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101. 평생이 걸려도, 기다릴게요
* * *
“으어엉! 엘렌!!! 뮈안훼~! 헝헝! 커헝~!”
용사가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깐족거리자, 주변에 있던 다른 일행들이 배꼽을 잡고 굴렀다.
으드득….
“…닥쳐.”
“어흑! 엘레에엔!!!!!!”
“야이 씹…! 적당히 해!”
“푸하하하!!!”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내 옆에서 신경을 박박 긁는 용사를 노려보았다.
“크흡…! 아니, 어제는 대체 뭐였어?”
“그러게나 말이에요. 어제는 돌아오시자마자, 다짜고짜 옷자락을 붙잡고 엉엉 우시더니…. 풉…!”
“으흠…. 흠…! 나, 나는 웃지 않았다. 오스틴…. 흐흡….”
어제 엘렌의 묘비를 다녀온 뒤, 감정이 북받쳐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집에 돌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시발. 어쩐지 아침에 일어날 때 눈이 안 떠지더라니.
“얘, 얘들아…. 그만 놀려…. 오스틴 화나겠어….”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마야는 눈치가 좋았기에 박장대소를 하는 이들을 말리고 있었고, 아드리엔은 역설적이게도 눈치가 너무 없었기에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다.
아드리엔마저 배꼽을 잡고 굴렀다면, 나는 쪽팔려서 그날로 수치사 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형제님. 눈물을 흘리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 힘내세요!”
“…너희들 때문에 더 열 받는데?”
로빈과 로이먼에게 힘없는 손짓을 하며,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루나와 실비아는 아직 방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다.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같은 방을 쓰다 보니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후…. 흐흐…. 아, 알겠어요…. 그만 놀릴게요….”
“크흡…. 배, 배가….”
그레이시와 이사벨이 배를 움켜쥐고 힘겨운 미소를 짓자, 용사가 또다시 쐐기를 박았다.
“어헝헝!!! 엘렌~!!!”
“푸하하하하!!!!!!”
에라, 씨팔.
* * * * *
용사에게 실컷 조리돌림 당한 나는, 곧장 거실을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2층의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달칵.
“휴우….”
책들이 어느 정도 들어 찬 서재였지만, 내가 읽을만한 책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전술 교범 정도.
그럼에도 서재에 발을 들인 이유는, 이 집에서 이 방이 제일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거실에 있다가는, 용사의 놀림거리가 되어 내 수명이 줄어들 것만 같았다.
“오스틴…. 괜찮으신가요?”
내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마음을 가라 앉히고 있으니, 알렉시스 공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아, 공녀님.”
“괜찮아요. 앉아 계세요.”
내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알렉시스 공녀가 손을 들어 올려 나를 앉히곤, 반대편에 놓인 의자를 빼내어 다소곳이 착석했다.
“공녀님?”
“…….”
알렉시스 공녀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알렉시스 공녀가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 질문을 듣고 잠시 우물쭈물거리던 알렉시스 공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문에서 편지가 왔어요.”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단 말인가.
왕궁을 방문한 것이 대충 일주일 전. 집을 구한지는 이제 막 3일 정도가 되었는데.
…오늘이 며칠이더라?
하루, 이틀…. 대충 세 달 정도….
“시간 참 빠르네요. 벌써 7월 중턱이라니…. 메르덴 숲에서 재회한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용사 파티와 함께했던 지난 3년과 비교하면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금의 내 파티원들과 함께한 삼 개월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특별한 시간이었다.
“오스틴…. 여기, 편지를….”
“…감사합니다.”
알렉시스 공작가 특유의 용 인장이 새겨진 편지였다. 나는 곧장 편지 봉투를 열어보았다.
“…….”
예상대로, 알렉시스 공녀에게 속히 아카데미로 복귀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알렉시스 공작의 딸바보 같은 쓸데없는 말들은 덤이었다.
“오스틴… 뭐라고 쓰여 있나요…?”
“…아카데미의 방학이 곧 끝나가니, 속히 돌아오라네요.”
“아….”
알렉시스 공녀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편지를 고이 접어 책상 위에 올려두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 그때 기억나세요?”
“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알렉시스 공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요. 오크들에게 습격당하시던 걸, 제가 구해드렸잖아요.”
“아….”
알렉시스 공녀는 짧은 탄식을 내뱉더니, 이윽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목숨을, 더불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병사들의 목숨을 구해 주셨는걸요.”
“하하…. 그렇게 거창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알렉시스 공녀임을 알아보기 전에는 오크와 여기사라는 자극적인 소재 때문에, 잠깐이지만 나쁜 마음까지 품었었기에, 조금 뜨끔했다.
그러나, 알렉시스 공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내 손을 살며시 감싸주며 말했다.
“거창한 일이 아니에요. 오스틴은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인걸요.”
“쩝….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이상 반박은 못하겠지만…. 제가 아니었더라도, 알렉시스 공녀님을 구해 드렸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오스틴이기에, 제가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거예요.”
내가 멋쩍게 미소를 짓자, 알렉시스 공녀가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어…. 공녀님?”
“오스틴. 그러면, 그때 기억나시나요?”
“예, 예? 아니, 그보다 손이….”
방패를 쥐는 손아귀 부분에 굳은살이 박여 있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의 감촉이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알렉시스 공녀가 말했다.
“퀼른에서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제가 아버님께 편지를 썼을 때… 기억나시나요?”
