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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96화 (96/106)

〈 96화 〉 95. 비장의 한 수

* * *

“형제님.”

방에서 내쫓기듯 나오니, 복도 한쪽에 서 있던 로이먼과 이사벨이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아드리엔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로이먼이 할 말이 있는 것 처럼 방에 들어 오려 했었지.

“미안. 잠깐 아드리엔하고 얘기 좀 하느라…. 그런데, 로빈은?”

“식사를 하신 뒤, 마야와 함께 산책을 하러 나갔어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래?”

요즘 들어 느끼는 것이지만, 로빈과 마야가 부쩍 친해진 것 같다.

파티원끼리 사이가 좋다면, 그건 좋은 일이지. 음. 나 역시, 아드리엔을 포함한 용사 파티와의 안 좋은 일들을 잊으려고 노력 중이니까.

“아드리엔과는… 잘 해결된 건 가요?”

“뭐….”

그 싸가지 없던 아드리엔이 저렇게 유순해졌고, 자신의 잘못도 뉘우쳤으니, 잘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잘 해결됐지? 응. 그래도 어떻게 갱생시키긴 했어.”

“앞으로의 행보가 중요하겠군요. 아드리엔도, 저도, 용사님도….”

“…예전의 아드리엔은 잊어도 좋아.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아드리엔을 믿는다. 용사도, 그레이시도, 마야도. 이사벨은 말할 것도 없고.

이사벨과의 짧은 대화를 끝마친 뒤, 옆에 서있던 로이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말씀드리기에는… 혹, 엿듣는 이가 있을까 두렵군요.”

“…중요한 얘기야?”

“대성당에서 직접 알아낸 정보입니다.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로이먼의 표정이 상당히 진지했다. 대체 무슨 정보를 물어왔길래….

“…대성당이라면 확실한 정보겠지. 1층으로 가자. 방 잡아 둘게.”

“모쪼록, 성녀님께서도 함께….”

“…물론이에요.”

로이먼이 이렇게 진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흔치 않았기에, 나는 이사벨과 로이먼을 이끌고 여관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가 식사를 할 수 있는 룸을 따로 잡았다.

마치 누군가가 엿듣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겠다는 듯, 한참 동안 문 밖 복도를 두리번거리던 로이먼이 마침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추기경 전하를 뵙고 왔습니다.”

“추기경 전하를….”

하르만에서 추기경 전하를 뵙겠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설마 하니 진짜 뵙고 올 줄은 몰랐는데.

로이먼은 내 생각보다, 교단에서 상당히 유명한 모양이었다.

“추기경 전하께서는…. 제가 처음 마물 토벌전에 참여했을 때, 저를 손수 격려해 주신 분이지요. 비록 저를 하르만의 교회로 좌천시키는 결정을 내리시긴 하였으나, 언젠가는 제가 아크론께 바치는 자랑스러운 전리품을 이해해 주실 겁니다.”

…아무래도,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모양이다. 추기경 전하께서는 대체 이딴 망나니를 무슨 생각으로 만난 거야.

“하아…. 잡담은 그만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그래서, 안 좋은 일이야?”

“좋지 않은… 아주 좋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아직 뚜렷한 증거가 없을 뿐이지요.”

“…교국의 일 인가요?”

평소답지 않게 진지해진 로이먼의 태도에, 이사벨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진심 성녀 모드에 들어간 이사벨의 모습에, 나와 로이먼은 너나 할 것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로이먼 사제. 다시 묻겠어요. 교국과 관련된 일인가요?”

“추기경 전하께서 움직이신 일이니, 교국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교국쪽을 크게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휴우….”

교국은 인간 병기인 성기사들에게 보호받고 있을 텐데, 뭐가 저렇게 걱정이람.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따로 불러서 얘기하는 거야?”

“본래는 용사님께도 설명을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아쉽게도, 현재 자리를 비우셨더군요. 우선 두 분 께라도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습니다.”

“말해봐.”

“망각의 마녀와 전선 파괴자가, 갑작스럽게 전선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계시겠죠.”

