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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101화 (101/106)

〈 101화 〉 100. 남겨진 이들을 위해

* * *

딸랑—!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점원의 활기찬 배웅과 함께, 문에 부딪혀 울리는 종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점원이 딸랑거리는 소리인지,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인지.

“다음은…. 로빈. 목걸이 같은 건 어때?”

“모, 목걸이요…? 어… 그, 그건….”

로빈이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힘겹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나는 괜찮으니깐…. 사고 싶으면 사자….”

“봐, 로빈. 저 새끼도 괜찮다잖아. 신경 쓰지 말고 가자.”

“그,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빨리 가자. 야!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따라와!”

빠드득….

나는 어깨에 걸친 옷가지들을 고쳐 매곤, 앞장서서 걸어가는 와일러의 뒤통수를 힘껏 노려보았다.

이가 갈렸다. 씨발. 이것도 내 돈으로 산 거고, 그 목걸이인지 코걸이 인지도 내 돈으로 살 거 아냐.

결국 내 돈으로 사는 주제에, 아주 오만가지 생색은 다 내고 자빠졌다. 기껏 꼭두새벽부터 준비해서 나왔건만, 짐꾼 노릇에 지갑 신세라니.

“저기…. 와일러?”

“뭔데. 시답잖은 말이면 알아서 해.”

“아니, 별 건 아니고…. 우리를 데리고 나온 이유가, 이러려고 나온 거야?”

와일러의 걸음이 뚝 멈췄다. 나와 로빈의 발걸음 역시 멈추었다.

“…….”

“…뭐, 뭔데.”

잠시 동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와일러가, 이내 고개를 휙 돌리곤 빠른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냐. 됐다. 조금 이따가, 나중에 말해 줄게.”

“야, 너….”

“…?”

고개를 갸웃거리며 와일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빈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와일러를 따라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만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곤 이미 저만치 멀리 떨어진 와일러와 로빈을 황급히 뒤따라갔다.

“…쯧.”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바닥을 치고 있었다.

짐꾼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지출이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던 와일러의 눈빛 속에서… 잠깐이지만,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들여다보았기에.

분명, 로트 때문일 테지.

“아직도 못 잊었구만….”

나를 죽일 것처럼 굴던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살기까지는 느껴지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이 지나 감정이 풍화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와일러는 한순간도 로트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옛날에 느꼈던 죄책감이, 내 발목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발. 이래서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만나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라, 오스틴…. 이제 와서 뭘 어쩌려고.”

와일러는 대체 무슨 연유로, 우리를 이렇게 이른 시간에 데리고 나온 것일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많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그 슬픈 눈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흐읍…!”

무거운 옷가지들을 다시금 고쳐 매곤, 저 멀리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와일러와 거리를 좁혔다.

“야! 같이 가!”

“빨리 오라고 했잖아! 하여간…. 옛날에는 몸놀림 하나는 날랬는데, 이제는 진짜 쓸모가 없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조금 심한데.”

“…아이씨, 몰라! 로빈! 이번에는 저기로 가 보자!”

“헤헤…. 네!”

처음에는 내 눈치를 보던 로빈도, 이제는 신이 나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와일러의 표정이 한결 풀어져 있었다.

그러면 됐다.

고작 이런 잡일 시중 만으로, 와일러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진다면…. 나는 그걸로 족한다.

* * * * *

“이것도…. 흠…. 이것도… 어울리려나? 로빈. 어때?”

“최고예요! 진짜 너무 예쁘세요!”

“그, 그런가…? 내가 이런 옷을 잘 안 입어봐서….”

그걸로 족하긴, 염병을 떨고 앉았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내 지갑이 텅텅 비어버릴 것만 같은 예감이 사라지질 않는다.

일부러 귀족들이나 오갈 법한 고급진 가게로만 가는 것만 봐도, 와일러의 목적이 대충은 예상이 되었다.

이 영악하고 포악한 여자는, 내 주머니를 쫄쫄 굶게 만들 심산이었다.

나는 가게 안에 놓인 의자에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짐을 짊어지고 있던 허리를 콩콩 두드렸다.

“후우…. 아으… 허리야….”

레인저에서도 이렇게 몸이 쑤시긴 했지만, 설마 하니 짐 좀 드는 것 만으로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는데.

역시, 조만간 체력 단련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메이어 단장님께 양해를 구하면, 아마 레인저 본부에 있는 단련장을 사용할 수 있겠지.

