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99. 어울리지 않는 이웃
* * *
“뭘 자꾸 히죽거려? 재수 없게.”
와일러가 인상을 팍 구기며, 내 뺨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 입이 좀 험해졌네…? 하, 하하….”
“어~. 그래. 어디 사는 누구 씨 덕분에, 하나 남은 내 혈육이 죽어버렸거든. 입이 절로 험해지더라고?”
“아, 아니…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있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야~ 그래 놓고, 제대로 된 사과도 안 하러 오더라? 대단해 아주. 그렇지?”
와일러가 나를 잔뜩 비꼬며 내 성질을 건드려왔지만, 나는 애써 웃는 낯으로 묵묵히 참아 내야 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바로 모그단 주니어의 서슬 퍼런 칼날 맛을 보여 줬겠지만, 그 대상이 와일러라면 말이 다르다.
쿵! 쿠웅!
“야이씨…. 네 파티원들은 뭐 집을 부순다냐? 뭐가 이리 시끄러워?”
“아, 아… 그게…. 나도 잘 모르겠네…? 하하….”
집을 구매한 후, 나는 곧장 여관의 방을 빼고 용사 파티를 비롯한 일행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참고로, 지금은 다들 위층으로 올라가 각자 자신의 방을 선점한 뒤, 입맛에 맞게 가구를 배치하는 중이다.
시발. 내 방은 아직 못 골랐는데. 뭐, 보나 마나 로이먼과 같이 쓰게 되겠지만 말이다.
“집 한 번 좋아? 꼴에 이런 집도 사네?”
와일러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정강이를 툭 걷어찼다.
“그…. 용사 파티에서 조금 굴렀더니,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야.”
“…넵.”
로를 눌러쓰고 있던 와일러가, 로브를 벗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와 함께, 로브 안에 숨겨져 있던 와일러의 강아지 귀가 불쑥 튀어나왔다.
“네가 나를 찾아오지 않은 건…. 좋아.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
“…아니, 나는 진짜로 찾아가려 했는….”
그 순간, 내 고간 바로 밑에 예리한 단검이 푹—! 내리 찍혔다.
“야이 씨발아. 내가 말하고 있잖아.”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하시죠.”
“네가 나를 안 찾아온 건 그렇다 치는데…. 씨발, 네가 나를 까먹어?”
와일러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나는 정자세로 앉은 채 얼어붙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와일러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야. 네가 나를 까먹냐고. 네가 한 짓이 있지, 어떻게 나를 까먹어버리냐?”
“정말, 정말로 미안해. 요즘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중요한 일들도 자주 잊어버려서….”
“…네가 몇 살이더라? 벌써 벽에 똥칠할 나이던가?”
“올해로 스물한 살이야.”
“아…. 그래. 그랬었지. 죽은 내 여동생이랑 동갑이었지, 참.”
정말이지 가시 방석이 따로 없었다. 저 멀리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로빈이, 나와 와일러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곤 잽싸게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예상보다 너무 이른 만남이기도 했고, 애초에 와일러와 만날 때는 조금 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는데.
“…….”
그래도 이렇게 만난 이상, 해야 할 말은 해야겠지.
“…저기, 와일러.”
“뭐.”
“…미안.”
다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국왕 폐하를 알현할 때를 제외하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갑작스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와일러의 당황한 음색이 들려왔다.
“뭐, 뭔데?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미안해. 수도에 올라오고 나서, 너를 만나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정말이야. 하지만… 막상 너를 만나자니, 덜컥 겁이 났어.”
“…….”
“미안해. 그때도 사과했지만,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모두 내 불찰이었고, 내 역량 부족이었다. 정말 미안.”
누군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2층 계단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빼꼼 내민 로빈과 루나가, 사과하는 내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윽고 와일러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용서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정말 미안해.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았어.”
고개를 들어 올리니,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와일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 진짜…. 그때는 널 그렇게 죽이고 싶었는데, 지금은 웃음밖에 안 나오는 거 알아?”
“…….”
“그때는 정말,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너를 죽일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분했는데…. 지금 이 꼴은 대체 뭐야? 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와일러. 그건….”
“내 여동생을 사지로 몰아넣고, 도망치듯 레인저를 빠져나가서, 보란 듯이 용사 파티에 들어갔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런 꼴이야? 너 대체 뭐야?”
시발. 대체 와일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
“네가 나한테 사과하는 건… 절대 받아주지 않을 거야. 알아 들었어?”
“미안.”
“쯧. 한심하긴….”
나를 보며 혀를 차던 와일러는, 이윽고 로빈과 루나가 숨어있는 계단 쪽을 힐끔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파티원들 앞에서, 특히나 너 같은 새끼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로빈 앞에서는 그따위 모습 보이지 마. 알아 들었어?”
“…그래.”
“하, 씨발 진짜…. 쪽팔리지도 않아? 이렇게 무릎이라도 꿇으면, 내가 좋다구나 하고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름 미안함의 표시로 무릎을 꿇은 건데, 와일러가 이렇게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지금 네 곁에 있는 파티원들 앞에서는…. 언제든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 주란 말이야. 머저리같이 무릎부터 꿇지 말고.”
“와일러. 나는….”
“닥쳐. 지금 내가 말하잖아.”
“…….”
“내가…. 아니, 말해 뭐하냐….”
이야기를 마친 와일러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경멸의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 벌써 가려고…?”
“그러면, 뭐. 내가 여기 살까?”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로빈은 안 보고 가려고? 나는 몰라도, 로빈은 오랜만에 만난 거잖아.”
