 미우면 말로 해요!!! 씨발! 아줌마!!! 거진 5년 만에 돌아왔는데, 대체 이게 무슨 개쪽이야!!!”
“무, 뭐…! 넛, 넛, 너어…! 또 아줌마라고!!!”
“뭔데요, 이건! 이게 대체 뭐냐고! 이 토악질이 나오는 쓰레기 현수막은! 지금 날 놀리는 거예요!!! 그런 거야!!!!!!”
“야! 너! 존댓말을 할 거면 존댓말을 하고, 반말을 할 거면 반말을 하랬지! 예전부터 왜 들어먹질 않아악!!!!!!”
“당신이나 잘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을 거 아냐!!! 이 노땅 아줌마야!!!!!!”
“너, 너 말 다 했어!!!”
“아니! 아직 멀었어요! 대체 정신머리를 어디에 처박아 두고 다니길래, 이따위 형편없는 현수막을 자랑이라는 듯이 떡하니 걸어 두는 거예요!”
마치 친구가 장난으로 찍 싸지른 듯한 내 얼굴이 그려지고, 그 옆에 촌스럽게 정자로 내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내 지인들이 가장 많은 곳에 걸린다고 생각을 해 보자.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났다. 화가 나고, 또 참을 수 없이 쪽팔렸다. 내가 없는 동안, 도대체 얼마나 걸려 있었는지 모를 이 현수막이, 다른 사람들에게 떡하니 노출되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파멜라 교관의 고도의 엿먹이기가 분명했다. 사람을 이렇게 놀림거리로 만들어 버리다니. 두고두고 수치스러운 일로 뇌리에 박힐 것 같았다.
씨발. 다른 사람들, 특히나 내 추천을 받고 들어온 맥스는, 저 현수막을 보고 대체 뭐라고 생각했을까. ‘저 병신 같은 건 뭐지?’ 정도로만 생각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야, 오스틴! 너 대체 왜 그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이렇게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
파멜라 교관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나는 더욱더 어이가 없어져서, 절로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씨발, 대체 어떤 정신 나간 호로 잡년이 이따위 헛짓거리를 한 건데요!”
“단장, 그 정신 나간 또라이 년이 시켰다! 왜!!!”
“아이 썅,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를 악 물고 파멜라 교관을 향해 달려들려 하자, 내 옆에 서있던 실비아가 다급히 내 팔을 붙잡고, 심상치 않은 소리에 뛰쳐 들어온 다른 교관들이 나와 파멜라 교관을 필사적으로 말리기 시작했다.
“오스틴! 진정해! 진정! 그마안! 로이먼 사제한테 다 이른다?!”
“파, 파멜라 교관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징계 위원회가 또 열렸다간, 이번에는 정말로 큰일 납니다!”
* * * * *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내지르던 나와 파멜라 교관은, 각자 실비아와 다른 교관들에게 붙잡힌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헉…. 후우….”
서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다가, 잠시 휴전.
스읍—.
깊이 들이마시고.
하아—.
천천히 내쉰다.
“오스틴. 좀 진정이 돼?”
“응. 고마워, 실비아.”
도를 넘어선 흥분 상태에서는, 누군가 말려주면 빠르게 진정되기 마련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머리에 몰렸던 피가 쑥 내려가니,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나는 내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눈앞에 놓인 손님용 의자에 힘없이 털썩—!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파멜라 교관님. 조금 진정이 되셨습니까?”
“…가 봐. 이제 괜찮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스틴.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에 만나서 저도 반갑지만, 조금 이따 이야기해요. 우리.”
“그럼, 저희는 이만….”
다른 교관들이 나가고, 방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나는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키려 애썼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 앉히려 하니, 머리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곤, 탁자에 놓인 찻주전자를 아무렇게나 찻잔에 따른 뒤, 곧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단장님께서 시킨 일이다, 이 말이죠.”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전의를 상실한 힘없는 목소리가, 내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건너편 의자에 앉은 파멜라 교관이,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응.”
