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102.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습니다.
* * *
“…가는 거야?”
로빈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뒤로, 나를 비롯한 내 파티원들, 그리고 용사 파티원들 모두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라고, 평소에는 간단한 치장 조차 하지 않던 로빈은 오늘, 지난번 엘리와 함께 나가서 샀던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차를 기다리며 잠시 먼산을 바라보던 알렉시스 공녀가, 로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며 로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죄송해요. 뭐라고 말씀하셨죠?”
“…이제 가는 거냐고 물었어. 오르엔.”
“…그렇네요.”
아마, 알렉시스 공녀는 나뿐만 아니라, 로이먼과 루나를 비롯한 다른 일행에게도 남다른 애착을 느꼈을 것이다. 고작 삼 개월 이라고는 하나, 서로를 의지해가며 생사를 함께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 네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알렉시스 공녀의 표정이 착잡했다. 아마, 정말 반년 동안은 못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카데미에 임시 교사로 들어가게 된 사실은 말하지 않기로, 이미 모두와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아카데미에서도 얼굴을 볼 수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슬픈 건 매한가지였다. 파티원으로서 부대끼며 생활하는 것과, 아카데미에서 간간히 얼굴을 마주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여러분.”
로빈과 마찬가지로 죽상이었던 우리를 향해, 알렉시스 공녀가 몸을 완전히 돌렸다
“너무 그런 표정만 짓지 말아 주세요. 아카데미만 졸업하면,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까요.”
“알렉시스 공녀….”
“으음….”
루나와 실비아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알렉시스 공녀가 싱긋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자! 다들, 웃어 보세요! 오늘은 제가 주인공이니까, 제 말에 따라 주셔야 해요!”
알렉시스 공녀의 말에, 다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유일하게 나만이,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게 되었다.
‘언젠가… 오스틴 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날까지… 저도, 기다릴 거예요.’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을 듣고 나니, 그녀를 볼 때마다 그 말이 떠올라서 저절로 바보 같은 미소를 짓게 되었다.
로빈과 약속했던 ‘연인 이상 친구 미만의 관계’ 때문에 조금 양심이 찔렸지만서도, 남자로 태어난 이상, 아름다운 공작가 영애의 청혼이나 다름없는 구애의 말에 어떻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너무 여자관계가 복잡한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나는 절대 일부러 이런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걸 어떻게 하겠어. 순리대로 사는 거지 뭐.
…갑자기 머리가 아프네. 이 복잡한 여자관계를, 뭐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나는 아직, 어느 누구도 콕 집어서 고를 수 없는데 말이다. 애초에 그만한 자격이 있는 남자도 못 되고.
그렇게 잠시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 별안간 저 멀리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이리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너나 할 것 없이,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마차를 바라보던 알렉시스 공녀의 앞에, 점점 가까워진 마차가 천천히 멈추었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연세가 지긋하신 백발의 노인 한 명이 점잖은 몸짓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아가씨. 모시겠습니다.”
“…….”
“아….”
알렉시스 공녀는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노인의 손을 맞잡고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를 뒤따라온 다른 마차에 탄 사용인들이, 알렉시스 공녀의 몇 안 되는 짐들을 다른 마차에 싣기 시작했다.
“…쯧.”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계속 만날 거라지만, 속이 쓰리긴 하네.
“…알렉시스 공녀. 그동안 함께 해, 영광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꼭 다시 만나자!”
“오르엔!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다들 아주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아니, 용사 파티만은 예외이려나? 용사 파티는 아카데미까지 따라가지 못할 테니 말이다.
각자 작별의 인사를 건네는 와중에, 마차 창문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렉시스 공녀가 생긋 웃었다.
“…여러분! 이런 말씀드리기엔 폐가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저를 기다려주세요!”
“당연하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까!”
한 명 한 명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마차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몸 조심히 가! 아카데미 수업, 성실히 듣고!”
건물 너머로 마차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알렉시스 공녀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 그럼.”
깜짝 선물을 준비해 보자.
* * * * *
“…이봐, 조이.”
“하아…. 왜. 또 왜 부르는데.”
방금 막 목욕을 하고 나온 시몬이, 몸을 부르르 털어 물을 튀기며 말했다.
“그래서, 계획 실행일이 언제라고 했지? 계속 이런 한량 같은 생활을 하고 있자니, 좀이 쑤셔서 말이야.”
“…네 몸은 진짜 좀이 쑤실 것 같은데, 아니야?”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받아치는 조이의 모습에, 시몬은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훑어보았다.
“…음. 딱히 가렵거나 하지는 않은데.”
“어휴, 진짜…. 그냥 해 본 말이잖아.”
“그래서, 계획은 언제 실행하지?”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는 시몬을 바라보던 조이는, 바닥에 잔뜩 튀긴 물을 힐끔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아…. 1년 조금 안 되게 남았어. 그동안 우리의 입지를 조금이나마 다져 놔야 하니까, 슬슬 모험가 길드에서 의뢰를 받아야 해.”
“흠, 의뢰라….”
“의뢰가 뭔지는 알지?”
“물론 잘 알고 있….”
“솔직히 말해.”
“…사실, 조금 생소한 말이군. 의뢰라니. 애초에 모험가 길드는 뭘 하는 곳이지?”
