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1부 외전. 피와 돈, 그리고 배신 2
* * *
베키에게 의뢰를 받은 다음 날, 다시금 그녀의 사무실로 불려 간 나는, 베키의 조직에서 쓰이는 암구호를 듣게 되었다.
“신념의 열쇠.”
대답은… 돈.
참 깡패 새끼들 다운 암구호였는데, 정작 베키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암구호가 일정 주기로 바뀐다거나, 그런 말은 일체 없었다. 그냥 암구호를 던져줄 테니, 최소한 우리 조직원들과 마찰을 일으키지는 마라. 대충 이런 의미가 담긴 대화였다.
역시, 아무리 암흑가를 휘어잡은 프로 건달들이라고 해도, 예상외로 이런 쪽에서는 허술하다. 암구호를 바꾸지 않고 계속 사용한다니?
레인저에 몸을 담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안 바꾸는 거, 맞겠지?
“뭐, 별다른 말은 없었으니까….”
신념의 열쇠. 돈. 신념의 열쇠. 돈. 신념의 열쇠….
잊어버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좋아. 까먹을 일은 없겠어.
애초에,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니까 말이다.
“자, 그러면…. 우선…?”
암구호를 머리 한쪽 구석으로 치우고, 눈앞에 보이는 저택의 담벼락을 올려다보았다.
“와 씨. 무슨 궁궐이네 그냥?”
하르만이 돈이 많이 굴러가는 동네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하니 수비대장의 집이 이렇게 대궐 같을 줄은 몰랐는데.
담장 밑 그림자에 숨어, 귀와 눈을 활짝 열고 주변을 경계하였다.
나올 때가 새벽 한 시쯤이었으니, 지금 시간은 대충 새벽 두 시 경.
오늘은 달빛이 구름에 가려, 엄청나게 어두웠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도록 혹독한 훈련을 받은 나에게는, 고양이 눈처럼 아주 잘 보이고 있었다.
저택의 크기를 보니, 문득 걱정이 들었다.
“시간 내로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저께는 행정관을 추적해서 하르만까지 오는 데 하루를 썼고, 어제는 행정관을 암살하는 데 하루를 썼다.
물론, 결국 들켰지만.
…아직 정체를 들키지는 않았으니, 암살이 맞지 않을까.
“아무튼….”
내 목표는,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사흘 이내로 이 일을 끝내는 것.
그래. 사흘. 최소한 사흘 이내로 이 일을 끝내고, 하루 만에 마차를 타고 후다닥 복귀한다.
임무 시작일로부터 도합 일주일이 경과하면, 사냥개 0조의 사냥개들은 임시 사망 처리라는 푯말, 소위 ‘검은 딱지’ 가 붙게 된다.
검은 딱지를 떼고 생존 여부를 증명하려면, 본부의 행정과로 가서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할뿐더러, 조금 불명예스러운 뒷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그렇기에, 일주일이 넘으면 곤란하다.
아무래도 위험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최정예 척후조이다 보니, 임무를 나서면 언제나 목숨줄이 간당간당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급여는 짭짤하게 주지만.
하지만, 그 짭짤하게 받는 돈들이 다 어디로 나가겠는가. 식숙비는 레인저 본부에서 생활하니 그렇다 쳐도, 우리에게 지급되는 온갖 고급진 장비들의 손질에 몽땅 빠져나가는 꼴이다.
“후읍…! 에이씨. 이번에 가면 봉급 인상 좀 해 달라고, 아주 결판을 내야지, 원….”
그리 투덜거리면서도,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은 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잔디밭에 발을 디디는 데 성공했다.
일단, 사흘보다 더 짧게 단축해서 끝내는 데 집중하도록 하자. 사흘이 한계라고는 해도, 그보다 더 빨리 가는 것이 좋을 테니까.
저택의 정원은 고요했다. 간혹 대형 견종 특유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다행히도 모두 뒤뜰에서 키우는 모양이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완전한 침묵을 유지한 채 저택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정원을 가로질러 서서히 저택을 향해 다가가고 있으니, 별안간 저 멀리 순찰을 도는 경비병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유독 어둑어둑한 날이라서 그런지, 랜턴의 빛살이 유독 강했다.
“그래서… 내가….”
“다음에… 주점에 가서….”
재빨리 정원 사이의 풀숲에 들어간 뒤, 몸을 최대한 낮추어 풀숲 바깥으로 몸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놈들의 순찰 경로를 미처 파악해 두지 못했다. 최대한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자네 마누라가 직접 무두질해서 만들어 준 장갑이라며? 어떻게, 손에 좀 맞나?”
“말도 말게. 아 글쎄, 고 여편네 말로는 평야 외뿔 소가죽으로 만들었다는데, 손에도 착 달라붙고, 칼을 쥐어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것이….”
“허…. 확실히, 자네 마누라가 손재주가 대단하긴 한가 보이. 어디서 팔아도 손색이 없겠어.”
기껏 출력을 높인 마력 랜턴으로 한다는 짓이, 멋들어진 가죽 장갑을 비추는 꼴이라니.
…경비병들은 싼 값에 고용 한 모양이다.
아무튼, 그 둘이 지나갈 때까지 숨죽여 기다리니, 얼마 안 가 나를 지나쳐 저택 왼편으로 돌아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비병들이 저택 모퉁이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난 뒤, 재차 몸을 일으켜 저택으로 다가갔다.
“보자….”
숲 속에서 적진을 기습하는 임무는 몰라도, 이렇게 복잡한 건물에 잠입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조금 전, 하르만에 높이 솟아 있는 시계탑의 꼭대기에서 망원경으로 내려다본 결과, 집무실로 보이는 방은 2층 남쪽 방향에 있었다.
