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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4화 (4/117)

〈 4화 〉 베일 속

* * *

"인간아.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니?"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현재 그녀의 겉모습은 할머니인지라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할머니가 아니기에 입조심해야 한다.

나는 웃음을 띄우며 살갑게 말한다.

"레베카 님이 좋아할만한 이야기요."

"호오, 기대해도 되니? 가급적이면, 그랬으면, 좋겠구나. 무의미한, 살생은 싫으니."

재미없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건가?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녀의 정체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폭급하다고 알려진 레드드래곤 중의 이단아.

레베카는 괴짜가 많은 드래곤 중에서도 유별난 괴짜였다.

아름답고 강한 것을 중요시하는 드래곤들은 그 자존심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미남미녀로 폴리모프하는 것을 고집한다.

그런데 비해 그녀는 인간들 사이에 선남선녀가 흔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유희의 재미를 위해 가장 볼품 없는 모습으로 돌아다니곤 했다. 지금처럼.

레드드래곤치고 성격이 느긋하고, 인간에게 우호적이며 마음이 내키면 도와준다.

"하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사실 너무 좋아하실까봐 걱정입니다."

"애태우는, 거니? 슬슬, 지겨워지는데."

겨우 그것 뿐이다. 나는 레베카를 잘 모른다.

그녀가 어떤 것을 선호하고, 관심을 가지는지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원래 로맨스 판타지에서 여주를 제외하고, 찬밥취급 당하는게 다름 아닌 여캐다.

그런 만큼이나 레베카의 분량은 쥐꼬리만하고, 서술도 자주 생략되었다.

레베카는 가끔씩 등장해서 의미심장하게 웃고 떠나는 조연으로서의 밑밥만 깔았다.

나는 그게 아쉬워서 댓글도 여러번 달았다.

­그래도 드래곤인데 취급이 좀 그렇네요.

­레베카 예쁜가요? 진짜 할머니인가요? 제발 외모 묘사 좀…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나는 그 불칠전한 밑밥 속에서 레베카를 낚아 올릴 정보를 찾아야했다.

약 7시간 동안 머릿속을 헤집으며, 결국에는 찾아냈다.

레베카가 홀라당 물어버릴 먹음직스러운 미끼.

나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미리 준비해둔 대사를 쳤다.

"찾고 계신 게 있지 않습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레베카가 인간에게 우호적인 것은 알고 있으나, 그녀의 변덕으로 내 목숨이 오간다는 사실은 역시 두려웠다.

"찾는다라? 무얼?"

"레베카 님의 소중한 것이죠."

"주제를, 넘나 드는구나. 그래서, 내가 없다고, 한다면?"

레베카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뚱한 얼굴로 나를 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내 옆에서 우물쭈물하는 용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맞잡은 손을 레베카에게 보이며 활짝 웃어주었다.

"하하! 정말이십니까? 아쉽네요. 그치?"

"……흐잉?"

레베카는 당황한 용사를 보며 살짝 미소짓다가, 나를 보더니 점점 얼굴을 찡그렸다.

영민한 그녀는 내가 취한 제스처의 의미를 깨달은 모양이다.

"인간. 너 무얼 알고 있느냐."

그녀가 곧 내게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말했잖습니까. 레베카 님의 '소중한 것'이라고요. 벌써 잊으셨습니까? 역시 드래곤도 나이를 먹나봅니다."

나는 여동생을 대하듯이 최선을 다해 이죽거렸다.

레베카가 잔뜩 열받은 목소리로 말한다.

"적당히 하라. 내게 관대함을 바란다면."

"그렇죠. 어머니는 언제나 관대하고 따뜻해야하는 법입니다. 그런 어머니이시니 자녀 분은 행ㅡ"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레베카가 붉은 여인의 형상으로 변모해 내게 달려들었다.

"감히! 내 앞에서 내 아이를 들먹여!"

"컥, 커헉…!"

