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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97화 (97/106)

〈 97화 〉 96. 새 시작

* * *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 오스틴은 앞으로 나오라.”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긴장감에 침이 잘 삼켜지지 않았다.

입을 벌렸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발. 대답을 해야 하는데…. 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오스틴…! 뭐 하시는 거예요…!”

“오스틴…! 빨리 나가라…! 국왕 폐하께서 기다리시잖나…!”

이사벨과 그레이시의 얼굴은 그다지 긴장하지 않은 듯해 보였다. 높으신 분들은 다들 저런 모양이지.

나는 평민이란 말이다.

이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이 웅장한 알현실은 사람을 압도하는 그런 정체 모를 힘이 있다. 용사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어버버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이 장소는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입을 한 차례 풀고,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뚜벅. 뚜벅. 뚜벅.

절대 고개를 들면 안 된다. 절대, 고개를 들면, 안 되는….

‘휴….’

좋아. 왕좌 앞 까지는 어떻게 무사히 도착했다. 예전에 그레이시에게 배운 왕실 예법 대로, 왼쪽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었다. 이제, 그레이시가 알려줬던 예법대로 말을 하면 되는데….

‘왕국의… 왕국의… 시발, 뭐였더라?’

왕국의…. 아. 생각났다.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 오스틴. 왕국의 첫 번째 혈통을 뵙습니다.”

이거 맞지?

고개를 들 수가 없으니, 방금 한 말이 맞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

영겁의 세월 같았던 짧은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지엄한 목소리가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 오스틴은 고개를 들라.”

여기에 속아 넘어가서, 바로 고개를 들었다간 그대로 모가지다. 나는 그레이시에게 배운 대로 대답했다.

“미천한 제 신분으로는, 감히 국왕 폐하의 용안을 뵐 수 없습니다.”

“내 지금까지 그대가 이루어낸 공적을 높이 산 바, 그대의 신분은 괘념치 않겠다. 고개를 들라.”

“…그리 하겠습니다.”

왕의 얼굴을 보려면 매번 이딴 번거로운 예법을 갖추어야 한다니.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하여간, 귀족 나부랭이 들이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저 앞에 놓인 커다란 왕좌에 앉아 있는 사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성껏 관리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깔끔한 수염과,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말끔한 머리. 왕족의 상징이라 전해지는 새하얀 백안(白?).

인간이라는 종족의 중심, 메텔 왕국의 심장. 왕국의 첫 번째 혈통. 마이어스 3세.

국왕, 마이어스 3세에게서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한 기백이 느껴졌다. 확실히, 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자, 마이어스 3세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기억이 나는군. 이 나라를, 대륙을 수호하기 위해 위대한 여정을 나섰던 용사 파티의… 실력 있는 젊은 척후. 레인저 출신이던가.”

“예. 그렇습니다. 자랑스러운 메텔 왕국의 레인저에서 4년간 복무하여, 왕국의 숲과 언덕을 수호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방금 대답에서 이상한 점은 없었겠지? 눈동자를 굴려 그레이시를 힐끔 바라보니, 그레이시가 엄지 손가락을 작게 들어 올렸다.

‘휴….’

다시금 왕좌를 향해 시선을 돌려 보니, 마이어스 3세가 굉장히 흡족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대들의 활약상은, 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네. 아아…. 참으로 훌륭한 업적들이야. 왕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과업들을, 그대들은 손쉽게 해내었지.”

“과찬이십니다.”

“허허…. 겸손한 것도 좋지만, 때로는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그런데….”

마이어스 3세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래. 그런데, 내 명을 거역하겠다고?”

시발…! 시발…! 시발…!!!

좆됐다…. 이거 분위기가 영 아니올시다 인데….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그래서. 내 명을. 거역하겠다고?”

아이, 씨팔 진짜.

“…그보다 더 나은 차선책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폐하.”

이대로 계속 대화했다가는, 똑같은 레퍼토리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결국, 그냥 눈 딱 감고 질러 버렸다.

“…!!!”

그레이시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지만, 애써 시선을 돌렸다.

“…호오? 차선책이라?”