조이는 재차 한숨을 내뱉었다. 위조된 모험가 패를 받아놓고, 모험가 길드가 뭔지도 모르다니. 이런 멍청이가 다 있나.
“모험가 등급, 이딴 건 지금 설명하면 복잡할 테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잡일을 하는 거라고 보면 돼.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관리하고, 중개해 주는 곳이 모험가 길드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시몬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고개를 들었다.
“이해했다. 그렇군. 인간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유적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런 잡일들을 들어주어서 입지를 다져야 한다. 이런 의미인가?”
“잘 아네.”
“잡일이라. 대충 어느 정도의 범주에 해당하지? 인간들은 돈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데.”
“하수도 청소부터, 약초 채집, 물건 배달, 마물 사냥, 던전 탐사까지 다양해.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공헌도가 높은 일만 골라서 하면 되는 거고.”
유적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곳 메텔하임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져 놓아야 했다. 아직 인간들은 그곳이 유적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고, 호기심이 왕성한 인간들은 탐사대를 꾸릴 것이었다.
그 탐사대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 만약 탐사대에 선발되지 못한다면, 무력으로 뚫고 들어간다는 최후의 수단밖에 없었기에.
“의미 없는 싸움은 싫지?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해.”
“무언가 착각하고 있군. 모든 싸움에는 의미가 있다.”
“어휴…. 말해 뭐하니. 너 같은 근육 뇌한테 말해 봤자지.”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몸을 다 닦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시몬을 향해, 조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바닥에 묻은 물기 좀 닦지 그래?”
“…드르렁.”
“야. 안 자는 거 알거든?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빨리 닦아라?”
“애쉬…. 아니, 조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너는 결벽증이 너무 심하다.”
“야! 빨리 닦으라고!!!”
인간들 사이에 숨어든 군단장 둘은,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계획 실행까지, 앞으로 1년.
* * * * *
“하아….”
알렉시스 공녀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올려, 눈앞에 보이는 아카데미 본관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오스틴을 비롯한 일행들과 헤어진 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동안 아카데미 개학 준비로 바빴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알렉시스 공녀님. 무탈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뵈어요. 루터 경.”
“알렉시스 공녀. 표정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 있나?”
“저는 괜찮답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커티스 경.”
“알렉시스 공녀님.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는 맛있는 제과점이….”
“언제 한 번 함께 가죠. 이야기해 주셔서 고마워요. 헬리아 양.”
“알렉시스 공녀님! 곧 있으면 졸업을 할 시기가 올 텐데, 이번에는 수석의 자리를 노리실 건가요!”
“그라니아 양. 저는 지금의 자리에 만족하고 있답니다. 구태여 승부욕을 불태울 생각은 없어요.”
지겹다. 지겨워. 아카데미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이야기들이 귀가 따갑게 들려왔다.
왕가의 외척이라는 공작가. 그 공작가의 장녀라는 위치에 서서, 웃는 낯으로 신경 써서 대답을 해 주는 것이 정신력을 얼마나 갉아먹는 일인지, 저들은 모를 것이다.
이렇게 보면, 또 오스틴의 파티가 그리웠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지위를 보고 다가오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오스틴은, 조금 탐욕스러운 것 같기도 하지만요.’
푸흡.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익숙한 강의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으니,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 역시 속속들이 교실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업 시작까지 5분가량 남은 상황. 별안간, 옆자리의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여학생이 그녀에게 달라붙어왔다.
“오르에엔~! 나 심심해애~!”
“자스민. 교실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 돼요.”
“치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렇게 차갑게 대하기야?”
“자스민? 그보다, 교재는 어디 있나요? 수업 시작까지 5분밖에 안 남았잖아요.”
“어, 어…? 오늘 1교시, 대 마물전 실습 아니었어?”
“…시간표가 바뀌었잖아요, 자스민. 오늘 1교시는 정찰과 수색, 대인 방어전 이론 수업이에요.”
이 아카데미에서 알렉시스 공녀와 몇 안 되는 진솔한 친구 사이인, 마르티네즈 후작가의 영애, 자스민 마르티네즈.
“어, 어쩌지…? 오르엔! 나, 교재를 안 가져와 버렸어….”
언제나처럼 덜렁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이리 오세요.”
“헤헤…. 고마워.”
함께 교재를 펼치고 기다리며, 그렇게 1분. 2분. 3분….
보통은 교사가 미리 들어와서 수업 준비를 하기 마련이건만, 수업 시작까지 1분이 남은 상황임에도, 담당 교사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정찰과 수색, 대인 방어전 이론 수업.
레인저에서 파견 온 사람이 직접 가르치며, 기사로서 준 필수 과목이기에 인기가 많다.
그렇게 교사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자니, 별안간 강의실의 앞 문이 드르륵—! 열렸다.
“…어?”
알렉시스 공녀가 답지 않게 얼빠진 소리를 내뱉자, 주위의 몇몇 이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알렉시스 공녀는 그럼에도, 강의실의 앞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번에 새롭게, 정찰과 수색, 대인 방어전 이론 수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순간, 오스틴의 눈이 알렉시스 공녀에게로 향했다.
“여러분들 중에서, 제 얼굴을 아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졸업까지 남은 기간, 반년.
“그래도, 제 소개를 해 보고자 합니다.”
생각했던 것만큼 쓸쓸하진 않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다.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던, 오스틴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