레베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뿌드득 목을 파고든다.

목이 끊어질 것 같은 상상이상의 괴로움이었다.

나는 허공에 붕 뜬 채로 질식하며 발장구를 쳤다.

"…!? 왜…! 하, 하지마! 하지마!"

깜짝 놀란 용사가 달려와 레베카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반나절 넘게 같이 다녔다고 나를 구해주려고 애쓰는 모양이다.

과연 미래의 용사다. 착해빠졌기는. 그 모습이 제법 기특하다.

'괜찮아, 꼬맹아. 나도 계획이 다 있어.'

레베카에게 목을 졸려 괴로운 와중에 생각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레베카라면 나를 죽이지 않고 놓아줄 것이라고.

그 후 내게 이야기를 듣고, 내 목을 조른 것에 대한 것까지 쳐서 보상을 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녀는 무척 후한 드래곤이었으니까.

'용사야, 아저씨가 깽값 벌어갈게! 예쁜 옷 잔뜩 사자…!'

"…커, 허…."

"놔! 흐, 놓으란 말야!"

그런데… 예상과 달리 목을 조르는 레베카의 손이 전혀 풀리지 않았다.

…점점 몽롱해진다.

이러다가… …갈 거 같다.

어…

…슬슬 의식이 끊기는데?

……잠, 잠시만, 레베카 누나?

멍한 의식 속에 레베카의 진홍색 눈이 돌아간 것이 보였다. 뭔가 잘못됐구나.

'아… 너무 나댔다….'

욕심부려서 깽값 챙기려다가 죽게 생겼다.

이래서 인생은 실전인가….

다음 생에는 드래곤에게 깝치지 말아야ㅡ..

점멸하는 의식 속에, 어린애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하지마! 놔, 놓으라고!!》

"뭣……!"

­쾅!!

어린 용사가 내지른 주먹을 맞고 레베카가 튕겨나갔다.

레베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맨바닥에 널브러진 나는 산소를 갈구하며 한참을 기침했다.

"컥, 콜록! 콜록!"

수도꼭지마냥 침과 눈물이 질질 샌다. 목이 졸라게 아팠다.

"피터."

정신을 못 차리는 내 곁에서 용사가 울상을 짓고 있다.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이라 죄책감이 든다. 그녀를 곁눈질한 나는 최대한 호흡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괜찮다고 말해야줘야지.

"컥, 괜, 콜록!"

잘 안된다.

일단 용사의 머리라도 두드려 주었다. 정말 작은 머리통이었다.

얘가 잘 웃지도 못하는데 적어도 울지는 말아야지.

슬슬 숨쉴만하다고 생각될 쯤, 레베카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힘을 숨긴 게냐."

적발의 여인이 홀연히 다가온다. 그녀는 머리가 식은 모양인지 차분한 얼굴이었다.

용사가 찌푸리며 작은 몸으로 내 앞을 막아선다.

"…오지마."

"…내가 조금 손속이 과했다. 저 인간이 워낙 까불어야지. 기나긴 생에 내가 드래곤 임을 알고도 시건방진 인간은 손에 꼽는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살려준 것을 감사히 여기거라."

그거 영광이군요.

레베카는 결국 '드래곤'치고 우호적인 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서 죽을 뻔했다.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녀는 이미 미끼를 물어버렸다는 것을.

"고, 마워요. 크흠, 이제 괜찮아요."

제법 회복한 나는 쉰 목소리로 용사를 달랬다.

"…아파?"

"아뇨, 이정도는 개껌인데요?"

"개껌?"

나는 고개를 갸웃뚱하는 그녀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 쪼그만한 녀석한테 보호받다니.'

어른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이 애가 나보다 스펙이 훨씬 좋다. 어려도 용사는 용사였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일찍 각성할 줄 몰랐다.

원작에서는 용사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그녀를 각성시키려고 온갖 고문을 가 했었다.

