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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3화 (3/117)

〈 3화 〉 레베카

* * *

밤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한 산속.

이슬을 머금은 공기 속에 한 남자가 아이를 품에 안고 걷고 있다.

아직 서늘한 찬공기에 아이가 온기를 찾아서 품 안을 파고든다.

"안, 되는데…."

[하지마, 안돼, 그만둬, 나를 놓아줘]

이 대사들은 그녀가 계속 되새기는 말이었다.

남자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거절한 요청.

그럼에도 아이는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그저 입밖으로만 내뱉었을 뿐이지, 진심이 담긴 말은 아니었다.

'……안되는데.'

아이는 어리광을 부리면 안된다고 알고 있음에도 속으로 생각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고, 편안해지는 심장 소리라고.

그래서 아이는 더 겁이 났다.

"괜찮아요."

남자는 잔뜩 굳은 아이를 토닥인다. 지금까지 끈질기게 그녀를 달래온 손길이다.

그녀는 눈을 스르륵 감고, 제법 익숙해진 손길을 받아들인다.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남자가 축 늘어진 그녀에게 묻는다.

"높이높이?"

"…그건 싫어."

그녀는 높은 곳이 무서웠다.

.

.

.

나는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납치범들이 끌고 온 마차 자국의 반대 방향으로 걸으면 되었다.

어둡고, 익숙하지 않은 산행이었다.

피터의 몸은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피로감에 찌든 몸뚱이였다.

그의 몸은 현대의 내 몸과 비교해봐도 부실한 몸이었다. 키만 컸지, 마르고 근육량이 적었다.

그런 몸으로 아무리 가벼운 어린애라도 장시간 안고 걷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목적이 있는 인간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부쩍 무거워진 다리를 무시하고 힘이 풀린 팔로 아이를 고쳐서 안았다.

"…힘, 들어?"

그것은 천으로 둘둘 쌓인 그녀가 '놓아달라'는 말 대신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지금껏 크게 반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있어준 아이가 기특해서 그저 웃었다.

그것과 별개로, 언젠가 묘한 대사로 내 양심을 찔러댔던 그녀에게 갚아주고자 짖궂게 말했다.

"이정도로 나를 힘들게 하기에는 너무 땅콩인데?"

실제로도 품 속의 아이는 너무 작았다. 앙증맞다고 하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녀가 웅얼거렸다.

"……클 거야."

오, 삐졌다.

나는 킥킥 웃으며, 해가 선명하게 뜨는 것을 보았다.

해가 뜬다. 내게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나는 곧 따라붙을 악의 무리를 떠올린다.

'운이 좀 따라줘야할텐데.'

납치범 놈들이 이제 슬슬 깨어나서 사태를 파악했을 것이다.

사라진 나와 텅 빈 상자를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었으니.

'역시 뭐라도 조치를 취할 걸 그랬나?'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했다고, 살짝 후회가 들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비록 내 선택에 충동이 섞여있었으나, 결국 최선이었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내가 잠들기 전에 본 소설의 내용을 떠올린다.

아이를 납치한 마을 사람들과, 그 저주 받은 아이를 구매하려는 자의 이야기.

만약 소설 속 내용처럼 오늘이 거래 당일이었다면,

당장이라도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게 옳은 선택이다.

(잘하자, 피터.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 뒤통수를 후렸던 돼지를 떠올렸다.

이번 겨울을 날 수 있다며 더이상 걱정하지 말라던 놈.

어린 생명을 팔아서 영리하려한 자들.

그런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지불될 생명의 대가가 단순히 황금이 아니라는 것을.

­철퍽.

순간, 내 눈앞에 질척거리는 붉음이 보였다. 그 장면이 너무 생생했기에 온 몸이 떨렸다.

나는 납치범들의 결말을 알고 있다.

범죄자들의 최후는 고작 한 줄로 묘사된다.

[그들을 처리했습니다.]

모두 죽을 것이다.

원작 소설의 서브 남주인 광신도에게.

