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92화 (92/106)

〈 92화 〉 91. 제자리걸음

* * *

“오스틴…. 이, 이것도 좀 먹어 봐….”

아드리엔이 애써 웃어 보이며, 저 멀리 있던 고기를 집어 주었다.

“…됐어. 너 먹어.”

짧게 대답하곤, 아드리엔이 건네어 주는 것을 슬쩍 밀어냈다.

“…….”

다시금, 침묵.

어젯밤,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로, 줄곧 이 모양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애꿎은 고기만 포크로 쿡쿡 찌르며, 깨작깨작 입으로 옮기는 아침 식사가 계속되었다.

그 사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로빈 조차도.

“하아….”

내가 한숨을 내뱉으니, 내 맞은편에 앉은 용사 파티가 몸을 움찔 떨었다.

지금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방법은 있다. 어제 용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받아들이면 되는 건데….

그때, 내 맞은편에 앉아서 식사를 하던 이사벨과 마야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오, 오스틴…?”

“혹시, 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아냐. 괜찮아.”

어제부터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인지라, 음식에선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먹다간 체할 것만 같아서, 나는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올라가 있을게. 입맛이 없네.”

“어, 응…. 그래….”

“혹시 배고프면 말해라, 오스틴. 내가 다시….”

“괜찮아. 고마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방 안으로 황급히 돌아왔다.

텅 비어있는 방을 보니, 그래도 내 생각을 방해할 거리가 없어서 마음이 놓였다.

의자를 빼어 앉고, 멍하니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활기찬 바깥 분위기와 다르게, 내 속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 심란한 마음을, 로이먼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풀어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로이먼은 오늘도 대성당에 갔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푹신해 보이는 침대 위로 풀썩—! 몸을 날렸다. 편안한 자세로 누운 채 침대에 몸을 파묻으니, 노곤노곤 해져서 의식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후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어제 용사와 나눈 대화를 다시금 상기해보았다.

* * * * *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그거였어?”

“응. 그… 미안….”

“아니…. 하아….”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였다.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니, 앞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겠지. 분명 그렇겠지.

그러나,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다시금 고개를 들면 여전히 용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용사 파티로, 복귀하라고. 그것도 왕명으로.”

용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니, 그…. 하아아….”

왕명. 왕명. 아니, 지금 나랑 장난 하자는 것도 아니고, 왕명?

시발. 그냥 그릇에 코 박고 죽을까.

아니, 그것보다. 그딴 헛소리를 듣고도 ‘예이~. 알겠습니다~.’ 하고 넙죽 받아 왔다는 거야?

“그거,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야?”

아무리 이 나라의 국왕이라고 해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용사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

“모, 모르겠어…. 뭐라 말을 하려 했는데, 나도 잘….”

“…아.”

그러고 보니, 용사 얘…. 처음에 국왕을 알현할 때도 엄청 긴장했었지. 땀까지 뻘뻘 흘려가면서 말이야.

딱 보니 그림이 나온다. 아마 알현실에서 어버버 거리다가, 엉겁결에 그대로 받아 버리고 나온 것이겠지.

“아니, 그걸 거절하던지 어떻게 했어야 됐을 거 아니야….”

“미, 미안….”

그냥,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 저…. 후우….”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내 눈치를 보는 용사를 흘겨보았다.

“다시 왕궁으로 가서, 알현실에 가서, 국왕 폐하를 만나 뵙고, 네가 싫다고 해. 안 된다고 말해. 네 입으로, 직접.”

“하, 하지만….”

“하지만…. 이 아니라! 아니, 상식적으로! 내 입장에서 좀 생각을 해 봐라! 로이먼, 로빈, 루나, 알렉시스 공녀님, 실비아! 지금 나랑 같이 다니는 파티원들만 다섯인데! 내가 홀랑 용사 파티로 붙어 버리면, 얘들은 어떻게 하라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뭐.”

용사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어 갔다. 그녀가 끝내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한 채 우물쭈물거리고 있자, 옆에 앉아 있던 그레이시가 나섰다.

