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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93화 (93/106)

〈 93화 〉 92. 책임감, 그 무게에 대하여

* * *

쏴아아아—.

광장 벤치에 앉아, 분수대에서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막힘없이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의 물과 상반되게, 내 마음속은 무언가에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여관에 틀어박혀 있자니, 그 분위기에 짓눌려 숨이 막힐 것만 같아서 빠져나왔건만. 답답한 이 느낌은 변한 없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그때 불침번 담당이었으면서, 그렇게 책임감 없이 훌쩍 떠나 버려놓고!’

“…책임감. 책임감이라.”

책임감. 이 무거운 단어를 곱씹어 보며, 그 내면에 숨은 의미를 음미해보았다.

책임감 없다는 말은, 이번이 살면서 두 번째로 들은 일인 것 같다.

첫 번째는 와일러에게 들었지, 아마.

“그러고 보니, 와일러도 만나봐야 할 텐데….”

와일러에게 들었을 때에는, 오로지 미안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내 잘못이 분명한 일이기도 했고. 내게 책임감을 들먹인 사람은, 와일러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두 번째를 다른 누구도 아닌, 파티에 있을 당시 나를 가장 하찮게 보던 아드리엔에게서 들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 말이다.

내게 처음으로 책임감을 운운했던 와일러에 비하면, 턱없이 자격이 없는….

“자격. 허, 참.”

내 주제에 자격을 들먹이다니. 나도 슬슬 미친 건가 싶다. 아직 벽에 똥칠할 나이는 아닌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드리엔이 나를 박하게 대했다고는 하나, 내가 용사 파티를 무단으로 나온 것도, 어떻게 보면 책임감 없는 행동이 맞긴 하다.

레인저에서 그랬다면, 탈영으로 즉결처분당해도 할 말이 없는 짓이니까 말이다. 그때는 내가 뭐에 홀리기라도 했나 보다.

‘우리는 버려도 되고, 네 새 파티원들은 버리면 안 돼?! 너 엄청 이기적인 거, 알아?!’’

이기적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그때, 적어도 용사 일행과 이야기라도 나누었어야 했다.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파티를 나온 것은, 어찌 보면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짓이었다.

그런 주제에, 그렇게 이기적이고 책임감 없이 파티를 나온 주제에, 그새 새로운 파티를 꾸려서 다니고 있는 꼴이라니. 심지어, 용사 파티는 그렇게 멋대로 나와놓고, 이번 파티에서는 책임감 있는 척. 온갖 폰을 다잡는 꼴이라니.

“…와. 진짜 씹새끼가 따로 없네.”

이렇게 생각해보니, 아드리엔이 그렇게 갑작스레 폭발한 것도 이해를 못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과연 아드리엔은 내게 그런 말을 하고도 떳떳할 수 있느냐의 문제지.

“어으….”

속이 더부룩해졌다. 문득, 나 자신이 역겨워졌다. 내 이중적인 잣대가 역겹고, 또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사람이었던가.

요즘 들어 생각하는 것이지만, 가끔씩 내 자아가 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옛날에는, 이렇게 막 나가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전에는 그저, ‘용사 파티에서 온갖 부조리를 당해서 그렇다.’라는 편의주의적인 생각으로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확실히 최근의 나 자신은… 확실히 조금 낯설었다.

“쯧….”

가볍게 혀를 찼다. 우습기도 하지. 그래 봤자, 내가 책임감 없이 행동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인데 말이다.

이번 일은, 서로의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꾹꾹 눌러 담고 있던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일이었다. 가슴 한편에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서운함, 실망감, 배신감, 미안함, 죄책감 등등.

온갖 감정들이 일촉즉발의 폭발물이 되었고, 혓바닥이 그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감정의 골을 메울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하지 못한다.

왕명. 왕명으로 인해, 용사 파티로 복귀해야 하는 나.

이걸 어떻게, 파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걸까. 조금의 빈틈이라도….

“하아….”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려 하면, 자꾸만 옆자리에서 시선이 느껴져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이사벨을 쏘아보았다.

“언제까지 달라붙어 있을 거야?”

“ㄴ, 네?”

“아니, 언제까지 졸졸 따라다닐 거냐고. 오늘은 대성당에 안 가도 돼?”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이사벨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너도 내가 책임감 없는 놈으로 보여?”

내가 자조하며 말하자, 이사벨이 학을 떼며 곧장 대답했다.

“무슨…! 저, 저는 그런 게 아닌….”

“아니긴.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어차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말이야….”

잠시 말을 끊고, 분수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이름 모를 벌레 한 마리가, 대여섯 마리의 개미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지금의 내 모습과 겹쳐 보였던 것은, 우연일까.

내가 무의식적으로, 저런 관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다시금 고개를 들어,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이사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용사 파티에 복귀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미안해요.”

돌연, 이사벨이 사과를 해 왔다.

“왜 갑자기 사과를 하는 거야. 너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닌데.”

“아니요.”

이사벨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이윽고, 한 뼘 정도의 거리만큼 가까워졌을 무렵, 이사벨이 말을 이었다.

“비록, 이번 일은 아드리엔의 섣부른 언동 때문이긴 하지만…. 어쩌면 저 역시,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저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느끼고 있지만, 타인의 시선에서는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까,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그만해.”

어째서인지, 이사벨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이사벨의 시선을 피했다.

“…오스틴.”

“…왜.”

“어째서,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냥.”

순간, 내 양 뺨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손으로 내 뺨을 조심스럽게 감싼 이사벨이, 내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녀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정말, 정말 미안해요. 오스틴. 비록 제가 알현실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내 뺨을 감싸 쥔 이사벨의 손을 툭 밀쳐 내었다. 그녀의 손이 힘없이 나가떨어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사벨의 손이 다시금 내 뺨을 감쌌다.