***

태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뼈대만 남고 무너진 천막.

그 주위에 팔다리가 하나씩 결손된 채, 피흘리며 죽어가는 다섯 명의 마을 남자들이 있다.

그나마 멀쩡했던 중년 남자는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벌벌 떨고 있었다.

중년 남자의 귀에는 살려달라고 비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내내 맴돌았다.

그는 이마를 바닥에 박은 채로 생각한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내는 악마라고. 사람의 팔다리를 무감정하게 떼어내는 끔찍한 괴물이라고.

혼자서 이 사태를 일으킨 악마는 무척 새하얬다.

얼굴을 가린 흰가면과 흰수도복. 훤칠한 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풍스러운 검.

피 하나 묻지 않은 사내가 말한다.

"…대상은."

공기가 얼어붙는 차가운 미성이었다.

여자라도 오인할 정도로 맑은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에 중년 남자는 경기할 것처럼 떨었다.

이 목소리를 비웃고, 반항한 이들이 모두 죽었다.

거래장소에 혼자서 나타난 이 사내를 벗겨먹으려던 동료들은 처참하게 도륙되었다.

중년 남자는 살고 싶었기에 머리를 굴린다. 가면 쓴 악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공포에 마비되었던 머리로 억지로 떠올린다.

악마가 찾는 대상. 그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중년 남자는 솔직하게 말한다.

마을 남자가 풀어준 것인지 아니면 데리고 나간 건지 몰라도, 거래할 '물건'이 사라졌다고.

어디로 갔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고.

중년 남자는 어떻게든 동정심을 사고자, 없는 마누라와 자식까지 만들어서 팔았다.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가면을 보며 중년 남자가 그제서야 한숨을 쉰다.

이제 살았….

­서걱.

중년 남자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세상이 두개로 나뉜다. 그리고 점점 벌어진다.

'어라?'

절명한 그의 귀에 짜증 섞인 미성이 들렸다.

"정말 쓸모 없구나."

가면 쓴 사내는 그대로 길을 나섰다.

***

"……다 왔어?"

아이는 지겨운 모양인지 자꾸 꼼지락거렸다.

나도 잠깐 내려주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옷도 신발도 없었기에 망설여졌다.

"거의?"

사실 다 왔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저 길을 걷다보면 만난다는 정보만 있었으니까.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내 가슴팍을 두드렸다.

"음? 왜 그래요?"

그녀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발버둥을 쳤다.

거센 반항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내려주었다.

그녀는 내려주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급해보이는 표정이라 살짝 걱정된다.

'갑자기 왜 이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내가 걱정하는 사이, 그녀는 쪼르르 수풀로 들어가버렸다.

무심코 내가 따라가려고 하자,

"오지마! 절루 가."

그녀는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뭔가 부끄러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

그 사실을 깨닫고, 약간 민망해졌다. 나는 그녀를 위해 수풀에서 조금 떨어졌다.

곧이어 아이가 주섬주섬 걸어나왔다.

이런 거는 부끄러운 모양인지 얼굴이 새빨갛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빵 터질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크흠, 갈까요?"

"……웅."

모른 척 배려해주는 게 어른이다.

다시 아이를 품에 안는다.

근육통으로 저릿하지만 아직까지 참을만하다.

잠깐 떨어져 있었다고, 아이의 체온이 금세 식어있었다.

그녀는 용케도 춥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어서 옷을 입혀주고 싶다.

.

.

.

나는 이제 중천에 가까운 해를 보며 조급해졌다.

우리가 도망친 지 7시간은 지난 것 같다.

7시간… 그 자가 사태를 파악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작중에서 이단심판관이라는 직종을 가진 그는 추격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그 놈은 그런 집착남이었으니까.

안데르센 신부급 살인병기가 내 뒤를 바짝 쫓고 있다.

반면에 나는 빌어먹을 마을사람이고, 공복에다가 물마저 마시지 못한 채 7시간을 행군했다.

내기조차 성립되지 않는 싸움이다. 이대로 그에게 걸리면 반갈죽이다. 절대로 마주쳐선 안된다.