“오스틴. 왕명은 거역할 수 없다. 미안하지만, 이번 한 번만 굽혀 주면 안 되겠나? 이전 같은 대우는 절대 없을 것이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뭘 원하지? 산더미 같은 재화? 명성? 명예? 아니면….”

또다. 또. 그레이시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레이시. 나는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오스틴. 용사와 아드리엔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나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한다.”

천천히 내게 몸을 들이대는 그레이시의 눈빛이, 어쩐지 조금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기회라고?”

“그래. 우리 파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아주 결정적인….”

염병할. 뭔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아주 소설을 쓰고 앉았네.

“아니! 내가 그렇게 훌렁 떠나 버리면, 내 파티원들은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군단장 다섯이 사라졌다! 남은 군단장은 셋 밖에 없으니, 여정은 금방 끝나지 않겠나! 오스틴, 너를 따르던 다른 이들은 잠시 수도에 남아 있으라 하고….”

“야이 씨발, 그게 말이야 방구야! 아무리 왕명이라도 그렇지, 또 그 지랄을 하러 떠나라고? 내 파티원까지 버려두고?! 아니! 절대 안 가!”

“그런….”

그레이시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몸이 굳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레이시의 옆에 앉아 있던 아드리엔이 말을 걸어왔다.

“오스틴. 나도 웬만하면 네 편을 들어주고 싶은데, 이건 어쩔 수가 없어. 인간들의 나라에서, 왕명은 절대적인 거잖아?”

“…난 안 가. 내 파티원들 두고는, 어디에도 못 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파티로 돌아오라고 해도, 그렇게 순순히 따를 수는 없었다. 내가 무슨 이유로 파티를 나왔는가.

파티를 나온 이유의 8할이 용사 파티의 갈굼이었다면, 나머지 2할 가량은 마왕을 토벌하는 여정 중에 받은 온갖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아직 그녀들이 내게 저지른 짓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파티에 복귀하라고?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오스틴. 그러지 말고, 조금 더 생각해 볼 수는 없어?”

“…미안하지만, 그래도 내 대답은 똑같아. 안 돼.”

“하지만…. 우리는 오스틴의 도움이 필요 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응?”

“…미안, 아드리엔. 그래도… 안 돼.”

내가 끝까지 버티고 있자, 아드리엔이 갑자기 발끈하며 책상을 쾅 내리쳤다.

“아…! 정말! 오스틴! 이건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니까?!”

“아이씨, 깜짝이야! 왜 갑자기 지랄이야!”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니, 결국 이렇게 얼굴을 붉히게 되는구나.

나 역시 책상을 쾅 내리치며 아드리엔을 노려보자, 아드리엔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애처럼 떼를 써도, 바뀌는 건 하나도 없어! 이건 왕명이라고!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너희는 뭐 따지기라도 했냐?! 애초에 처음에 용사 파티에 들어갈 때부터, 마왕을 잡을 때까지 남아 있으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어! 내가 이제 내 갈 길을 가겠다는데, 왜 갑자기 탁상공론이나 나누던 높으신 분들이 참견이야!”

“너…! 그 얘기, 네가 직접 알현실에 가서 얘기해 봐! 뚫린 입이라고 지금…!”

“시팔, 나는 너희가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왔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내가 아무리 용사 파티원으로 뽑혔다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내 말을 이해 못하겠어?! 왕명이라고! 왕명! 내가 아무리 엘븐 왕국에서 왔다고는 해도, 어떻게 한 나라의 국왕의 결정에 반발하겠냐고!”

“용사는 충분히 그럴 힘이 있잖아! 그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었다는 건, 그냥 너희들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겠지!”

순간, 아드리엔이 몸을 움찔 떨며 뜨끔했다.

그럼 그렇지.

“허, 헛소리 하지 마, 오스틴! 애초에 우리가 너한테 심하게 군 것도, 결국 우리 때문만이 아니었잖아!”

“그게 뭔 개소리야? 또 갈란 핑계를 대기에는, 내가 너희들 뒷바라지를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았냐?”

“이익…!”

아드리엔이 씩씩거리며 나를 째려보았다.

뭐. 어쩔 건데. 나 역시 아드리엔을 마주 노려 보았다.