웬만하면 2층 창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지만, 부피가 커서 잠입과는 맞지 않는 갈고리 볼트는, 아쉽게도 챙겨 오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1층에서 올라가는 수밖에.
슬쩍 창문 너머의 집 내부를 확인한 뒤, 내부가 텅 비어있는 방의 창문을 조심스레 밀어 보았다.
덜그럭.
“…잠겼네.”
그렇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지만.
창문 틈 사이로 아주 얇고 단단한 핀을 넣은 뒤, 창문에 잠긴 걸쇠를 슬쩍 들어 올리면 끝.
이게 또 의외로 유연성을 많이 필요로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거든.
스르르….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창문이 열렸다. 경첩에 기름칠을 꾸준히 하는 모양이지.
혹시나 누군가가 쳐다보고 있지는 않은지, 고개를 두리번거려 재차 주변을 확인한 뒤, 날렵한 몸놀림으로 저택 내부에 발을 들였다.
먼지가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천으로 뒤덮인 가구가 방 안을 적당히 채우고 있었다.
“창고인가….”
값비싼 물건들이 많이 보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저게 아니다.
나는 살금살금 문 앞까지 걸어가, 문고리를 살며시 돌려 보았다.
“쉽다. 쉬워.”
이게 웬걸. 문이 그냥 다 열려 있네.
명색이 수비대장의 집인데, 이렇게 방비가 허술할 줄이야. 나는 경비병 한 둘 정도는 기절시킬 각오를 하고 왔는데 말이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문틈으로 몸을 슬쩍 빼내었다.
조금 전, 저택에 잠입하기 전에 시계탑에서 저택의 창문을 확인한 결과, 집무실로 보이는 방은 2층 남쪽 방향에 있었다.
“…조용하네.”
새벽 두 시 경이라 그런지, 경비병들을 제외한 사용인들도 전부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이러면 나야 좋지.
소리 없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 무사히 2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안전 불감증에 걸린 수비대장, 만세다.
“자, 이제….”
집무실. 보통 중요한 문서는 그곳에 보관하기 마련이다.
저택 방비도 그렇고, 경비병들의 안일한 순찰도 그렇고. 아무래도, 수비대장은 안전 불감증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벽을 짚으며 집무실을 찾아 2층을 돌아다니길,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찾았다.”
마침내 집무실을 찾아내었다.
문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슬며시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의외인데.
“보자, 보자… 문 따는 도구가….”
작은 파우치를 꺼내어 들고, 그 안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수많은 문 따개 도구들을 둘러보았다.
잠금장치의 크기는 소형. 대충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크기.
가장 비슷한 크기의 핀셋을 집어 들고, 조심스레 열쇠 구멍에 핀셋을 집어넣었다.
틱. 틱. 틱. 찰칵.
틱. 틱. 찰칵.
“후우….”
문 따는 것 정도는 쉽지.
스르르 열리는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니, 예상대로 촛불이 꺼진 집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가?”
집무실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딱 봐도 나 중요합니다— 하고 광고하는 듯한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 하르만 미 개발 구역 불법 마약 단속 계획서. ]
“그렇지.”
재빨리 품 속에 접어 넣은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던 찰나.
“…!”
순간적으로 느껴진 인기척에, 재빨리 문 뒤로 몸을 숨겼다.
뚜벅. 뚜벅. 뚜벅.
두 명의 발걸음 소리. 한 명은 발소리가 비교적 작다. 나이가 어리거나, 여성이거나.
“홍차 한 잔만 타 주게. 최대한 진하게.”
“알겠습니다.”
누가 들어도, 이 저택의 주인과 새벽 당번 메이드 같았다.
나가야 한다. 당장.
하지만, 어디로….
침착하게 탈출로를 모색하던 그때, 굳게 닫힌 창문이 내 눈에 들어왔다.
2층 정도의 높이라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에이, 썅…!”
재빨리 창문을 열어젖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 문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거의 다 왔다. 당장 나가야 한다.
갈고리 볼트가 없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크읍…!”
소리 없이 지면에 착지하는 것은 무리였으나, 다행히도 몸에는 별 다른 이상 없이 내려앉을 수 있었다.
집무실의 창문을 올려다보니, 아직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이 예쁜 새끼…. 네가 내 목숨줄이다….”
품속에 집어넣은 문서를 다시금 확인한 후, 재빨리 정원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베키에게 전달해 주고, 습격받을 사업장을 파악해서 알려 주기만 하면….
[ 왜애애애애애애앵!!!!!!!!! ]
“아이씨, 깜짝이야…! 무슨…!”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그 순간, 내가 방금 빠져나온 저택의 모든 랜턴 불이 화악 켜졌다.
“…시, 시발. 잠깐만.”
소리의 근원지가, 내 가슴팍이었다.
[ 왜애애애앵!!!!!!!!! ]
급히 문서를 꺼내어 보니, 시끄러운 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아니, 씨발 이거 갑자기 왜 이래.
설마….
허둥지둥 문서를 펼쳐 보니, 조금 전에 집무실에서 펼쳤을 때에는 없었던, ‘방범 마법진’ 이라는 글씨가 적힌 만드레이크 모양의 마법진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니, 씨발. 마력도 없는 내가, 이딴 걸 어떻게 감지해.
저택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수비대 병사들과 경비병들이 랜턴을 들고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과, 그들을 향해 다급히 호통치는 수비대장이 눈에 들어왔다.
“조, 좆됐….”
좆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