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2화 (2/117)

〈 2화 〉 용사를 유괴하다

* * *

2.

"으, 으…."

아이는 나신이었다.

성인인 나조차 추위에 떠는 날씨에, 이런 거지 같은 옷이라도 입은 나보다도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몸에 두르고, 작은 몸을 웅크려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처음에는 놀라움과 충격이었고, 그 다음은 원초적인 분노였다.

"어떤 씹새끼가…."

대체 얼마나… 발조차 제대로 뻗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얼마나 갇혀있었던 걸까.

하루? 이틀…? 아니면….

……적어도 30평짜리 아파트와는 비교도 안되겠지.

"추…, 어…."

상자가 열리면서 찬 공기에 노출된 아이가 부르르 떨었다.

지금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아이부터…!

"잠시만!"

나는 주변에서 아이에게 덮을만한 것을 찾아본다.

당장에 쓸만해 보이는 것은 상자를 덮고 있던 천뿐이다.

천에서 먼지를 털고, 그녀에 몸에 두르려고 했다.

"……."

스친 아이의 몸은 너무 차갑고 가냘파서 쉽게 깨질 살얼음 같았다.

나는 어쩐지 두려운 마음으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천을 둘러주었다.

급한 불은 껐다는 생각에 조금 멍해진 머리로 그녀를 바라봤다.

회색 천 속에 파묻힌 그녀는 여전히 작았고, 곧 꺼져버릴 불씨 같았다.

10살은 되었을까…?

­빠득..

'어떤 새끼가 이딴 상자에다가 이 어린애를….'

나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어린애가 이런 방식으로 고통 받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설령그딴 게 있다고 하더라도 알고 싶지 않았다.

상자 속의 그녀를 보며, 무수히 많은 상념들이 피어올랐다가 지워졌다.

'왜 이 곳이지? 하필이면 왜 내게, 이런 일을 보여주는 거야?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만약 이 모든 게 소설 속 이야기라면…. 나는 원작을, 이 아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되나? 그게 맞는 거지?'

답을 낼 수 없는 상념은, 가냘픈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엄, 마…?"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소름이 끼치도록 내 마음을 긁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듯이 반개한 흐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난생 처음보는 자색 눈동자는 이슬로 반짝거린다.

"……누구?"

나와 눈을 마주친 아이는 잔뜩 실망한, 그리고 체념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눈동자의 빛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어, 안녕?"

나는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 궁했다. 나도 지금의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래서 일단 '피터'라고 하기로 했다. 먼저 나를 그렇게 부른 자가 있었으니까.

"난 피터라고 해요."

"…응."

아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녀는 자신의 몸에 두른 천을 보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아이가 나와 두른 천을 번걸아 본다. 미지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쓰읍… 더러운 천이라 마음에 안 드나?'

그런 내 우려와 달리, 그녀는 오밀조밀한 손으로 천을 고쳐 쥐고서, 입을 오물거렸다.

"고, 마워."

더러운 천조가리일 뿐인데…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살짝 지어진 미소가… 어쩌지 목이 메인다.

"……천만에요."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상자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았다.

"으으…."

이따금 다리가 저린 듯이 신음성을 내며 몸을 비틀었다. 아마도 긴 시간을 상자 속에 갇혀있던 탓이리라.

"……."

나는 이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닥칠 고난을 생각하면, 내가 뱉은 어설픈 위로는 잔인한 일에 불과했다.

눈을 가리고 아웅하는 거다.

나는 그녀의 운명을 안다. 순전히 흥미로 엿보았던 활자, 그것이 그녀가 겪게 될 운명이었다.

활자로도 충분히 참담했던 이 아이의 삶은 이 상자로부터 시작되어 현실될 것이다.

그래,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빠드득.

"……누구 마음대로."

"…응?"

어떤 이유로 나에게 이 만남이 주선된 건지 모르겠다.

다만, 중요한 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고, 보호받아야할 어린애는 이따위로 핍박받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멍청하다고 평가할 것이다.

고작 소설 속 인물에게 마음을 쓴다며.

그래, 그 말이 옳을 지도 몰라.

내 같잖은 오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내정된 운명이 함부로 바뀌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그게 시발 어쩌라고.'

내 마음에 안드는 데 어쩌라는 거냐.

그딴 좆같은 운명, 바뀌면 바뀌라고. 오히려 좋아.

이건 내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진 비극이다.

감정에 충실한 인간인 나는 더이상 이 아이가 불행하지 않길 바란다.

'선택도, 책임도 내가 지면 될 거 아니야.'

나는 다리를 콩콩 두드리던 아이에게 선언한다.

"나가자. 지금 당장."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으응? …그래도 돼…?"

나는 씩 웃으며, 마음씨 좋은 사람인 척 굴었다.

"돼. 어차피 안된다고 해도 데리고 갈건데?"

그녀는 당황한 듯이 눈을 빙그르르 굴렸다. 자꾸만 고장난 것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어, 어……?"

"자, 일단 나가자."

나는 그녀에게 팔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깜짝 놀란 아이는 내 팔을 툭 밀어냈다.

"안돼!"

당황한 나를 보는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아이는 내 눈을 피하며 웅얼거린다.

"…만지면 안돼."

'철, 철컹이라고? 미친, 난 그런게…!'

내 불안과 다르게,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니, 쥐어 뜯는다가 맞는 표현이다. 10살짜리 애가 자해하고 있다.

기겁한 내가 막으려고 손을 내밀 때, 그녀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저주. …나…."

아이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안 그래도 작은 몸이 더 작아져버렸다.

나는 알고 있다.

'저주'라는 단어가 그녀의 삶을 옮아매는 족쇄라는 것을.

평생에 걸쳐서 그녀를 괴롭힐 저주는, 고작 저주받은 '단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든 것을 아는 나로서는 씁쓸한 일이다.

'저주라고? 개 같은 것들.'

나는 그녀가 저주와는 거리가 먼 존재임을 안다.

그렇다고 말해주더라도 믿지 않겠지만.

게다가 설득할 시간이 없다. 결국 남은 건 실력행사다.

나는 딱 좋게 몸을 말아버린 공벌레를 집어 올렸다.

"…에?"

'음, 깃털 같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얘는 좀 많이 먹여야겠다.'

내게 붙들린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예전에 주워온 길고양이랑 비슷한 느낌이다.

"…이, 이러면, 저, 저주가…!"

그녀의 물기 가득한 눈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나는 굳어버린 그녀를 고쳐 안으며 말한다.

"그런 거 없으니까. 조용조용. 오ㅃ,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내뱉은 대사지만, 영화 속 유괴범처럼 참 궁색맞다.

뭐 어떠냐, 어쨌든 납치범 맞잖아. 납치당한 공주님을 다시 납치하는 마을사람.

이걸로 개성 하나는 확실해졌다.

"헤으, 어어… 이러면…."

아무래도 우리 공주님이 많이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하긴 나도 반쯤 제정신으로 하는 일이 아닌데, 그녀에게는 더 큰 충격이겠지.

나는 납치범으로서 인질을 안심시켜줄 의무가 있다.

"괜찮아요. 원래 처음이 어렵지, 두 세번 하나보면 익숙해져요. 자자,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높이높이?"

"싫, 싫어……. 내, 려줘…."

그녀는 목덜미를 잡힌 고양이처럼 맥없이 항의했다.

나는 소심한 반항을 깔끔히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두 세번?'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일텐데.

제법 긴 납치극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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