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1부 외전. 피와 돈, 그리고 배신 1
* * *
“저쪽부터 수색해!”
“이런 젠장, 어디로 간 거야?!”
“수비대장님의 명령이다! 놈을 산 채로 사로잡는 자에게는 금화 50닢을, 죽여서 가져오는 자에게는 금화 10닢을 주겠다!”
새끼들. 고작해야 나 하나 잡겠답시고,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뒷골목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하르만의 뒷골목이 얼마나 넓고 복잡한지, 기껏해야 중앙 시장을 설렁설렁 돌아다니던 수비대 놈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후우…. 이게 뭔 개고생이야….”
벌떼처럼 끊임없이 달려드는 수비대를 겨우 따돌렸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그저 단장의 명령을 받고, 고위 마족과 결탁했다는 사실이 들통나서 도망친 행정관을 색출해내기 위해, 이곳 하르만까지 먼 길을 온 것뿐인데 말이다.
“반겨주지는 못 할 망정…. 쯧….”
쓰레기를 청소해 주겠다는데, 아주 필사적으로 지키려 드는구만.
“…뭐, 그래도 임무는 성공했네.”
결국 임무는 성공했으니 괜찮다. 단장, 그 사람은 과정이 어찌 되었건, 오로지 결과만 보는 유형의 인간이니까.
세터나 와일러, 하다못해 로트라도 붙여주지 않은 단장이 원망스러웠지만, 뭐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씨발…. 걔들은 지금 본부에서 쉬고 있겠지….”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숏 소드에 묻은 피를 로브에 슥슥 닦아 내었다.
골목에 대충 세워진 깨진 거울을 힐끔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대로 입고 다니면 들키겠는데….”
이건 뭐, 내가 행정관을 죽였다고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어던지고, 그 위에 쓰고 있던 가면을 올려놓았다.
“…흠.”
이걸 어디에….
순간, 하수구와 연결되어 있는 작은 쇠창살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저기에 버리면, 뒤를 밟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겠지.
“읏, 차…!”
힘을 주어 쇠창살을 밀어 보니, 녹이 슬대로 녹이 슨 쇠창살 문이 힘겹게 밀려나며 열리기 시작했다.
녹이 제대로 슬었는지, 뻑뻑해도 너무 뻑뻑해서 여는 데 힘이 깨나 들었다.
간신히 열린 하수구 너머에서, 고약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어휴, 냄새…. 내가 불 마법만 쓸 수 있었으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 없이, 그냥 태워버리면 그만 일 텐데.
마법을 못 쓰는 게 한이다. 아주 그냥 사람 사는 삶이 못 된다.
갈기갈기 찢어서 흘려보냈으니, 아마 하수도가 막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막힌다고 해도, 뚫을 것 같지도 않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온갖 신묘한 몸놀림으로 화살을 피했던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스친 곳은 많을지언정, 다행히 직격으로 맞은 상처는 없었다.
골목 바깥으로 고개를 쏙 내밀곤, 수비대 병사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레 골목 바깥으로 나왔다.
“후우…. 그럼….”
슬슬, 메텔하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짐짓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완벽하게 증거를 인멸한 뒷골목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 * * * *
“염병.”
상인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차들이 모조리 끊겨 버렸다. 설마 하니, 수비대에서 이런 초강수를 둘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성문부터 골목 사이사이, 심지어는 성벽 사이의 개구멍들까지 철저히 막아버리는 수비대 병사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이래서야, 메텔하임으로 복귀하기는 글렀다.
메텔하임과 이곳, 하르만의 지리적 거리가 가깝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마차를 탔을 때의 얘기다. 걸어서 가면 얄짤없이 일주일이 넘는 기간을 상납해야 한다.
일주일이 넘게 지체되면 임무에 지장이 갈 것이고, 레인저 내부에서의 내 평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나름 임무 완수율 100%에 달하는데, 이렇게 어이없게 실패할 수는 없지.
