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화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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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Prologue. 상자 속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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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장기 휴가를 받았다.

합법적으로 쉬게 되었으나, 전염병 때문에 돌아다닐 수도 없어서 집에만 갇혀있었다.

며칠 정도는 일 안하고 쉬는게 어디냐며 웹소설을 보며 나름 즐겼다.

그러나 그것도 볼만한 거 다 봐버리니 시들해졌다.

한참 무료함에 절어있는 내게 여동생이 말했다.

"야, 심심하면 이거라도 볼래?"

평소 같았으면 그게 뭐가 되었든 '아니'라고 단호박 먹였을텐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뭐야, 로판이네. 로판 노잼인데."

"로판이 뭐 어때서! 이거 내최애 소설이거든? 진짜 나 혼자보기 아까워서 알려주는 건데. 깔거면 읽어보고 까던가."

오빠라는 생물체는 여동생이 자신만만하면 기를 죽여주고 싶다.

가뜩이나 버릇도 없는 앤데, 웹소설 10년차가 이 악물고 까주마.

"오냐."

나는 여동생의 최애 소설을 부수고자 스크롤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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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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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고 보니 밤이다.

요근래 들어 최고의 집중력이었다.

홀린 것처럼 여동생의 최애 소설을 봤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재밌었다.

다만 혈육의 소설에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아 씨, 피폐물이라니. 정신오염 오지네."

이제 여고생인 애가 발랑 까져서 19금소설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19금의 고수위 피폐물.

…정신차리라고 엄마한테 말해서 일주일간 폰 압수해야겠다.

"제정신인 남캐가 없네."

내가 생각해도 이런 걸 꾸역꾸역 잘도 읽었다. 이래서 나보고 잡식누렁이라는 거겠지.

어쨌든 나만의 미슐랭으로 따지면 여동생의 최애소설은 별점 4점은 줄만하다.

내용은 극혐인데, 글은 또 잘 써서 억지로 보게 만든다.

초반부터 시작되는 매운맛에 정신이 얼얼하지만, 이게 또 중독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병을 만드는 금단의 소설이다.

"어휴, 정신병 걸리겠다."

나는 태블릿을 끄고, 내일 아침 폰을 압수당한 여동생의 얼굴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

그런데 잠이 안 온다. 방금 전까지 읽은 여주인공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녀의 불우한 삶.

항상 타인에게 휘둘리며, 억압받고, 감금 당하며, 순종하면서도ㅡ 남몰래 품고 있는 희망.

결국 그녀에게 행복이 오긴 할까.

'다음화 마렵네….'

지금쯤 다음화가 올라오지 않았을까?

나는 뒤척이다가 결국 태블릿을 켰다. 때마침 알림 설정에 기분 좋은 느낌표가 떠있었다.

"오. 타이밍 좋고."

나는 최신화를 클릭했다.

뜬금없이 용사가 유년기 때 마을사람들에게 납치 당하는 스토리였다.

"외전인가?"

나는 스크롤을 내렸다.

그 후 점점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목이 꾸벅꾸벅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몸이 그네처럼 앞뒤로 흔들렸다.

와, 시파… 겁나 피곤하네.

실낱 같은 의식 속에서 인지했다. 아무래도 내가 앉아서 졸고 있나보다.

침대가 있는데도 미련하게 앉은 채로 기절해버렸지만. 몸이 천근만근이라 귀찮아서 그대로 졸았다.

­빡!

"꾸헉!"

뭔가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나는 그대로 꼬부라졌다.

'악, 뭐야? 뭔데?'

나는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둘러본다.

사방이 어두컴컴 했고, 내 바로 앞에 꺼져가는 모닥불이 놓여있었다.

"야! 시팔, 네 짬에 잠이 오냐! 엉아가 불 꺼뜨리면 뒤진다고 했냐, 안했냐?"

대뜸 떡진 머리의 키 작은 돼지가 내게 윽박질렀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황상 이 새끼가 내 뒤통수를 갈긴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보복이라도 하겠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뭔데? 뭐냐? 어디야? 산속?

