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98화 (98/106)

〈 98화 〉 97. 딸바보

* * *

“자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공작 저하. 저도 그러려던 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내가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했던 알렉시스 공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끄으응…! 자네가 알현실에서 나간 뒤, 국왕 폐하께서 내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알기나 하나?!”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알렉시스 공작. 자네 딸도 보이더군?’ 이라고 말씀하셨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나 하는 겐가!”

“어….”

역시, 이름 높은 알렉시스 공작가. 왕가의 외척이라서 그런지, 국왕 폐하께서 알렉시스 공녀도 알아보시네.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였죠?”

“뭐라?”

“아니, 그러니까. 알렉시스 공녀님과 국왕 폐하 말이에요. 두 분께서 마지막으로 만나 뵌 게 얼마만이죠?”

내 질문이 너무 뜬금없었던 탓일까. 알렉시스 공작이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귓불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흠…. 분명히… 4년 정도 되었군 그래. 우리 딸이 아카데미를 다니느라 바빠서 말일세.”

“아니, 공작님! 4년 이라구요?!”

“무, 뭐…. 가,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귀청 떨어지겠네!”

알렉시스 공작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잠자코 잔소리를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알렉시스 공녀의 아카데미 일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 봐야 하고, 내친김에 아카데미의 임시 교사로 추천받을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말이다.

“4년 이라니요! 저렇게나 아름답게 성장하신 알렉시스 공녀님을, 4년 동안이나 아카데미에 처박아 두셨다구요?!”

“…엥?”

“오, 오스틴…?!”

내 옆에 서 있던 알렉시스 공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건 중죄, 아니! 대죄입니다! 꽃 다운 나이의 알렉시스 공녀를, 고작 아카데미 기숙사 단칸방에 썩혀 두다니요! 공작 저하! 반성하십시오!”

“무, 무, 무, 무슨 말씀이세요…! ”

홍당무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알렉시스 공녀가, 내 팔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나는 쉴틈 없이 혀를 놀렸다.

“공녀님! 잘 생각해 보세요! 아니, 아카데미에서 4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다니! 이게 비극이 아니라면 무엇이 비극이겠습니까! 흐어어엉!!!!!!”

“아니, 저는 그다지….”

“공작 저하! 아리따운 공녀님께 사죄하세요!”

내 예상대로, 잔뜩 화가 났던 알렉시스 공작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지기 시작했다.

“하… 하하…. 그,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공작 저하…. 국사에 바쁘신 것은 알고 있지만, 소중한 딸의 입장도 생각하셨어야죠! ”

“그, 그런…!”

“아, 아빠…. 아니, 아버님…! 저, 저는 괜찮으니까요…! 정말로 괜찮은…!”

“나, 나는…. 내가… 못난 아비였구나…!”

좋아. 거의 다 넘어왔어.

“야. 오스틴. 너 뭐 하는 거야?”

“엉? 아니, 우리 그거 있잖아. 아카데미 임시 교사. 그쪽으로 구슬려 보려고.”

“우와….”

다들 질린 눈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어쩌나. 나는 할 줄 아는 게 야부리 터는 거랑 사람 써는 일 밖에 없는데.

일행들에게 눈짓으로 내 뜻을 전달한 뒤, 알렉시스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 저하. 그런 고로… 잠시 저와 함께, 알렉시스 공녀님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음…? 아… 아하하…! 핫핫핫!!! 우리 오르엔이 예쁘긴 해! 으핫핫핫!!!”

“으으…! 오스틴…!”

알렉시스 공녀가 다시금 내 팔을 투닥거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공녀님.”

“으우우…. 모, 몰라요…! 바보….”

좀 귀엽네.

…?

“…크흠. 여하튼, 공녀님. 저는 잠시 공작 저하와 함께 이야기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네, 네에…. 다녀오세요….”

내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흔드는 사이, 활짝 웃음꽃이 핀 알렉시스 공작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가세! 오랜만에 만난 친우를, 내 그냥 보낼 수는 없지! 하하하!”

“…친우요?”

“어서 가세! 내 좋은 자리를 마련해 놨으니 말이야! 으하하!!!”

좋아.

‘넘어왔어….’

* * * * *

나는 알렉시스 공작을 따라, 왕궁에 마련된 외부인 전용 응접실에 발을 들였다.

사용인 몇이 찻잔과 과자를 세팅해 주고 난 뒤, 응접실 안에는 나와 알렉시스 공작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 용건은?”

조금 전의 싱글벙글하던 태도와 다르게, 단둘이 독대하게 된 알렉시스 공작은 곧바로 표정을 싹 바꾸며 내게 물어왔다.

“하하…. 공작 저하. 용건… 이라니요? 오늘은 그저, 알렉시스 공녀님의 아리따운….”

“나를 속이려 들지 말게.”

“…넵.”

하여간, 이 속 시꺼먼 늙은이. 눈치는 빨라요.

“그래서, 나와 대화를 하고자 하는 용건이 뭐지? 설마 하니, 가문의 일과 국사로 바쁜 나를… 정말로 우리 딸 이야기만 하기 위해 부른 것은 아닐 테고.”