“음…. 이건 로빈에게 잘 어울리겠는데? 평소에도 그런 후줄근한 옷 말고, 이렇게 예쁜 옷 좀 입어 봐.”

“제, 제, 제가요…? 아이, 참…! 제가 어떻게 이런 청초한 옷을 입어요…!”

“야이씨…. 어울린다니까? 한 번 입어보고 말하셔.”

“자, 잠깐…!”

로빈이 와일러에게 쩔쩔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돈은 생각하지 말자. 오늘만 해도 도합 금화 8닢 정도가 날아갈 것 같지만, 그 정도 출혈은 괜찮아. 감당할 수 있어.

그보다, 오늘은 와일러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뭘 어떻게 하면, 와일러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릴까.

용서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양심이 있지,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용서해 주길 바라는 뻔뻔한 인간은 아니다.

다만, 나를 향한 와일러의 분노가,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을 잃은 슬픔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좋아. 오늘은 최대한, 재미있고 기쁜 일들을 잔뜩 선물해 주자.

“서, 선배님!”

그리 생각에 빠져 있으니, 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내 눈앞에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어, 로빈. 무슨 일….”

고개를 들어 올려 로빈을 바라보니, 모르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 강렬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연하지도 않은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로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화려하지도, 거추장스럽지도 않은 가벼운 차림의 드레스였음에도, 그 어떤 옷들 보다도 로빈의 외모를 돋보이게 해 주고 있었다.

평소처럼 대충 묶은 머리가 아닌, 풀어헤쳐진 주황색 단발머리가 노란색의 드레스와 아주 잘 어우러졌다. 얇은 목걸이로 포인트를 준, 쇄골까지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적당히 부푼 앞섬과, 오목하게 들어간 허리춤, 그리고 적당히 나온 골반쪽이 상당히….

“어, 어때요…?”

로빈이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아하니, 상당히 부끄러운 듯했다.

예쁘다. 아름답다. 귀엽다. 너무 잘 어울린다.

“그… 어… 음….”

온갖 미사여구들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처음 보는 로빈의 아름다운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지금껏, 로빈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선배님…? 저, 어때요…?”

로빈이 조심스럽게 재차 질문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으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로빈의 표정이 조금 조급해 보였다.

“그, 그게…. 아니…. 와….”

“여, 역시 별로 안 어울리죠…!”

로빈이 몸을 홱 돌려, 탈의실로 도망가려 하고 있었다.

안 된다. 조금 더 보고 싶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로빈의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았다. 황급히 탈의실로 향하려던 로빈의 몸이 우뚝 굳었다.

“그… 로, 로빈….”

“네…? 선배님, 무슨….”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돈으로 사주는 거니까. 그러니까….

“…오스틴이라고, 딱 한 번만 그렇게 불러 줄래?”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커다랗게 뜨여진 로빈의 눈망울이 잠시 흔들리다가, 이내 결의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 오, 옷….”

그렇지. 그렇지…!

“오스틴…! 나, 나 어때…?”

“크으으으…!!!”

순간 눈알이 뒤집힐 뻔했으나, 간신히 참아 내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로빈을 향해, 그제야 간신히 말해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 로빈.”

예쁘다고.

로빈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내가 손을 놓아주자, 로빈이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저, 저…! 다시 갈아입고 나올게요!”

로빈이 황급히 탈의실로 뛰어 들어가고,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야. 좋냐?”

와일러가 내게 다가왔다. 와일러 역시, 이전에 입던 후줄근한 차림이 아니었다.

평소답지 않게 청초한, 꽤나 힘을 준 와일러의 모습에서, 순간 로트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은 기분 탓일까.

하긴. 둘은 닮았으니까.

“…너도 예쁘긴 한데, 로빈이 더 예쁘다. 이건 양보 못해.”

“양보는 무슨. 웃기고 자빠졌네…. 관심도 없거든.”

와일러의 표정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로빈은 어땠어. 내 솜씨, 마음에 들어?”

“진짜 최고입니다. 누님. 존경합니다.”

사람을 탈바꿈 한 지경까지 만들다니. 와일러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존경은 무슨. 다 네 돈으로 사는 건데.”

“…아.”

시발. 그러고 보니 그렇네.

“저기… 이거… 담아 주세요….”