“아. 기억나죠. 그때는 정말…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때, 아버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시나요?”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게이트 따위는 당장에라도 열어 줄 테니, 빨리 돌아와라. 오르엔. 네 얼굴이 보고 싶다.’ 라고 말씀 하셨어요. 제가 이야기 해 드렸던가요?”
진짜 징글징글하네, 그 아저씨.
“…공작 저하 답네요. 조금 심하게 딸바보 같은 기질이 있으시니까요.”
“…오스틴은, 재미있었던 추억 없으신가요?”
“음… 그러면…. 아.”
알렉시스 공녀와 함께하면서, 재미있었던 추억.
“혹시, 퀼른에서 마차를 훔쳐 달아났을 때, 기억나시나요?”
“아…! 기억나죠! 그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엄청나게 쿵쾅거렸어요. 지금 생각해도 몸이 긴장되어서….”
“하하…. 사실, 저도 많이 긴장했었어요. 제가 뭐 그런 일을 해 봤어야죠.”
“그런 것 치고는, 꽤나 능숙하던데요?”
“…제가 보고 들은 게 많아서 말입니다.”
“푸흡…. 뭐예요, 그게…. 변명다운 변명을 하시라구요….”
알렉시스 공녀가 수줍게 웃었다. 여름이라서 그런 것일까. 얼굴에 조금씩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오스틴. 그때는 기억나시나요? 저희가 로이먼 사제님을 처음 만나 뵈었을 때…”
“아…! 그때…! 아니, 정말요?”
“후훗…. 네. 그리고….”
재밌었던 추억.
…많다. 아주 많았다.
대책 없이 용사 파티를 뛰쳐나온 뒤, 알렉시스 공녀와 만나고, 로빈과 로이먼을 비롯한 파티원들을 모집하고….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간이 재미있었고, 유쾌했고, 색다른 경험들 뿐이었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값진 시간이었다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단언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알렉시스 공녀와 나 사이에, 어느새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 즈음.
“…오스틴.”
“…네?”
별안간, 은은한 라벤더 향이 화악 불어왔다. 내 품에 폭 안겨오는 부드러운 감촉과 라벤더의 달콤한 향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 알렉시스 공녀님…?”
“…….”
알렉시스 공녀는 말없이 나를 꼭 끌어안고, 내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금은 그냥… 가만히 계세요.”
“…….”
나 역시, 말없이 그녀를 살포시 안아 주었다. 부드러운 붉은 머리칼이 내 코를 간질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알렉시스 공녀가, 몸을 꾸물거리며 얼굴을 빼내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시스 공녀님.”
“오스틴….”
알렉시스 공녀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어갔다.
“저,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오스틴과 함께했던 매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아요….”
“…….”
그러고 보니, 알렉시스 공녀는 아직 우리가 아카데미에 임시 교사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알렉시스 공녀의 눈물 어린 표정에, 순간 진실을 말해 줄까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아 내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보고 싶었다. 자고로, 깜짝 선물은 당사자가 몰라야 더욱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시스 공녀는 다시금 내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을 이었다.
“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가문의, 아버님의 허락을 받아 올 테니까요…. 그때까지만… 저를 기다려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공녀님.”
“꼭, 꼭 기다려주셔야 해요…?”
“…평생이 걸려도 기다리겠습니다. 알렉시스 공녀님.”
내가 조금 과장해서 대답하니, 눈물을 글썽이던 알렉시스 공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후훗…. 평생이라니, 너무 거창하잖아요….”
“저는 진심입니다.”
평생이라는 말은 조금 과장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반년을 넘어서 1년, 2년, 설령 10년이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
‘…파티원들을 아껴 줘, 오스틴. 리더로서. 다시는 후회하지 않도록.’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내 품에 안겨 훌쩍이던 알렉시스 공녀는, 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스틴. 아니, 오스틴 경.”
…오스틴 경?
오랜만에 듣는 기사 칭호에, 내가 당황하기도 잠시.
“잠시 눈 감아 보실래요?”
“눈… 말씀이십니까?”
“네.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요.”
갑작스레 경 소리를 듣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그녀의 말대로 순순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별안간 부드러운 감촉이 내 입술 위로 느껴졌다.
츕.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촉촉한 무언가가 내 입술과 맞닿았다.
“읍…?!”
당황한 내가 눈을 뜨자, 그곳에는….
“……!”
그곳에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알렉시스 공녀가, 눈을 질끈 감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칙칙하고 종이 냄새만 가득했던 지루한 서재는, 어느새 라벤더 향으로 가득 차, 라벤더 꽃밭이 되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라벤더 향이, 바람을 타고 불어왔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라벤더 꽃밭, 그 위에서 입을 맞추는 나와 그녀.
어디선가 본 듯한 광경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던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가벼운 키스만으로, 내 뇌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머리에 열이 올라 어지러웠다.
슬그머니 눈을 뜬 알렉시스 공녀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언젠가… 오스틴 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날까지… 저도, 기다릴 거예요.”
평민인 나를, 오스틴 경이라고 부르는 그날까지 기다리겠다니. 그 말은….
“공녀님. 그 말씀은….”
청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알렉시스 공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평생이 걸려도, 기다릴거예요…!”
눈물을 찔끔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며 화사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를 위해서는 정말로, 평생을 기다려도 괜찮을 정도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