“걸어서 가는 건…. 일단 패스.”
걸어서 가면 추적당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너무 느리다.
“…아무리 봐도, 마차를 타야 할 것 같은데….”
상인들의 마차에 숨어 탈까?
꽤 괜찮은 생각 같은데….
“어쭈, 이것 봐라? 야! 이 새끼 끌고 가!”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마차를 타고 가려다가…!”
“이 새끼가! 어딜 만져!”
…싶던 마음도, 성문 앞에서 마차들을 꼼꼼히 수색하는 수비대 병사들을 보니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성문 쪽을 탐색하고 있던 경사진 지붕에 몸을 맡겨, 지붕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후우… 어쩐다.”
하르만에는 내가 아는 인맥도 별로 없는데.
그렇다고 영주에게 부탁을 하자니, 행정관이 죽어 버려서 흉흉한 소문이 도는 지금, 내 모습을 드러내 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다.
“…뒷세계밖에 없나.”
세간에서는 하르만의 어둠이라고 부르는, 통칭 암흑가.
최근 정세는 잘 모르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하르만에 왔을 때에는 암흑가의 조직들이 베키라는 여자에게 죄다 흡수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록, 그 여자와 안면을 튼 적은 없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암흑가를 평정할 정도의 수완이라면, 마차가 정지된 상황에서 사람 하나 내보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대충 뒷골목 어디에 있지 않을까?
“그냥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야겠다.”
가볍게 건물 지붕에서 내려온 뒤, 손바닥을 탁탁 털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박장의 개장이 임박했다던데.”
“크흐흐….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들도, 드디어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겠군.”
마침, 뒷골목에 기대어 신나게 재잘거리는, 전형적인 인간 언저리 둘이 눈에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길 좀 여쭙겠습니다.”
“…음? 뭐야?”
“혹시, 베키라는 분 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내가 일부러 웃는 낯으로 묻자, 둘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이봐. 지금 맨입으로 말하라는 거야?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을 거 아니야.”
“크흐흐…. 어이, 형씨. 그 칼 좋아 보이는데?”
나는 조용히 칼을 빼 들었다.
쉽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사람 입에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불게 만드는 것만큼은,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 * * * *
“여, 여깁니다. 형님….”
“…여기라고?”
실컷 예절 주입을 하고 나니, 양아치들 중 한 명이 나를 도박장으로 안내해 주었다.
“으흐… 아, 아파….”
“새끼. 엄살은.”
꼴에 깡패라는 새끼가, 엄살이 심하구만. 나름대로 살살 때렸는데 말이다.
축 늘어진 양아치 둘을 대충 골목 구석에 눕혀두고, 당당하게 도박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생각 없이 저 둘을 패 놓은 것은 아니었다. 저 둘은 이곳의 조직원이 아니다. 저런 어중이떠중이들을 조직원이랍시고 들이는 여자라면, 암흑가의 수많은 조직들을 흡수했을 리가 만무하다.
“실례합니다.”
“…음? 누구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도박장 내부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어느 정도 완공이 된 것 같았지만서도, 아직 손볼 곳이 많은 모양이었다.
문 양 옆에 서 있던 덩어리 두 명이 내게 다가왔다.
“…손님이십니까? 죄송하지만, 저희 도박장은 아직 개장하지 않았습니다. 성함과 신분을 알려 주시면, 개장하는 대로 편지를 보내어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의 양아치들과는 차원이 다른 태도. 역시, 이 여자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손님은 아니고. 일 좀 보러 왔는데.”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오른쪽에 서 있던 수염 난 덩치가 대머리 조직원에게 물었다.
“…이봐. 예약된 손님이 있어?”
“없는데…. 혹시, 예약은 하셨습니까?”
“예약? 그딴 게 있어?”
내가 알던 깡패들은 다 뭐였단 말인가. 예의 바른 도박장 경호원들을 보니, 이건 뭐 정말로 본격적인 사업 같았다.
베키라는 여자, 사업적인 수완이 있다.