“자, 자. 아드리엔. 그…. 일단 진정해라. 진정.”

“선배님. 너무 흥분하셨어요. 조금 진정하세요.”

진정? 나는 진정이 안 된다.

기껏 용서를 하기로 마음먹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부터 이렇게 뻔뻔하게 나온다고? 아무리 용서를 했다고 해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각자 그레이시와 로빈에게 붙들린 채, 서로를 노려보길 잠시.

별안간 아드리엔이 손가락을 척 들어 올리곤, 나를 가리켰다.

“그, 그러는 너는! 그때 불침번 담당이었으면서, 그렇게 책임감 없이 훌쩍 떠나 버려놓고! 우리는 버려도 되고, 네 새 파티원들은 버리면 안 돼?! 너 엄청 이기적인 거, 알아?!”

“…허. 뭐라고?”

“이 책임감 없는 놈아! 따지고 보면, 파티를 멋대로 나간 건 너잖아! 왜 우리가 너를 이해해 줘야 되는데!”

“아, 아드리엔! 그만! 그만 해라!”

“아드리엔! 일단 진정 좀 하세요! 지금 너무 흥분하셔서, 자꾸 실없는 소리가 나오잖아요!”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오스틴! 네 입으로 반박해 봐! 네가 책임감도 없이 멋대로 파티를 나가 놓고, 이제는 왕명으로 돌아오라는 말도 거역하겠다고?! 멋대로 파티를 나간 건 이해해 주겠는데, 우리가 왕명에 어떻게 반발하냐고! 억지도 정도껏 부려야 될 거 아냐!”

“아드리엔!”

“…….”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뭐라 말이 안 나오네.

“…그래.”

너희들은 줄곧,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레이시와 이사벨에게 붙들린 아드리엔이, 순간 아차 싶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이제 와서 그렇게 나와도 소용없었다.

방금 내뱉은 말들은, 누가 봐도 진심이었으니까.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아니, 나는… 그, 그게 아니라….”

“그래. 알겠어. 파티 복귀, 한 번 생각해 볼게.”

“아…! 저기…! 자, 잠깐!”

아드리엔이 다급히 나를 붙잡으려 하기에, 거칠게 뿌리쳤다.

“읏…!”

“너희들… 특히, 아드리엔의 생각은 아주 잘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해.”

고개를 푹 숙인 아드리엔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지금까지 아드리엔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적지 않은 배신감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그렇다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따지자니, 또 아드리엔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맞는 말이긴 하다. 내가 말도 없이 파티를 떠난 건 맞으니까.

그런데, 그걸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로이먼마저 잠에 들었음에도.

나는, 늦은 시간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 * * * *

그리고, 다시 지금.

“하아….”

어제 그 일이 있은 뒤로, 용사 파티, 특히나 아드리엔과는 엄청나게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아드리엔이 말도 안 되는 말만 했으면 모르겠는데, 내게 한 말들이 또 맞는 말들이라서 그런지, 나 역시 엄청나게 착잡한 기분이었다.

기껏 좋게 새 시작을 하나 싶었더니만, 결국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한 꼴이 되었다.

똑똑.

“오스틴…. 들어가도 될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힘이 없는 아드리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그대로 걸터앉은 채 말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내 눈치를 잔뜩 보는 아드리엔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침대 맞은편에 놓인 탁자에서 의자를 빼어 낸 아드리엔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오스틴….”

“미안.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게.”

“어, 어…?”

“네 말이 맞더라고. 내가 책임감도 없이 파티를 나갔다는 거. 생각해보니까, 네 말이 맞더라.”

“아, 아니야… 나는….”

아드리엔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드리엔과 눈을 마주하지 않은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렇지만…. 응. 나는 지금 내 파티원들도 버리지 못하겠거든.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래?”

“아… 으…. 나, 나는… 그러려고 온 게 아니라….”

“책임감 없어서 미안해. 얘기 다 끝났으면, 난 먼저 일어날게.”

아드리엔에게서, 미약하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걸어 나왔다.

관계적인 면에서도, 거리감에서도, 생각의 차이 면에서도.

적어도 아드리엔과 나는, 아직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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