와일러의 표정이 잠시 미묘해졌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됐어. 네가 잘 이끌어 줘. 그리고, 어차피 이웃인데 무슨 상관이야?”
“…아.”
참. 이제 이웃이었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정말 우연히도 이웃이 되었다.
“난 간다. 로빈한테 안부나 전해 줘.”
“어! 그… 잘 가!”
“…병신. 진짜.”
끝까지 고운 말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이제부터, 이웃이니까.
* * * * *
쿵! 쿵! 쿵!
“뭐, 뭐야….”
대체 누구야. 이런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 문을 두들기는 몰상식한 인간은.
“…편지인가?”
침대에서 일어나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고 나니, 또 한 차례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쿵!
“하아…. 로이먼…. 네가 나가 봐….”
쿵! 쿵!
…아, 참. 나 혼자 쓰는 방이었지.
피가 튀기는 치열한 방 쟁탈전 끝에, 나는 계단과 가장 가까운 작은 방을 홀로 쓰게 되었다.
작은 방이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인 것이, 어차피 큰 방에 들어가면 최소 두 명이 하게 생활하게 되니, 방에 딸린 욕실을 포기하더라도 작은 방을 고른 것이 정답이었다.
쿵! 쿵!
이럴 때만큼은, 근면 성실한 로이먼이 그립긴 하다.
“로이먼…. 씨발, 어휴….”
욕지거리를 내뱉곤, 대충 외투를 걸치고 현관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청소를 해야 하는데….”
공방에 주문 한 청소 도구가 벌써 왔나? 아니면, 편지?
편지 올 곳이야 많았다. 로웰이라던가, 알렉시스 공작이라던가, 하물며 하르만에 있는 베키라던가, 벨리온에 있는 모그단이라던가….
오늘은 마침 나갈 일이 꽤 있다. 부동산 길드에 증서도 제출해야 하고, 모그단에게 편지도 부쳐야 하고…. 또….
쿵! 쿵! 쿵!
“아이 씨팔…. 나갑니다! 나가요!”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저기요! 씨팔 누구신… 데….”
“뭐? 씨팔?”
그곳에는, 어제 내가 치욕스럽게 무릎까지 꿇었던 포악한 이웃, 와일러가 편안 복장으로 삐딱하게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말 예쁘게 한다? 씨팔? 응?”
“그…. 실례지만, 무슨 용무로…?”
“왜. 내가 오면 안 되냐?”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와일러는, 이윽고 내 발을 콱 짓밟으며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씹?!?!!!….”
씨팔. 신발 굽으로 발 끝이 짓이겨지니, 정말 비명을 참는 것이 고역일 정도로 아팠다.
“잔말 말고, 빨리 들어가서 그 거지 같은 몰골이나 고치고 와.”
“으읍…. 이, 이 씹….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은 같이 갈 곳이 있으니까, 빨리 씻고 옷 갈아입고 오라고. 로빈도 데려 오고.”
순간 화가 날 뻔했지만, 어제 날 죽이지 않은 와일러의 관대함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웃어 보일 수 있었다.
“하하…. 죄,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은 따로 가야 할 곳이 있걸랑요…. 아직 아침도 안 먹었고….”
“…여태 밥도 안 먹고 뭘 한 거야? 진짜 한량이 따로 없네. 한심한 새끼.”
누가 이 꼭두새벽에 아침밥을 처먹어. 이 미친년아.
…라는 말이 정말이지 목구멍 끝까지 솟구쳐 올라왔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가라앉혔다.
장하다, 오스틴.
“예, 예이…. 여부가 있겠습니까…. 쇤네, 바로 준비하고 오겠습니다요!”
그리 말하며 문을 닫으니, 와일러의 손이 문틈 사이로 튀어나와, 닫히려던 문을 턱—! 붙잡았다.
“저… 와일러?”
“손님을 밖에 세워두려고? 이 집은 예절이란 게 없나?”
으드득…
“…드, 들어오시죠! 하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상하신 와일러 님’ 께 그만, 결례를 범했네요!”
“야. 홍차도 한 잔 타 와.”
“예, 예~!”
“백년초는 없냐? 백년초 좀 피우고 싶은데.”
“저희 집이 금연이라서…. 하하….”
“…쯧. 빨리 갔다 와. 5분 준다.”
내가 급하게 내어 준 홍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창 밖을 구경하는 와일러를 뒤로한 채, 황급히 계단을 타고 뛰어 올라갔다.
“저 미친년 진짜…!”
“다 들린다!!!”
“어이쿠! 말이 헛나왔네~! 하, 하하하!!!”
내 인생에서 가장 빠른 몸단장을 끝마친 뒤, 로빈을 깨우곤 서둘러 1층 거실로 내려갔다.
“6분. 1분 늦었네?”
“헉…. 허억…. 아, 아니…. 씨팔 말이 되는….”
“로빈은?”
“로, 로빈은 방금 깨워서…. 조금만 기다려 줘….”
“한심하긴….”
네가 아침잠이 없는 거겠지. 이 미친년아.
“다 들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미친년 보듯이 봐놓고, 안 들킬 것 같았냐?”
“…로빈! 빨리 내려와!”
“끄응…! 곧 가요~!”
“야. 말 돌리냐? 어? 내가 미친년처럼 보여?”
“…로빈!!!”
“아이 참! 왜 이렇게 닦달하세요! 선배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나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이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