“이걸 말이죠.”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꼬깃꼬깃한 현수막을 쫙 펼쳐 들었다.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촌스러운 디자인의 현수막과, 그 와중에 대문짝만 하게 박힌 내 이름과 얼굴 그림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걸 좀 보세요.”
“푸핫…!”
“풉….”
“…….”
실비아, 너마저.
화를 낼 힘도 없었다. 나는 손에 들린 현수막을 힘없이 탁자 위에 내려놓곤,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이건 알아서 좀 처리해주세요. 아무리 단장님께서 시킨 일이라고 해도, 이딴 걸 승인해 준 교관님 잘못도 있어요.”
“어흠…. 노력해 볼….”
“노력만 하지 말고, 확실하게 답해주세요….”
“…어떻게든 해 볼게.”
“좋아요.”
더 이상, 저 흉물을 눈에 담는 이가 없도록 만들자.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아니다. 그냥 제가 처리할게요.”
“응?”
그리 마음먹었다면,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다.
나는 탁자 위에 내려놓은 현수막을 도로 들어 올리고, 힘없이 창가로 걸어 나갔다.
창문을 열고, 현수막을 꾹꾹 눌러 접어, 폭발 볼트에 끼웠다.
퉁—!
콰과광!!!
청명한 하늘을 향해 날아가던 현수막이, 공중에서 폭발하여 사방으로 비산 했다. 너풀거리며 떨어지는, 새카맣게 전소한 현수막 조각들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창문을 닫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인사가 늦었지만, 오랜만이네요. 5년 만인 가요?”
“…어, 응. 그, 그래. 4년이 조금 넘었지. 시간 참 빠르네.”
“그렇네요.”
죽어라 싸워서 그런지, 대화가 끊긴 순간 찾아온 정적이 어색했다.
“맥스는 잘 지낸답니까?”
“아, 맥스…. 그렇지….”
파멜라 교관이 진지한 표정으로 상체를 숙였다. 나 역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너…. 로빈을 들개로 영입할 때는 그러려니 했어. 로빈은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렇죠. 특히 단검 투척으로는 따라 올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하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냥 뜸 들이지 말고, 바로 말하세요.”
“네가 추천해 준 그 아이…. 맥스는…. 뭐랄까, 조금….”
파멜라 교관이 말끝을 흐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쭉 기대었다.
“뭐랄까…. 너무 평범해.”
“…네?”
“평범해. 평범해도 너무 평범해. 체력도 평균. 근력도 평균. 무기를 다루는 솜씨는… 아직 손에 익히는 중이라 확신은 안 가지만, 그래도 딱 하나 빼고는 남들 만큼은 해.”
“그게 뭐 어쨌는데요?”
맥스는 평범하단다. 모든 면에서. 그래도 중간은 간다, 이 소린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오스틴. 로빈 외에는 절대 들개를 들이지 않겠다던 네가, 단검까지 내어 주면서 추천해 준 아이야. 그 아이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지 몰라?”
“…제가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나요?”
“…아무튼, 나도 네가 추천한 아이라고 해서 많이 기대했는데…. 여러모로 너무 평범해.”
내 기억 속의 맥스는, 나름 활을 잘 쏘는 것 같았는데. 비록 근력이 조금 많이 딸리긴 했지만 말이다.
“활은 나름 잘 쏠 텐데요.”
“그래. 활 만. 다른 무기들은 전부 평범한데, 딱 하나. 활만큼은 정말 잘 쏴.”
“그럼 된 거죠, 뭐. 맥스는 저격병으로 키워 주세요. 다른 애들 훈련 커리큘럼에 억지로 끼워 넣지 마시구요.”
“…저격병 과정은 선발된 훈련생만 들어갈 수 있어. 알고 말하는 거지?”
“그럼요. 제가 거기에 들어가려 했다가 떨어졌잖아요? 뭐, 너는 저격병을 하기에는, 검술이 아깝다고 했던가….”
“…….”
