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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94화 (94/106)

〈 94화 〉 93. 역지사지

* * *

“정말… 엄청나네요. 그새 몸값이 이렇게나 올랐을 줄은….”

“그러게나 말이다….”

손에 들린 주머니가 묵직했다. 평소 같았으면 힘들기만 했을 그 묵직함이, 오늘만큼은 내 마음을 뿌듯하게 채워 나갔다.

갈란을 토벌해서 받은 보상금, 도합 금화 300닢.

그렇게 고생해서 받은 돈이니 뿌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갈란의 몸값이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악명을 떨쳤다는 소리니까.

하르만에서 중앙 시장을 통째로 불태워 버린 것도 한몫했지만, 벨리온에서 바위 메뚜기를 풀었을 때에도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한 것이었다.

개 같은 련…. 막말로 지금 아드리엔과 서먹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새끼 때문 아니야?

“뭐, 그건 차치하고….”

꽉 동여 맨 주머니를 슬쩍 풀어헤쳐보면, 반짝이는 황금빛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캬….”

금화. 금화 300닢. 이건 뭐, 마법이 따로 없다.

금화 300닢이다. 무려 300닢. 이 말 하나로 기분이 이렇게 좋아지다니, 이게 마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후후…. 그렇게 좋으신가요, 오스틴? 아이처럼 신나셔서는….”

이사벨이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었다. 그런 이사벨의 허리춤에는, 내 돈주머니 만한 크기의 주머니가 두 개나 매달려 있었다.

아가일을 토벌했다는 명목으로 받은 돈 주머니 하나, 그리고 헌틀리를 토벌 한 명목으로 받은 돈 주머니 하나.

정확히 말하자면, 아가일은 우리 파티에 멀쩡히 잘 살아 있지만…. 그걸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냥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야이씨. 너는 나보다 두배나 더 받아놓곤….”

“후후…. 그러게, 파티를 나가지 말았어야죠. 파티를 나가지 않으셨다면, 오스틴에게도 몫이 돌아갔을 거라구요?”

“미안하지만, 애쉬와 우르간의 몫은 나도 받아야 하거든. 나중에 떼먹지나 마셔.”

우르간과 애쉬의 현상금은, 나중에 용사 파티원 모두와 함께 가서 정산받기로 했다. 나 혼자 토벌한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렇다고 그것까지 다 들고 가기에는 너무 무거웠으니까.

이사벨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성녀예요, 오스틴. 그런 짓은 하지 않는 답니다.”

“…아, 참. 너 성녀였지?”

잠시 까먹고 있었네. 얘, 성녀였지?

“…저기요. 오스틴.”

“야, 빨리 가자. 나 배고프다.”

“오스틴!!!”

* * * * *

이사벨과 함께 여관으로 돌아왔다. 로이먼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뭐, 중요한 일이라도 생겼나?”

“음…. 미사에 참석하신 게 아닐까요? 미사는 보통 늦게 끝나니까요.”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사벨과 함께 여관으로 들어와 보니, 로빈이 혼자 1층에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로빈!”

“읍? 우으으음!”

“다 먹고 말해, 다 먹고.”

“푸하…. 선배님!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로빈이 헤실헤실 웃으며, 그녀의 옆자리 의자를 팡팡 내리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로빈의 옆자리에 앉았다.

“새삼스럽게, 뭘…. 그래서, 날 왜 기다리고 있었는데?”

“헤…. 그러면 안 되나요?”

이사벨이 잠시 고개를 돌려 식사를 주문하는 사이, 로빈이 내 귀에 바싹 입을 갖다 대고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사이…잖아요…?”

“아흐으….”

내가 몸을 부르르 떨어대자, 로빈이 요염하게 웃으며 멀어져 갔다.

이 요망한….

“응? 무슨 일 있나요?”

“…아냐, 아무것도. 귀에 벌레가 들어가서.”

“흐응….”

이사벨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 이게 다 로빈 때문이잖아.

내가 로빈을 힐끔 째려보자, 로빈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그… 장난이구요. 사실, 아까부터 아드리엔이 선배님을 찾더라구요. 사과하고 싶은 모양이던데요?”