“따님께서 많이 아름다우시긴 하죠. 그건 진심이었습니다.”

…아. 젠장. 잘못 말했다.

알렉시스 공작의 입꼬리가, 벌써부터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하하…. 그렇지? 우리 오르엔이, 이번에 아카데미 기사 학부를 차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으니 말이네. 절세의 외모에, 흠잡을 곳 없는 실력에, 착하디 착한 성품까지! 그야말로 모든 걸 겸비했지!”

“그, 그렇죠…?”

“그에 반해, 둘째와 셋째는…. 끄응…. 언니를 조금 본받으면 좋겠건만…. 나이가 어린것을 감안하고는 있으나,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해서 말이네.”

“오호.”

“올해 입학해서, 아카데미에 1학년으로 재학 중이긴 하지만…. 성적은 그렇다 치더라도, 매일 사고만 치니 말일세.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알렉시스 공녀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것은 처음 들었다.

알렉시스 공녀의 여동생 둘을 포석으로 삼아서, 아카데미에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수월하게 해 나갈 수도 있겠다.

슬슬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딸 바보 아저씨의 딸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번에 우리 오르엔이, 자네와 함께 몇 달간 여행을 했다는 것은 나도 어렴풋이 들었지만은….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군 그래.”

알렉시스 공작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설마, 우리 딸한테 몹쓸 짓을 겪게 했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겠지? 자네는 내가 특별히 신뢰하고 있으니, 당연히 없었을 거라 믿네만.”

“엄….”

갈란과의 처절했던 혈투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천만다행으로 표정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그럼요. 귀하신 분인데요. 성심성의껏 모셔야죠.”

“좋네. 그 마음가짐, 아주 훌륭해! 명심하게! 우리 딸에게 생채기라도 났다가는, 내가 확 그냥….”

“…….”

“그따위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말게. 개빡치니깐 말이네.”

내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게슴츠레하게 바라보자, 알렉시스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구겼다.

“또 어디서 그런 천박한 어휘를 배워 오신…. 아니, 공작 저하. 자꾸 딴 길로 새는 것 같은데요?”

“음? 아… 그래. 우리 딸과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을 조금 더 듣고 싶지만… 다음에 시간 날 때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지.”

“예.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만….”

알렉시스 공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알렉시스 공녀님께서는, 저희 파티와 꽤 오랫동안 함께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저희 파티원들과 정도 많이 들었구요.”

“자네 파티원들… 흠….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던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아무튼, 이번에 알렉시스 공녀님께서 아카데미에 돌아가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음. 그렇지. 아카데미의 졸업은 시험을 치루어야 하니 말일세.”

물론, 기사 학부를 차석으로 졸업하게 된 알렉시스 공녀에게 있어서는, 그깟 시험 따위는 별 문제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알렉시스 공작가의 차녀와 삼녀.

“알렉시스 공녀님과, 이렇게 갑작스럽게 떨어지기도 조금 섭섭해서 말입니다. 공작 저하의 말씀을 들어보니, 둘째 따님과 셋째 따님도 말썽이신 것 같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후. 하.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저를 비롯한 제 파티원들을, 아카데미의 임시 교사로 추천해 주십시오. 대신, 둘째 따님과 셋째 따님에 대한 교육은 철저히 해 드리겠습니다.”

“…….”

알렉시스 공작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알렉시스 공작에게서 대답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달그락. 하고 찻잔을 매만지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 안에는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눈을 감고 차를 즐기던 알렉시스 공작이, 이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 파티원들 말일세. 다들 믿을 만한 자들인가?”

“다들 믿음직한 동료들입니다. 안심하고 제 뒤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흠.”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모를 개뼉다구 들을 아카데미에 추천해 달라니. 내가 생각해도 무리한 부탁이었다.

“중간에 끼어 있던 사제는 괜찮겠지만… 신원 보장이 안 된 이들이 너무 많네. 이런 경우에는, 나 혼자 추천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네.”

“저와 로빈은, 이미 레인저에서 파견되는 형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나머지 파티원들은 공작 저하께서… 어떻게… 안 될까요?”

내가 생각해도 조금 뻔뻔하긴 한데, 뭐 어쩌겠나. 사람은 원래 뻔뻔하게 살아야 이득을 취하는 법이다.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던 알렉시스 공작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리 신뢰하는 이들이라면, 괜찮겠지. 뭐, 좋네.”

“가,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네.”

연신 고개를 숙이는 내게, 알렉시스 공작이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가며 말했다.

“하나. 우리 둘째 딸과 셋째 딸을, 확실하게 교육시킬 것. 둘. 아카데미에서 임시 교사로 있는 동안에는, 절대 사고를 치지 않을 것.”

“아유, 별 걱정을 다 하신다. 명심하겠습니다.”

“끄응…. 별 걱정이 아니라, 정말 걱정이 되니 그러는 걸세. 자네 파티는 언제나 사고만 치고 다닐 것 같아 보이니 말일세.”

조금 뜨끔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우리에 대해서 잘 알지?

“저얼… 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대답이 시원찮군 그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내 이름으로 추천하는 것이니, 제발… 제발 사고는 치지 말아주게! 제발!”

“걱정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사고를 치다니.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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