“그런데요?”

입을 꾹 닫고 다음으로 할 말을 망설이던 로이먼이, 한참 뒤에 말을 이었다.

“…추기경 전하께서는, 그 둘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춘 것을 크게 경계하고 계십니다. 레인저와 협의하여 따로 조사단까지 파견하셨다고 합니다만…. 국경 근처에서, 그 둘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

로이먼이 무게를 잡길래 긴장했는데, 막상 들어보니 딱히 대단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 둘이 전선에서 빠진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고, 부상을 입었던, 아직도 소규모의 게릴라전이 일어나고 있는 서 대륙으로 빠졌건, 전선에서 빠질 이유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러니,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부상을 입었다면, 굳이 전선에서 내빼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보여 줄 필요가 없다. 적들의 사기가 올라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마왕이었다면, 부상을 당했더라도 전선에서 빼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투에만 내보내지 않고, 얼굴만 간간이 비추면 그만인데…. 아예 코빼기도 안 보인다?

“서 대륙의 민병대를 진압하려고 빠진 거 아닐까?”

“민병대를 소탕하기 위해, 군단장을 둘 씩이나 뺀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마왕군은 군단장 다섯이 공석인 상황. 남아있는 재원 하나하나가 아까운 실정이지요.”

로이먼의 말이 맞았다. 나는 손톱으로 입술을 뜯으며, 생각에 빠졌다.

군단장 둘이 빠졌다. 다른 놈들이면 모르겠는데, 하필이면 마왕군의 육탄전 최강자인 우르간과,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망각의 마녀, 애쉬라니.

그 둘을 전선에서 그냥 내빼버린다?

…대체 왜?

“잠깐만요. 그렇다면….”

이사벨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나 역시, 이사벨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추기경 전하께서는 현재, 세 가지 가능성을 유추하고 계십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로이먼이 손가락을 펼쳐가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하나는, 마왕이 이미 그 둘을 숙청했다는 가설입니다.”

“…그렇지만, 가뜩이나 헌틀리와 갈란이 전사해서 전선이 더욱 부실해진 상황에, 그 둘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숙청했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그렇습니다. 추기경 전하께서도 그러한 이유로, 첫 번째 가설은 그리 무게를 싣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왕군 내부의 분열입니다.”

마왕군 내부의 분열. 우르간과 애쉬가 전선에서 빠진 이유가, 마왕을 타도하기 위해서라고? 수뇌부 전복을 위해서?

그 말인즉슨….

“…반란.”

애쉬와 우르간이, 정체도 모르는 마왕을 상대로 들고 일어섰다?

“그렇지만… 무엇을 위해서?”

지금까지 마왕의 명령을 잘 따르던 놈들이다. 특히나 애쉬와 우르간은,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 했었다.

“반란은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네요.”

“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염두에 두십시오. 그리고 세 번째가 가장 유력합니다만…. 아마 마왕은 그 둘을 전선에서 빼서, 더 중요도가 높은 곳에 파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언제 뚫릴지 모를 정도로 부실해진 전선을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국경 근처에서, 그 둘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국경 근처에서 그 둘의 흔적을….

…국경 근처.

“잠깐만, 설마….”

갑작스레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군단장 둘. 그 둘의 마지막 행적은, 메텔 왕국의 국경에서 끊겼다.

“아까 분명, 국경 근처에서 끊겼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애쉬가 사용하는 마법의 특징인, 매캐한 재의 마나가 확인되었으니…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그 둘은 지금….”

이사벨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 둘의 행적을 모르는 이가 바보가 아닐까.

“…왕국에 침투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로이먼이 쐐기를 박았다.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그 둘이 지금 왕국에 침투해 있다고?

“이, 이럴 때가 아니에요! 지금 당장 용사님을 모셔 와야…!”

이사벨이 다급하게 일어서자, 로이먼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흥분을 가라앉혀 주었다.

“진정하십시오. 아직 가설에 불과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실, 추기경 전하께서 이 사실을 국왕 폐하께 전해 주신 덕분에… 국왕 폐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오스틴 형제님을 파티에 복귀시키라고 명하신 것도, 그 둘을 상대하기 위해서 내리신 결정이었습니다.”