“…아드리엔이?”

그 자존심만 센 엘프가 사과하기까지,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네.

아드리엔도 여태껏 놀고먹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사람이 발전을 해야지.

“어디에 있는데?”

“위층에요.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도, 됐다고 하던데요? 아드리엔이 그렇게 힘없는 모습, 저는 처음 봤어요.”

우물거리며 내뱉는 로빈의 말에, 마음속이 조금 착잡해졌다.

그래도, 내가 책임감 없이 행동했던 건 맞는데.

“나도 잠깐 위에….”

“아, 아. 선배님.”

커다란 고기를 물어뜯던 로빈이,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내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왜?”

“그…. 저녁, 아직 안 드셨죠?”

오늘은 입맛이 없어서, 아침도 조금만 먹고 나왔지, 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배가 고파진 것 같았다.

“그렇긴 하지.”

“그럼, 저랑 같이 저녁이나 먹어요. 혼자 먹기에는 조금 쓸쓸해서….”

“아니, 나는….”

“안 되나요…?”

꼬르르르륵—.

“…안 될 건 없지.”

* * * * *

똑똑—.

“…….”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로빈이 아직 방 안에 있다고 했는데.

똑. 똑.

조금 더 힘을 실어서 문을 두드리자, 방 안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나야.”

우당탕탕—! 쿵!

“얼씨구.”

방 안에서 큰 소리가 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뭐지? 죽었나?

“아드리엔. 괜찮아? 방금 엄청 큰 소리가 났는데.”

“어, 으, 응…! 괜찮아!”

아드리엔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이거, 분명히 뭐 숨기고 있구만.

“…들어가도 돼?”

혹시나 옷을 갈아입는 중 일지도 모르니,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나처럼 신사다운 남자가 또 어디 있겠어.

“자, 잠깐만…!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 그래….”

아드리엔의 기세에 눌려, 엉겁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1분, 2분, 3분….

“…아니, 뭘 하길래 이렇게 오래 걸려?”

거진 10분 가까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문이 열렸다.

“후우… 후…. 기, 기다렸지. 미안….”

잔뜩 상기된 표정의 아드리엔이, 나를 바라보며 주춤주춤 다가왔다.

“…어, 아냐. 별로 안 기다렸어.”

평소답지 않게 기가 죽은 아드리엔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축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 앞에서 쭈뼛거리는 아드리엔을 힐끔 바라보고, 그대로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탁자에서 의자를 빼내어 앉으니, 아드리엔이 반대쪽에….

“…?”

아니, 왜 내 옆에 와서 앉는 거니.

“왜…?”

마치 이러면 안 되냐는 듯이, 아드리엔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아냐. 아무것도.”

“…응.”

“그런데, 아드리엔. 나는 너랑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이렇게 앉으면, 서로 대화하기 불편하지 않을까?”

“응? 나는 괜찮은데?”

“아니, 너는 괜찮겠지만….”

시발. 내가 안 괜찮다고.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것인지, 아드리엔의 머리카락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반짝이고 있었다. 꽃 향기가 은은하게 코를 간질였다.

뭐지? 나를 유혹하는 건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아드리엔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후다닥 일어나 내 반대편에 앉았다.

“아…. 미안. 네가 불편할 줄은…. 그건 생각을 못했네….”

“어, 어…. 그래….”

갑작스레 바뀐 아드리엔의 태도에, 나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그 이기적이고 거만했던 아드리엔이, 이렇게 한 발 물러서는 날이 오다니.

어제는 그렇게 폭언을 쏟아부어놓고, 무슨 계기로 이렇게 사람이 바뀐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렇게 한참 동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아드리엔이, 이내 나를 힐끔 올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저기, 오스틴…. 나 사실, 오스틴에게 할 말이….”

“아드리엔.”

“으, 응?”

지금 사과할 마음이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일단 할 말은 해야겠지.

“네가 어제 나한테 한 말,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단 말이야.”

“아, 그, 그건….”