“만약 제가… 하다못해 마야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있었다면?”

“…그랬다면, 오스틴이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르지요.”

“글쎄.”

다시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방금까지 개미에게 끌려가던 벌레가, 혼자 살아남은 채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개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사벨.”

“네, 오스틴.”

“아드리엔의 말이 맞아. 나는 책임감 없는 놈이야.”

“그, 그렇지 않아요….”

“아냐. 부정하지 않아도 좋아. 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아드리엔과는…. 아마 당분간은 가까이 지내기 힘들 것 같았다. 서로의 감정의 골이 이리 깊으니.

그 감정의 골은, 양 쪽 모두가 노력하여 채워 나가야 한다. 마침내 골이 메워지고, 평평한 땅이 되어, 서로의 마음에 왕래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나는 한 발짝 나아가기로 했다. 우선, 내 과오를 인정하는 것부터.

그래. 나는 이기적인 놈이었고, 책임감 없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건, 아드리엔 역시 마찬가지.

나는 할 만큼 하고 있다. 이제는, 아드리엔이 노력해 주길 빌어야겠지.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실질적인 해결책. 그걸 찾아야 한다.

‘결국 아드리엔이 잘못 한 건데, 왜 내가 해결책을 모색해야 해?’ 같은 유치한 마인드는 옳지 못하다. 아드리엔은 감정의 골을 메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니, 나는 근본적은 해결책을 찾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한담.”

“…무슨 말씀 이시죠?”

“뭐. 국왕 폐하께서, 나더러 파티로 복귀하라고 명하셨다면서. 용사 정도면, 왕명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방향을 틀 수는 있을 텐데.”

“으음….”

이사벨이 턱을 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금 흐트러진 수녀복을 바로 잡아주며, 나 역시 생각에 빠졌다.

“책임감….”

문뜩 시야를 돌려 보니, 벤치 뒤쪽에서 관리가 잘 되지 않은 기다란 풀이 내 어깨를 넘어 슬쩍 튀어나와 있었다.

이름 모를 풀에 붙어 있는, 진딧물과 개미가 눈에 들어왔다.

개미는 진딧물을 보호해 주고, 진딧물은 감로를 제공해 준다.

공생 관계.

사람과 사람 간의 사이에서, 저런 관계는 썩 좋지만은 않은 관계라고 볼 수 있겠지만….

우리들은, 최소한의 공생 관계 만이라도 될 수는 없는 걸까.

공생 관계 만이라도….

…잠깐.

“…공생 관계.”

“…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설마, 해결 방안을 생각해내셨다는….”

“뭐…. 대충은?”

이게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켜자, 이사벨이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그게 대체 뭐죠?”

“길드나 가자.”

“…뭐라구요?”

이사벨이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한번 웃어 보이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세 걸음 정도를 걸었을 무렵, 퍼뜩 정신을 차린 이사벨이 후다닥 내 곁으로 따라붙었다.

“그 방법이 대체 뭔가요! 저도 알려주세요!”

“나중에. 다른 애들이랑 같이 알려 줄게.”

“그런…!”

이사벨이 입을 앙 다물고 나를 째려보았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받아 넘기곤, 길드가 위치하고 있을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우선, 길드부터 들르자고.”

어제는 예상치 못한 훈련을 감행한 덕분에, 갈란의 현상금도 받지 못했다.

머리 아픈 생각은 그만하고, 우선 돈부터 받자.

복잡한 생각을 관두니,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 * * * *

“…마야.”

미약하게 옷자락을 당기는 느낌에, 마야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 자국이 말라 붙은 아드리엔이, 새빨갛게 부은 눈으로 마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드리엔.”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도서관에서 빌려 온 마법 서적을 잠시 덮은 마야는, 아드리엔과 용사, 그레이시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마, 마야…. 나….”

“아드리엔.”

“응…?”

마야의 말투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아드리엔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싸늘한 표정의 마야가, 아드리엔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혹시나 오스틴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묻는 거라면, 너 스스로 생각해.”

“어, 어…? 무슨….”

아드리엔이 어깨를 흠칫 떨어대는 모습을, 마야는 놓치지 않았다. 정곡이었다.

“물론, 나도 오스틴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제 네가 오스틴에게 한 말은, 너무 심했어.

“으우…. 나도 알….”

“그걸 알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마야가 무섭게 거리를 좁혔다.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던 아드리엔이, 마침내 벽에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게 될 때까지.

“용사, 그레이시…. 그 둘은 그렇다 쳐. 용사는 애초에 국왕 폐하를 대하기 어려워했고, 그레이시는 왕실 근위대의 대장이라는 자리에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최소한, 너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됐어.”

“나, 나는….”

싸늘한 마야의 눈빛이, 툭툭 내뱉는 마야의 말들이, 아드리엔의 마음속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아, 으…. 아….”

그런 아드리엔을 잠시 멀뚱히 바라보던 마야가, 이윽고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오스틴은 아마, 너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한 용사 파티원 모두가, 오스틴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받아들였을 거야.”

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리 말한 마야는, 고개를 돌려 아드리엔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무너져 내린 아드리엔에게, 한 마디.

“네가 엎지른 물은 네가 닦고, 네가 치워. 오스틴에게 진심으로 사과 해. 나도 그럴 생각이고, 용사도, 그레이시도 그럴 생각이니까.”

마야가 떠나는 모습을, 아드리엔은 멍하니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이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엘프는,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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