“그렇습니다.”

“그 말인즉슨… 이 내가 직접 내린 명보다, 더 나은 방법을 떠올렸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설명해 보라.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그때는…. 그대에게 내려진 명을 군말 없이 이행해야 할 것이야.”

좋아. 기회가 왔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후….

길게 설명해야 하나? 아니, 구체적인 설명은 필요 없다. 짧고 간결하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한 문장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소리 없이 크게 심호흡한 후, 턱을 쓰다듬으며 미묘하게 웃고 있는 마이어스 3세를 올려다보았다.

“용사 파티의 여정을 보조할, 새로운 파티의 창설을… 부디, 윤허해주십시오.”

* * * * *

시간을 조금 돌려서, 하루 전.

아드리엔과 마찬가지로, 내게 사과를 해 오는 그레이시와 마야, 용사를 모두 받아준 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래서, 오스틴.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이라니…. 대체 그 방법이 뭐지?”

“애초에, 국왕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고도,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

“인간들의 왕은, 대체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든 간에, 왕의 명을 거역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루나.”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무슨 얘기만 나오면 금방 떠들썩해진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조금 소란스러웠던 좌중을 침묵시켰다.

“자자. 모두 조용. 먼저, 이번에 용사가 국왕 폐하의 명을 그대로 받들고 나온 일은…. 조금 유감이야.”

내가 조용히 용사를 째려보자, 용사가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따지고 보면, 이 중에서 가장 발언권이 큰 용사가 따지고 들었다면, 아마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었다.

“하아…. 여하튼, 내가 아까 설명해서 알겠지만…. 현재, 마왕군의 군단장인 애쉬와 우르간이, 정황상 왕국에 발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다들 이해했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국왕 폐하께서 나더러 파티로 복귀하라고 명하신 것은, 바로 그 문제 때문이야.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놈들을 추적하려는데, 파티에 척후가 없으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빨리 처리하고, 전선에 나와 있는 몬타를 막아 내야 해.”

“일리가 있네요. 그 둘을 추적하는 것도 그렇고, 전선을 도우러 가야 하는 것도 그렇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인원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공녀님.”

알렉시스 공녀가 요점을 정확히 짚어 주었다. 덕분에, 이 다음으로 내가 할 설명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가 될 수 없어.”

용사를 비롯한 용사 파티의 표정이, 대번에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모했다. 나는 입을 움찔거리는 그녀들에게 손을 뻗어, 그녀들을 진정시켜 주었다.

“자자. 내 말을 끝까지 들어. 지금 내가 파티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재원 한 명 한 명이 아까운 실정이라 그런 거잖아?”

“…그렇지?”

“국왕 폐하의 명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단 하나, 폐하께서 간과하시지 못한 것이 있지.”

용사 파티도 물론 훌륭한 이들이지만…. 현재, 나와 함께 다니는 오스틴 파티 역시,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자질을 갖춘 이들이다.

“그러니까, 요는…. 용사 파티를 보좌해 주고, 부족한 머릿수를 채워 줄 파티를, 새로이 창설하자는 거지.”

이름하야, 용사 보조 파티… 는 어감이 좀 그렇고. 그냥 오스틴 파티가 낫겠다.

“…오스틴. 확실히 획기적인 방법이다만…. 국왕 폐하를 설득해야 한다. 괜찮나?”

“그거 말인데…. 용사. 네가 어떻게 할 수 없어?”

용사가 대번에 울상을 지었다. 에라이.

“…쯧.”

어차피, 나는 지금 내 파티를 버리고 떠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국왕의 명을 대놓고 거역할 수도 없다.

차라리 선택지가 존재한다면, 나는 이쪽을 고르리라.

“그레이시. 네가 알현을 할 수 있도록, 신경 좀 써 줄 수 있겠어?”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만, 정말 괜찮겠나?”

“뭐, 방법이 있겠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레이시를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내가 해결해야지.”

늘 하던 대로.

* * * * *

그리고, 다시 지금.

“용사 파티의 여정을 보조할, 새로운 파티의 창설을… 부디, 윤허해주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겸손해 보이면, 대화에서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왕실 예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뭐.