“그, 그런….”

이사벨이 힘없이 털썩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분위기는 끝도 없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오스틴…! 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어, 어떻게 해야…!”

“…잠시만. 생각 좀 하자.”

만약 그 둘이 대도시 한복판에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그곳은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벅찰 텐데, 그 둘이 합공을 한다? 이건 그냥 대참사나 다름없다.

수도인 메텔하임에는 우리가 있으니, 그 둘이 이곳에 있을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 그렇다면, 군사적 요충지인 벨리온? 아니면, 지지부진한 전선을 뚫기 위해, 퀼른에….

“…아니. 아니야.”

이 드넓은 왕국 땅에서 그 둘이 어디에 있는지 유추해 내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다. 그 이전에, 그 둘이 왕국에 침투 한 목적을 생각해 낼 필요가 있다.

“…목적이 뭘까.”

마왕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놈은 언제나 철저한 계산 하에 일을 벌이는 놈이었다. 고작 도시 하나를 무너뜨린다고 해서, 왕국이 쉽게 무너지는 일은 없다.

설마 하니, 그 둘을 고작 도시 하나 점령하겠다고 보내지는 않았을 테고….

“놈들은, 마왕은….”

도시 하나를 점령하지 않고, 한 번의 타격으로 왕국을 끝장 낼….

그런 게… 있긴 한가…?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겠지. 가령, 왕궁의 보물전 이라던가…. 송곳 산맥 안쪽에 봉인되어 있다는, 옛 구전속의 대악마라던가….

생각해 보면 많긴 하다. 즉, 그들의 목적은….

“질질 끌고 있는 이 지지부진한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비장의… 한 수.”

이사벨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와 로이먼을 올려다보았다.

“로이먼의 말이 맞다면, 마왕은….”

아직 완전히 맞추어 지진 않았지만, 절반의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졌다.

놈들이 섣불리 움직일 만큼 중요한 일. 마왕이 굳이,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 주던 몬타를 전선에 보낸 이유.

그 둘이, 왕국에 침투한 이유.

마왕군의 속셈. 전쟁을 완전히 끝낼 수 있는, 히든 피스.

마왕은 지금.

“이 전쟁을, 끝내려 하고 있어…. 단 한 번의 기회로…!”

이사벨의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해진 머리를 흔들었다.

로이먼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도, 대비를 해야겠지요.”

마왕이 노리는 비장의 한 수. 단 한 번의 기회.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 있는, 왕국에 숨겨진 히든 피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용사만이, 그 계획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 * * *

“야! 대체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그르르릉….”

“어흐, 진짜…! 내가 못살아!”

애쉬, 현재 조이라는 가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이불을 꼭 끌어안은 채 침대에 몸을 누인 라이칸슬로프의 엉덩이를 퍽 소리가 나게 때렸다.

눈도 깜짝 않고 다시금 잠에 드는 시몬의 모습에, 조이는 열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너, 내가 오늘 방 청소 해 놓으라고 말했잖아!”

시몬은 엉덩이를 한 차례 긁적이는 것으로 대답해 주었다.

“휴우….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조이는 곧장 침대 곁으로 다가가, 시몬의 꼬리를 콱 움켜쥐었다.

그러자, 곤히 잠을 자던 시몬이, 마치 생선처럼 팔짝 뛰어오르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깽?! 깨갱! 꼬, 꼬리 잡아당기지 마라! 크아악! 아프다! 아프다고! 이, 이거 놔!!!”

“어떻게, 어떻게 이딴 새끼가 라이칸슬로프의 대전사야! 네가 그러고도 진짜 대전사야?!!!”

“크아아악!!! 꼬리 떨어진다!!!”

“그냥 꼬리 떼 버려!!! 내가 가죽 공방에 팔아 버릴 거야!!!”

잠시 과거를 숨긴 채 왕국에 잠입한 마왕군의 군단장들은, 오늘도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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