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90. 전환점
* * *
나는 오른팔에 찬 완장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어색하네….”
레인저의 상징인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교관들만이 차는 녹색 띠의 완장. 옛날부터 봐 온 것이지만, 내가 차고 있으니 조금 어색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서게 된 양성소의 연병장은, 심지어 교관으로서 서게 된 연병장은, 내게 있어서 색다름 감회를 맛보게 해 주었다.
“앞으로 다섯 바퀴!!!”
“““다섯 바퀴!!!”””
“마지막으로 힘차게 외친다!!! 하나! 우리는 전우를 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전우를 버리지 않는다!!!””””
“둘! 우리는 왕국을 위해 헌신한다!!!”
“““둘! 우리는….”””
훈련생들이 뭐 빠지게 구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땀을 흘리다 못해 안색이 창백해진 게, 얼마나 오랫동안 뛰었는지 가늠케 해 주었다.
마지막 다섯 바퀴를 모두 돌고, 지칠 대로 지친 훈련생 무리들이 내 앞에 정렬했다.
“쉬어!”
“““쉬어!!!”””
대머리 교관이 외치자, 모두들 희망에 찬 표정으로 편하게 앉았다.
저 심정, 나도 잘 알지.
모두들 편하게 착석한 상태로 나를 쳐다보자, 훈련생들을 이끌던 대머리 교관이 나를 공손하게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분이 바로! 우리 레인저의 자랑이자, 왕국이 낳은 인재! 오스틴 대 선배님 되시겠다!”
“““오오오!!!”””
“너희들을 직접 교육시키기 위해,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어 주신 오스틴 일일 교관님께 박수!”
짝짝짝!!!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나를 바라보는 여성 훈련생들의 눈빛이 뜨겁다.
“하….”
이것 참. 낯 간지럽게.
난 이렇게 침 발린 소리 하면서 띄워주는 거 싫어한단 말이야.
“크흐흐흐….”
“오스틴….”
옆자리 그늘에 앉아 있던 실비아가, 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를….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쓰읍….”
곧바로 표정을 싹 바꾸곤, 차갑고 감정 없는 표정으로 훈련생들을 쭉 훑어보았다.
맥스… 맥스는….
어랍쇼?
“교관님?”
“예?”
대머리 교관이 빠르게 내 앞에 달려왔다. 왜 이렇게 나에게 깍듯한가 했더니, 내가 본 적이 없는 교관이었다. 이거 뭐, 나보다 짬을 덜 먹었구만?
“교관님. 맥스 훈련생은 어디 있습니까?”
“아…. 맥스 훈련생은 4조에 있습니다. 지금은 1, 3, 5조 훈련 시간입니다.”
파멜라 교관이 이런 쪽으로 디테일이 조금 부족하다니까. 하긴, 어차피 저격병 병과로 빠질 것일 테니, 내가 가르쳐 봤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긴 하다.
뭐, 어쩔 수 없나.
“흠…. 그럼.”
단상 밑을 내려다보았다. 모두들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용사 파티에서 있었던 썰이라도 풀어 주길 바라는 건가?
미안하지만, 나는 혹독한 훈련이 강인한 레인저를 낳는다는 말을 신봉하는, 지옥 훈련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일일 교관으로 오게 된 오스틴이라고 합니다.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
…이었습니다. 라고 해야 되려나?
아니, 그러면 좀 모양 빠지는데.
“크흠.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입니다.”
“와…. 용사 파티에 들어갔대….”
“대체 얼마나 뛰어난 레인저면….”
“그러고 보니, 입구에도 걸려 있었잖아. 커다란 현수막에….”
아니, 저 씨발련이. 아픈 데를 건드려.
“조용!!!!!! 훈련 시간에 누가 떠듭니까!!!!!!”
기대에 차 들떠 올랐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용사 파티 썰을 들으며 훈련 시간 동안 개꿀을 빨 생각 만땅이었던 훈련생들의 눈빛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지금부터, 제 허락 없이 떠들지 않습니다!!! 다른 교관들 앞에서는 떠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제 앞에서는 어림 반푼도 없습니다!!!”
“하아….”
“한숨 쉰 놈 누구야!!! 삼 초 주겠다! 앞으로 튀어나와!!! 하나!!!”
한숨을 내쉰 훈련생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짐짓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1조 3번 훈련병! 조엘!”
“조엘 훈련생! 한숨은 왜 쉬었습니까!”
“그, 그게….”
“대답 똑바로 안 합니까!!! 자랑스러운 미래의 레인저 대원들이, 말이나 더듬어서야 되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조엘 훈련생 제외, 전부 엎드려뻗쳐!!!”
연병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옆을 슬쩍 바라보니, 대머리 교관이 대단히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비아는 대단히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이런 훈련을 받아 왔다고 생각하니 신기한 건지.
“어쭈….”
다시 훈련생 무리들을 바라보았음에도, 아무도 엎드리지 않았다.
“제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악!!!!!! 전원!!! 엎드려뻗쳐!!!!!!”
“““어, 엎드려뻗쳐!!!”””
음. 좋아.
조엘을 제외하고, 모두가 낑낑거리며 엎드려뻗치게 되었다. 이따금씩 조엘을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심상치 않았다.
이게… 권력의 맛…?
일일 교관, 나쁘지 않을 지도…?
“흠흠.”
내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다 조엘을 위한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개선해야 할 점은 확실히 개선해야 한다. 이 상태로 본대에 배치를 받게 되면, 십중팔구 민폐만 끼치고 폐급으로 나락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내가 교정시켜 주어야겠지.
조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주 사색이 되어 있다.