“그래서, 오늘은 밖에 나가서 생각을 조금 해 봤는데…. 아주 획기적인 해결 방법을 알아냈단 말이지. 잘 들어봐.”

“아니, 그…. 오스틴…?”

“왜, 지금까지 내가 너희들과 의견 충돌이 일어났던 쟁점은, 내가 용사 파티에 복귀를 하느냐 마느냐. 이 문제였잖아? 그런데, 내가 아주 획기적인 해결 방법을….”

“그게 아니야!”

아드리엔이 갑작스레 내 팔을 붙잡은 통에, 내 말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구…. 왜 내 말은, 들어주지 않는 거야….”

“어땠어?”

“…어?”

아드리엔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아드리엔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상대방이 뭐라고 말하던 신경도 안 쓰고, 내가 할 말만 하고, 아까 네가 내 옆에 앉고 싶다고 하는데도, 깡그리 무시해 버리니까. 어땠냐고.”

아드리엔의 눈망울이 점점 커다래졌다. 나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네가 말 좀 하려는데, 내가 자꾸 틀어막고, 내 말이 다 맞다는 듯이 구니까 어땠어. 기분이 좋지만은 않지?”

“그, 그게….”

“여기서 입장을 바꾸면….”

나는 잠시 말을 끊고, 아드리엔과 내 앞에 놓인 물컵을 서로 뒤바꿨다.

“이게, 평소의 너와 나였어.”

“아….”

툭. 하고, 메마른 나무 탁자 위에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똑같이 겪어보니까, 내 심정을 조금 알겠어?”

“아, 으….”

“…나는 이 상황을, 2년 동안 겪어왔어.”

“흐으…. 나, 나는….”

아드리엔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살짝 열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돌아왔는지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로이먼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입을 뻥끗거렸다. 다행히, 눈치가 좋은 로이먼은 내 말을 알아들은 듯, 문을 굳게 닫아 주었다.

“그래서, 기분이 어땠냐고.”

재차 묻자, 아드리엔이 연신 눈가를 훔치며 입을 열었다.

“너, 너무… 답답했고…. 내 말을… 흐윽…! 들어주질 않으니까…. 서, 서럽고…. 흐윽….”

“네가 지금까지 나에게 그렇게 해 왔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지?”

“미, 미안해…. 미안해요…. 으흐으….”

아드리엔이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곤,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 아드리엔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수건이 닿자, 아드리엔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감기 걸린다. 머리는 제대로 말려야지. 내가 예전부터 말했잖아.”

그러자, 아드리엔이 눈물을 닦으며 푸흡—. 웃었다.

“훌쩍…. 오스틴, 이 바보야…. 나는 젖어도 감기에 잘 안 걸리니까, 괜찮다구…. 나도 예전부터 말했잖아….”

“야. 용사가 그러는데,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훌쩍…! 이익…! 나, 나도 들었거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드리엔이 내 팔을 투닥거렸다.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아드리엔의 머리를 수건으로 벅벅 닦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내가 줄곧 바라던 파티의 분위기야.”

“…….”

“차이를 알겠어?”

“…응.”

코를 계속 훌쩍거리긴 했지만, 어느새 아드리엔의 눈물은 어느 정도 그쳐 있었다.

그렇게, 아드리엔의 눈물이 완전히 그치길 기다리던 찰나.

“…오스틴.”

“응?”

눈가가 빨갛게 부은 아드리엔이, 내게 말했다.

“혹시, 괜찮다면…. 내 이야기, 들어보지 않을래…?”

평소의 태도와 완전히 달라졌다. 까칠하고 이기적이었던 아드리엔이, 처음으로 내 의견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 정중하게 내 의견을 먼저 묻는다면, 웬만해서는 거부하지 않아.”

“…고마워.”

싱긋 웃는 아드리엔에게, 나도 한 차례 웃어 보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처음부터 해 줘.”

“처음부터…?”

“응. 생각해 보면, 네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처음부터….”

울음을 크게 삼킨 아드리엔이, 이윽고 말을 이었다.

“…내가 아직 엘븐 왕국에 살던 때였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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