'이 정도면 만날 수 있는 거 아니야? 대체 언제 나타나냐…''

나는 언제 올 지도 모르는 님을 기다리느니, 지금이라도 숲으로 도망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서바이벌의 달인도 아니거나와, 도구도 식량도 없는 상태로 숲으로 도망친다는 것 자체가 악수라고 생각되었다.

결국 무지렁이인 내게 남은 수단은 원작 스토리를 믿고, 그것을 비틀어 버리는 것밖에 없다.

"…조금만 힘내자."

나만 지친 게 아니다. 나는 당장이라도 놓아버리고 싶은 팔을 억지로 붙든다.

"…으응."

아이가 축 늘어진 채로 말했다. 그녀도 지친 기색이 여력하다.

비록 안고 다녔다지만, 영양실조와 추위는 어린애가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좀 나와라. 시발.'

눈 앞에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나는 그녀의 발닦개라도 될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로 절실하다.

­달그락.

순간, 몽롱한 눈앞에 뭔가 스쳐지나갔다.

백마를 타고 달리고 있는 가면을 쓴 수도사.

일순간의 환상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그게 단순한 환영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슬쩍 돌아본 길은 여전히 텅 비었다.

그런데도 예감이 좋지않다.

나는 억지로 뛰었다. 비명을 지르는 다리를 독촉한다.

다리만 아픈 게 죽는 것보다 낫지 않냐며 설득한다. 심장도, 폐도 똑같이 다그친다.

죽을 거 같다. 죽고 싶다. 온 몸이 납덩이같다. 이대로 쓰러져 눕고 싶다.

아니, 더이상 생각하지 말자. 그냥 뛰어.

뒤지더라도 뛰어.

뛰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허, 헉, 끄허, 흑…."

정신을 차렸을 때는, 더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칠대로 지친 팔이 풀려서 아이를 내려놓았다.

"…괜찮아? 아파?"

끝났다. 빌어먹을….

주저 앉은 나를 아이가 조그마한 손으로 토닥거렸다.

나는 절망감과 미안함, 무력감에 눈을 감고 숨만 몰아쉬었다.

"흥미로운, 절실한, 발버둥. 나름 재밌었어."

근처에서 숨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뚝뚝 끊기는 기묘한 말투. 나른한 목소리에서 띄운 호기심.

비록 나이 든 할머니의 목소리였지만, 나는 벌떡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허리가 굽은 노파가 있었다.

얼굴에 주름과 검버섯 가득하고, 옷차림 또한 초라하다.

분명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볼품없는 노인이지만.

나는 그녀를 보며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숨조차 가다듬지도 않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으, 레… 허억, 베카."

노파가 내 말에 축 쳐진 눈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진홍색 눈동자에 묘한 빛이 감돌았다.

결코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기에 나는 급히 말을 이었다.

"후우, 하아, 레베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레베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흐음, 수상한 아이구나. 어떻게 알았니? 넌 노마인데."

그녀가 내게 뻗은 손은 일종의 경고였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죽이거나 개구리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무언의 경고.

내게 그녀를 납득시킬 마땅한 방법은 없었다.

소설에서 봐서 알아차렸다고 하면 레베카가 잘도 믿어주겠다.

'노마, 비마법사인가.'

레베카의 성격상, 그녀는 마법사도 아닌 내가 자신의 마법을 꿰뚫어 본 것에 대해서 호기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 점이 궁금해서라도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

게다가 원작에서 레베카가 관심을 보였던 용사도 여기있다.

입 터는 건 자신 없지만… 할만하다.

적당히 흥미로운 주제만 던져주면 된다.

이들은 유희에 미쳐서 인간들이랑 자기집도 털어먹는 괴짜들이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유일하게 광신도를 쫓아낼 수 있는 실력자.

긴 세월의 무료함을 이기지 못 해서 유희를 찾아헤매는 위대한 파충류.

레드드래곤, 레베카.

그녀를 낚아야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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