파멜라 교관이 내 눈을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나 역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파멜라 교관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로 눈싸움을 하길 잠시, 결국 파멜라 교관이 백기를 들었다.
“…네 눈으로 봤을 때도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 맥스는 내가 직접 저격병으로 키울게.”
“숏 보우 하나만 들리지 마시고, 롱 보우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아…. 내가 되도록이면 특혜는 안 주려고 하는 거, 너도 잘 알지? 네가 부탁해서 들어주는 거야.”
“그럼요. 파멜라 누나. 고마워요.”
저 봐라, 저. 누나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입꼬리가 아주 귀에 걸리려 한다.
내가 잠시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파멜라 교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용건은 그게 전부야?”
“아뇨. 사실, 진짜 용건은 따로 있죠.”
“그게 뭔데?”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파멜라 교관이, 양성소 관련 일처리로 쌓여 있는 종이를 집어 들며 물었다.
“사실, 제가….”
* * * * *
“왼 발! 왼 발! 왼 발! 거기, 너! 오와 열 똑바로 안 맞춰!!!”
“죄, 죄송합니다!”
“이 새끼, 말 더듬는 거 봐라! 열 바퀴 추가다! 왼 발! 왼 발!”
양성소의 지옥 같은 아침 구보를 뛰는 훈련생들을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그땐 나도 저랬지. 참.
“왜. 너도 낄래?”
파멜라 교관이 내 옆구리를 콕 찌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뇨? 미쳤어요?”
“…싫음 말고.”
“오스틴. 저런 훈련을 받아 온 거야?”
“그렇지. 나 때는 더 심했어. 저 저, 설렁설렁 뛰는 것 봐라. 나였으면 바로 얼차려 받았지.”
“힘들었겠네….”
우리는 파멜라 교관을 따라 양성소의 연병장을 변두리 길을 따라 걸으며, 단장을 직접 만나기 위해 레인저 본부로 향하고 있었다.
파멜라 교관에게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한 상태였다. 물론, 루나와 실비아에 대해서는, 내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잘 얼버무릴 수 있었다.
본론이나 다름없는 아카데미 파견 관련 일을 물어보니, 단장과 상의를 해야 된다 하더라. 하긴, 아무리 양성소 전체를 담당하는 파멜라 교관이라 하더라도, 단장의 허락도 없이 교관들을 보내는 건 아닐 테니까.
“마침 잘 됐네. 현수막 건은, 네가 직접 설득해.”
“…같은 아줌마잖아요. 아줌마끼리 잘 마무리하면 안 돼요?”
“너 자꾸 아줌마라고 할래? 죽고 싶니?”
“농담. 농담.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왜 이렇게 발끈해요?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야.”
“죄송합니다.”
서른 중반이 다 돼 가면서, 아줌마가 아니긴 무슨….
그래도, 사람 자체가 유순하고 나긋나긋한 단장에게는, 내가 직접 현수막 건에 대해 따지고 든다거나 아카데미 파견 관련해서 떠들어 댄다 한들, 딱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사람이 워낙 별종인지라…. 매사에 지나치게 느긋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꼭 딴 길로 새곤 한다.
요는, 말이 통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딴 해괴한 현수막을 보란 듯이 걸어 놓은 것도, 단장이 시킨 일이라면 납득이 될 정도니까.
“…잘 해결되겠죠?”
“글쎄….”
파멜라 교관 역시, 확실하지 않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저는 지금의 단장님이 좋아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이 어디가 좋다고?”
“이전 단장들이 하나같이 삽질만 하기도 했고…. 아니, 왜. 예쁘시잖아요? 하는 짓들도 허당 같아서 귀엽고. 솔직히, 교관님보다 나이가 한 살 많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그 말은, 내가 그 여자보다 늙어 보인다는 뜻이야?”
“…그건 알아서 생각하시고.”
“야!!!!!!”
“실비아. 귀 막아.”
“응.”
파멜라 교관의 잔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며, 우리는 그렇게 레인저 본부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