나는 짙은 풀내음을 맡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 여기가 어디에여?"

나는 꼬부라진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이 새끼가 자다 일어나더니 정신을 못 차리네. 이거 보고도 몰라?"

어, 모르겠는데… 족발인가?

그 돼지가 주먹을 휘두르려고 하길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흡족한 듯이 미소를 띄우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하자, 피터. 이번 거래만 무사히 마치면 너네 가족도 겨울을 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괜한 신경 쓰지마.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갑자기 따뜻한 척 덕담을 보냈다. …병신인가?

그는 자기 혼자 떠들더니 천막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뭔 피터야. 피그 같이 생긴 게."

나는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주변이 온통 산과 나무요, 바로 앞에는 모닥불이다. 거기에 텐트 두 개까지.

나도 모르는 사이 새가족끼리 캠핑 온 것도 아닐테고….

출연자의 동의 없이 펼쳐지는 예능 버라이어티도 아니고….

가능성을 내세우고 지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 시팔. 겁나 춥네. 으으…."

산바람이 너무 차가웠다. 모닥불도 거의 꺼져버렸고.

결국 추위를 이기지 못한 나는 돼지가 들어간 천막 외의 다른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은 의외로 아늑했다. 낯선 외형의 램프가 덩그러니 놓여서 어둠 속에서 쫓아내고 있었다.

천으로 덮힌 물건 외에는 휑한 공간이었다.

"……미치겠네."

전체적으로 물건들이 조악해보였다. 사방에서 큼큼한 냄새가 나는 것이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내 옷도 거의 거렁뱅이나 다름 없었다. 낡고 헤지고, 터져서 기운 섬유질 옷. 촉감도 눅눅하고 거칠어서 줘도 안 입을 쓰레기였다.

절대로 우리집이 아니다. 내 옷도 아니다.

애시당초 한국이긴 할까?

어쩐지 굉장히 불길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것들을 어디서 본 것 같다. 그것도 무척 최근에.

지난 기억과 여동생의 목소리가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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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심심하면 이거라도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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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용사를 아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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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답안을 작성하고 나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허… 설마."

말도 안되는 일이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덜컥 뇌정지가 온다.

역시 여동생한테 잘해주면 안된다. 이 현상이 여동생이랑 무슨 관련이 있겠냐만은….

아무튼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멍청하게 서있는 것보다 뭐라도 해보기로 했다.

"우웩. 냄새."

항아리 같은 게 있길래 열어봤더니 시큼한 암모니아 냄새가 올라왔다.

빌어먹을, 요강이었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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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뒤져봐도 그리 쓸만해 보이는게 없다.

날붙이도, 단단한 몽둥이나 끈조차 없는 휑한 곳이다.

그럼, 남은 건 이 천으로 덮힌 네모난 물건인데….

­스르륵.

…뭔가가 있다.

천 너머에서 움직임이 느껴진다. 미약한 소리가 들린다.

"……설마."

나는 침을 삼킨 후, 용기를 내어 천을 걷어올린다.

파드득 날리는 천 아래로, 나무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적들의 보물상자처럼 생겼다. 부피가 제법 크다.

상자는 어린 아이 하나가 들어갈 크기였다.

나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상자의 걸쇠를 풀었다.

­딸깍.

남은 일은 뚜껑을 열기만 하면 된다.

"…끄응."

­끼이이이익.

제법 무게가 나가는 상자 속에서 새카만 것이 보였다.

불쾌한 예감이 현실로 되어 찾아왔다.

"……시발……."

나는 내가 맞닥뜨린 현실 앞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활자로 보았을 때보다 몇 천배는 더 충격적이다.

"……으, 으."

어린 아이였다.

무척 작고, 지저분하고, 잔뜩 메말라 있는……

그럼에도. 윤기나는 저주받은 검은 머리를 가진,

그런, 불행한 아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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