“새로운 파티라….”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좋아. 이대로 밀어 붙인다면….

“그 파티를 담당할 재원들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가?”

“예, 그렇습니다. 저들입니다.”

내가 조심스레 내 파티원들을 가리키자, 마이어스 3세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용사 파티의 척후, 오스틴.”

“…예.”

“내가 자네의 무엇을 믿고…. 용사 파티의 전력을 깎아 가면서 까지, 파티를 새로 창설해야 하는가?”

“어…. 그, 그것이….”

시발.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지금 마이어스 3세의 눈에는, 그저 파티로 돌아가기 싫어서 잔꾀를 부리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대답하라. 자네가 파티에서 겪었던 불화는, 우리 왕국의 미래보다 중요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굳이 파티로 복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지?”

제가 원래 데리고 다니던 파티원들을, 어떻게 버립니까.

…라고는 죽어도 말 못 하겠다. 이미 충분히 까불었다. 이 이상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발언은, 삼가야 했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시발…. 생각을 해라, 오스틴…. 생각을…!’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용사, 이유정. 실례지만, 감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요, 용사…!”

어머. 세상에.

지금까지 봐 왔던 용사의 모습 중에서, 오늘이 제일 용사 같았다.

곤경에 처한 나를 구원해 주러 온 용사는, 비장한 표정으로 마이어스 3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왕좌에 앉아서 무게만 잡으시던 분이, 뭘 아신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십니까?”

…정정. 아무래도 용사가 아니라, 그냥 내 목을 자르는 것에 한몫 거들기 위한 미친년인 모양이다.

마이어스 3세를 제외한 모든 이가 경악한 표정으로 용사를 바라봄에도, 용사는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었다.

“히읏?!”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용사의 손을 꽉 잡아주니, 용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들 거면 똑바로 하라고. 이 바보야.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용사가, 헤벌쭉하게 웃으며 마이어스 3세를 올려다보았다.

“헤헤…. 그, 그러니까…. 아니, 뭐라 하려 했더라….”

나는 내 이마를 탁 쳤다. 떨지 말라고 잡아 준 건데, 더 바보가 되어 버렸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마이어스 3세가, 별안간 호탕하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푸흐…. 푸하하하하!!! 으, 으하하하!!!”

“폐, 폐하…?”

저 봐라. 옆에 서 있던 가신들도,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으로 마이어스 3세를 바라보았다.

…어랍쇼. 알렉시스 공작도 있었네.

나와 잠시 눈이 마주친 알렉시스 공작이,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듯 노려보았다.

나중에 따로 얘기합시다. 딸바보 아저씨.

“으하하…! 으흐…! 크흐흐흐….”

한참을 웃어젖힌 마이어스 3세가,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닦고는,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왔다.

뭐, 뭐지…?

마침내 내 앞에 선 마이어스 3세는, 대단히 흡족한 표정으로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하하하! 내 젊었을 적을 보는 것 같군 그래! 그럼, 용사 파티를 보조해 줄 새로운 파티 창설 안에, 반대하는 이가 있는가?”

가신들은 서로 눈치만 볼뿐, 이렇다 할 반대는 나오지 않았다.

알렉시스 공작이 나를 계속해서 째려보긴 했지만.

“그럼, 반대하는 이는 없는 것으로 알겠네.”

“그, 그 말씀은….”

“그대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왕좌에 앉아 무게만 잡는 내가 물어볼 자격은 없어 보이는 군! 하하하!”

“그, 그건…. 그게….”

“용사 파티를 보조해 줄, 새로운 파티의 창설이라…. 확실히, 탁상공론만 해서는 나올 수 없는 묘책이로군 그래.”

용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이어스 3세를 바라보자, 마이어스 3세가 흡족한 미소로 화답했다.

“마왕을 토벌한다는 본분에 충실하기만 하다면야, 안 될 것도 없겠지. 윤허하겠다!”

“…!”

마이어스 3세의 외침과 동시에, 우리의 얼굴에 환한 빛이 내리쬐었다.

마침내, 새롭게 도약할 때가 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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