쭈뼛거리며 탈의실에서 나온 로빈이, 곱게 갠 드레스를 점원에게 가져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얼마가 들든 간에,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았으니까.

“…고마워. 와일러.”

“씨발. 안 하던 말 하지 마라. 닭살 돋으니까.”

와일러가 진저리를 쳤지만, 나는 다시 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건네었다.

* * * * *

고급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난 뒤, 마지막으로 갈 곳이 있다는 와일러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 어느새 해가 지는 시간 되어서야 다다른 곳은, 레인저 본부 뒤쪽의 작은 동산이었다.

“여기는….”

“여기는 왜 온 걸까요…?”

동산의 중턱에서 저 멀리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나와 로빈이 의문을 표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와일러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와일러를 따라 걷기를 잠시, 마침내 동산의 꼭대기에 다다라서야, 와일러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

“…….”

오래된 고목 밑동에, 잘 관리된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 나의 보물, 엘렌. 편히 잠들길. ]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왜 이곳에 온 것인지, 어째서 와일러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인지, 지금에서야 깨달았기 때문에.

“…내 여동생. 로트의 본명이야.”

엘렌. 엘렌. 엘렌.

그리 중얼거리던 와일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오래 걸렸어. 알아?”

“…….”

“내가 어제, 너를 봤을 때…. 가장 처음으로 든 감정은, 반가움이었어.”

와일러의 목소리에서는, 어느새 물기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로트가… 아니, 엘렌이 너희와 하고 싶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오늘, 직접 경험해 봤으니 알았겠지.”

“…아.”

그런 거였구나.

오늘 와일러와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닌 것은, 전부….

“…너희를 소중히 생각하던 아이였어.”

와일러가 몸을 일으키며, 무릎에 묻은 흙을 털었다.

“항상 피 냄새만 나는 레인저 생활 속에서도, 엘렌은 너희와 함께 이런저런 평범한 생활을 겪어보고 싶어 했어.”

평범한 생활.

우리와 거리가 먼 말이었다.

로트는, 엘렌은, 언제나 평범한 생활을 원했던 것이다.

“같이 밥도 먹고, 시내도 돌아다녀보고, 시장도 구경해보고…. 예쁜 옷도… 입어 보고….”

“…….”

“나는 결국, 엘렌은 아니지만. 그래도…. 닮은 건 얼굴밖에 없으니까….”

그때까지 우리를 바라보지 않던 와일러가, 마침내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어제도 말했지만,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아.”

와일러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엘렌은 너를 용서했겠지. 착한 아이였으니까. 자기 자신보다, 남들을 더 생각하던 아이였으니까.”

“와일러. 나는….”

“…오늘, 재밌었어.”

노을이 지는 성벽 너머를 바라보며, 와일러가 말을 이었다.

“엘렌도, 재미있었겠지…?”

“…아마도요.”

로빈이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이 무슨 장소인지, 나는 몰랐다.

기껏해야, 본부 뒤쪽에 위치한 작은 동산에 불과했으니까.

이곳은 와일러에게 있어서, 보물이 묻힌 곳이었다.

“…복수는 이걸로 끝이야.”

와일러가 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내려, 와일러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파티원들을 아껴 줘, 오스틴. 리더로서. 다시는 후회하지 않도록.”

“…당연하지.”

와일러는 희미한 미소를 띄워 보이더니, 묘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일부터는, 평범한 이웃으로 지내자고.”

“…와일러.”

“엘리.”

몸이 흠칫 떨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인 그녀가 눈물을 슥슥 닦으며 말을 이었다.

“내 진짜 이름이야. 엘리.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

“…엘리.”

염치없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말만큼은 하고 싶었다.

“엘렌에게 전해 줘. 오늘, 정말 재미있었다고.”

절대로,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하루였다고.

내 말을 들은 엘리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순간, 그 모습이 로트와 너무나도 닮아서, 엘렌과 너무나도 닮은 얼굴에, 나는 무너져 내렸다.

강둑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거대한 파도가 내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읍…. 흐…. 오, 오늘…. 정말 재미있었… 으니까…. 앞으로도, 자주… 놀러 올 테니까….”

다정하게 나를 다독여주는 엘리의 손길을 느끼며, 그렇게 목 놓아 울었다.

내게 용서를 받던 용사 파티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주변인이 아닌 당사자에게, 엘렌에게 용서받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하고, 기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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