그렇겠지. 자신의 작은 실수 하나 때문에, 다른 동기들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으니.
“조엘 훈련생!”
“1조 3번 훈련생! 조엘!”
“지금 조엘 훈련생 덕분에, 다들 아주 좋아 죽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까!”
“그, 그렇습—.”
“오호, 그래? 조엘 훈련생이, 여러분들이 엎드려뻗친 것을 좋아한다고 판단 한 모양입니다! 10분 추가!”
“으아아…! 아닙니다!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조엘이 거의 울상이 된 표정으로 외쳤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이번 한 번만 봐 드리겠습니다! 자리로 돌아가!”
“예!”
“다들 바로 앉아!”
“““바로 앉아!!!”””
이렇게 하면, 아마 다음부터는 동기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더욱 조심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조엘이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화제를 돌리는 데는, 넋을 놓고 경청하게 만드는 재미난 이야기 만한 게 또 없지.
“그럼,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 교관에게 있어서 뼈가 되고 살이 되었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모두 귀를 활짝 열고 경청하도록 합니다!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다들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용사 파티 썰, 딱 대.
* * * * *
“어우, 나 죽겠다….”
정정. 일일 교관은 아주 나쁜 선택이었다.
용사 파티 썰을 풀겠답시고, 거의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심지어, 그 이후로는 또 제대로 된 훈련에 들어갔다.
용사 파티 썰을 듣고 난 뒤라서 그런지, 다들 의욕이 활활 불타올라서 가르치는 맛이 있었다.
너무 적극적으로 열심히 훈련에 참여한 탓일까. 진짜 피곤해도 너무 피곤했다. 이대로 누우면 바로 잘 수 있겠는걸.
“으휴…. 이 바보야. 그러게 좀 쉬엄쉬엄 했어야지, 그렇게 힘들게 하면 어떡해?”
나를 부축해주며 걷고 있는 실비아가 투덜거렸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실비아. 너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레인저 새싹들을 기르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야. 그렇게 함부로 할 수는….”
“아, 그래 그래. 알겠어.”
“아니, 너도 재밌게 구경했잖아. 이거 어디서 함부로 구경 못 하는 거라고.”
“으이그…. 됐네요. 그런 거, 또 보여 준다고 해도 안 보거든요.”
말은 이렇게 해도, 제일 재밌게 구경한 건 실비아였다. 나는 뭐 실비아가 서커스라도 보러 온 줄 알았다.
그렇게 뚱한 표정의 실비아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니, 실비아가 머리를 휘휘 저으며 내 팔을 꾹꾹 밀었다.
“됐으니까, 이제 떨어져. 너무 무겁거든.”
“쯧. 팔 걸치기 딱 좋은 위치였는데.”
“에휴…. 참….”
성벽 너머로 이글거리며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렇게 여관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한참 동안 조용히 있던 실비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아카데미 건이 잘 풀려서 다행이네.”
“휴…. 그렇지. 제일 중요한 일이 잘 풀렸으니, 어찌 됐건 다행이지.”
“알렉시스 공녀와는…. 아직 친해지지 못했단 말이야. 벌써 떨어지면, 조금 서운할 것 같거든.”
실비아는 알렉시스 공녀와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거 이거, 평소에는 튕겨대면서 말수도 적더니, 쑥스러워서 그랬던 거구만.
“근데, 너는 뭐 어떤 방향으로 아카데미에 들어가야 되냐.”
“응?”
“아니, 생각해 봐. 너는 마족이라서 원소 마법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밀랍을 이용한 마법밖에 사용하지 못하잖아?”
“…아.”
실비아가 정신이 확 들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뭐야. 별 생각 없었어?”
“그치만…. 루, 루나는….”
“루나는 뭐…. 창을 잘 다루잖아? 근접전 과목으로 들어가면 되겠지.”
“아…. 하, 하지만….”
실비아의 눈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뭐, 혼자만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겠지.
“걱정하덜 마셔. 내가 누구야. 당연히 네가 들어갈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놨지.”
“저, 정말?!”
“그럼. 당연하지.”
청소부나 개인 사용인 신분으로 들어가겠지만.
나는 이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실비아도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내 잘못은 없는 거 아닐까?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만난 그…. 라이칸슬로프랑 마법사 말이야.”
“어. 이름이… 시몬이랑… 조이였던가?”
“근처에 여관을 잡겠다더니, 그 이후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네.”
“뭐…. 자기들 나름대로 바쁜 거겠지.”
그렇게 떠들어 대며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여관 앞에 당도해 있었다.
다들 방에 있으려나.
계단을 타고 올라가, 오늘 아침에 나섰던 방문 앞에 섰다.
덜컥.
“얘들아! 나왔어!”
내가 방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가며 외치자, 방안에 있던 모두가 나를 돌아보았다.
용사 파티는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뭐야? 다들 왜 이렇게 죽상이야?”
“““…….”””
분위기가 굉장히 싸하다. 나는 눈치를 챙기기로 했다.
조용히 장비를 정리하고, 잽싸게 목욕을 하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때까지, 모두들 입도 뻥끗하지 않고 있었다.
“야, 실비아. 무슨 일 이래?”
“나도 몰라. 용사는 왕궁에 다녀왔다더니, 무슨 일 있었나?”
“오스틴.”
마침내, 용사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용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 너희 무슨 일 있어? 왜 다들 똥 씹은 표정으로….”
“할 얘기가 있어.”
용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나는 긴장감에, 목울대를 움직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뭐, 뭔데?”
불안한데.
희소식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
최악은 아니길 빌며, 용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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