“너희들 보스한테 안내 좀 해 줘.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거든.”
“…죄송하지만, 예약되어있지 않은 손님 분들은 만나 뵐 수 없습니다.”
“…내가 말로 할 때 들여보내는 게 좋을 텐데? 너희들한테도 그렇고, 나한테도 그렇고.”
내가 숏 소드의 폼멜을 쓰다듬으며 싱긋 웃어 보이자, 경호원들이 흠칫 놀라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옷에 튀어나온 윤곽선으로 보아하니, 날의 길이는 대충 한 뼘 정도. 단검이다.
“…난 말로 안 해. 빨리 너희 보스에게 안내나 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호원 하나가 얼굴을 팍 구기더니, 이내 도박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수치심이 조금씩 밀려왔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깡패들의 세계에서는 기가 죽으면 안 된다. 이 새끼들은 목숨보다 폼 잡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놈들이다.
얕보였다간, 무시만 당하기 일쑤다.
잠시 뒤, 도박장 안쪽으로 들어갔던 콧수염 난 경호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들어오시죠.”
진작 이랬으면 좋았잖아.
콧수염 난 경호원을 따라 도박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길 한참. 드디어, 고급스럽게 장식된 문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보스.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그래.”
목소리가 상당히 앳되다. 내 또래의 나이 같은데. 기껏해야 나보다 한두 살 많은 정도가 아닐까.
문이 열리고, 어두컴컴하고 널찍한 방 하나가 모습을 드러 내었다.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을 등지고 앉아 있는, 암흑가의 수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손님이시라고?”
책상 위에 다리를 걸쳐놓은 건방진 자세였음에도, 그 자세가 너무나도 어울리는 여자였다.
20년 동안 수십 개의 파벌로 찢어진 채, 비릿한 피 냄새가 사라지질 않았던 뒷골목을 평정한 여자.
암흑가의 여왕, 베키.
“감히 내 사업장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이다니, 간도 크네.”
“그렇게 소중한 사업장을, 저런 덩치만 큰 덩어리들한테 맡기시는 겁니까? 조금 실망이네요.”
“…말 참 예쁘게 하네? 어디서 배운 걸까?”
“우리 엄마한테서 배웠는데요.”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턱시도를 걸친 채,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녀가, 내게 손짓하며 고급진 소파를 권했다.
“우선, 앉지.”
“…실례합니다.”
소파가 상당히 푹신했다. 이대로 눈만 감으면 잠들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베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일?”
의외라는 표정. 뭐가 그렇게 의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사정을 대충 설명해 주니, 베키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일이라면, 내 선에서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지.”
“정말입니까?”
“물론, 내가 시키는 일을 조금 해야겠지만 말이야.”
문제없다. 사람 하나 써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베키가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간단해. 조만간 도박장을 열 계획인데, 수비대장이 조금 골치가 아파서 말이야.”
취소. 정정. 내가 아무리 인간 백정에 골통 분쇄기라지만, 도시 전체의 치안을 총괄하는 수비대장을 죽이는 건 예상에서 어긋나는 일이었다.
“물론, 죽이라는 건 아니고.”
…다시 취소. 죽이는 것만 아니면 뭐든 할 수 있다.
“아마, 수비대장 그 사람은… 우리가 도박장을 열게 된 사실을 경계하는, 상인 조합장의 뒷돈을 받고 내 사업장들 중 한 곳을 칠 거야. 네가 정보를 수집해서, 내게 알려주면 돼.”
…쉬운 일은 아니구만.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좋습니다. 그동안은 제 고용주가 되시겠네요.”
“반말해도 괜찮아. 너랑 나이도 비슷하니까.”
“그래. 잘해보자, 베키.”
“그래, 그래…. 그런데, 너는 이름이 뭐야?”
아, 이거 참. 내 이름도 말 안 했던가.
“오스틴이야. 나만 꽉 붙들어 매라고.”
암흑가의 여왕 베키와의 악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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