최후의 순간에 도달해서야 그녀가 겨우 각성하고, 그곳을 탈출하는게 스토리의 시작이었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결과적으로 용사는 더이상 고문 받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힘을 얻었다는 것보다 좋은 일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용사의 후원자가 되어줄 호구를 꼬실 시간이다.

"레베ㅡ"

나는 레베카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에 입을 열고자 했다.

그 때였다.

­달그락!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무섭도록 금세 가까워진다.

나는 재빨리 용사를 품 속에 숨겼다. 눈만 내민 용사가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말의 숨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누군가 내 등을 노려보고 있다. 저릿한 감각이다.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네 놈이냐.]

목소리에도 색이 있는지, 나는 그의 미성을 듣고 순백을 떠올렸다.

너무 하얗기만 해서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색깔.

내가 알고 있는 남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자와는 일반적인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그저 레베카에게 눈짓한다.

"여보, 내 생각에는 '우리 애'가 당신을 똑 닮아서 '붉은머리'가 참 예쁜 거 같아."

내 말에 레베카가 눈을 찌푸린다.

이게 무슨 수작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좀 맞춰주라. 나는 그녀가 삼류 연극을 깨기 전에 말을 이었다.

"나랑 얘가 장난 쳤다고 너무 삐지지마. 당신은 항상 웃고 있는 게 '마법'처럼 아름다우니까."

겁 먹은 나와 품 속의 어린아이, 그리고 살기를 띄운 채 나타난 수상한 가면의 사내.

당신처럼 '어린애'를 아끼는 드래곤이라면, 어느 정도 상황파악을 했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그랬듯이.

길게 말했으나 영민한 그녀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

레베카는 나와 내 뒤에 있는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는 잠깐 고민한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쉰다.

"이번만은, 봐주겠어. 다음에는, 국물도 없어."

레베카는 용사의 머리를 손가락 툭 건드리고, 주저 앉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 후, 그녀가 늦었으니 어서 가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기다려라. 좋은 말로 할 때.]

상황을 지켜보던 가면이 행동에 나섰다.

그가 검을 꺼내들고 레베카를 위협했다.

"감히…."

"이게 무슨 짓입니까! 평범한 아녀자한테 검을 겨루다니요."

나는 열받은 레베카가 나서기 전에,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레베카가 저 자를 쉽게 발라버릴 수는 있지만, 지금 당장 해치우더라도 이쪽이 손해였다.

저 자는 속여서 돌려보내야만 이득이 된다.

나는 놈의 성격을 떠올리며,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였다.

"복장을 보아하니 교단쪽 사람같은데. 당신은 신앙과 명예도 모르십니까! 이런 노상강도 같은 무례한 짓이라니요!"

[……확인할 것이 있다.]

"확인이고 나발이고. 여차하면 다 죽일 셈입니까. 검 내려 놓으십시오. 여신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어찌 모르고 계신답니까."

[…여신께서도 이해해 주실거다.]

"그런 편리한 생각으로 여신님을 믿으시는 겁니까? 그쪽의 입맛에 맞춰서 여신님께서 이해주리라고 생각하냐고요! 당신 생각대로라면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천국가겠습니다. 진짜 여신도는 맞으십니까? 제 눈에는 당신이 죄 없는 제 아내와 아이를 위협하는 강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여신도라면 당장 검을 내려놓으십시오!"

[……크흠.]

어딜 교회의 종따위가 민간인한테 검을 들이대고 있어! 개념 없게 말이야. 너 사이비 새끼냐?

대충 그런 소리에 가면이 헛기침을 하며 검을 납도했다.

'광신도 새끼. 염치 없는 줄은 아네.'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지만, 아직 그의 턴이 남았다.

가면이 조금 유해진 태도로 말한다.

[사정이 있어서 무례했음을 사과한다. 이에 대한 보상도 적지않게 하겠다. 다만, 교단의 임무 때문에 확인해야할 것이 있다. 협조를 부탁한다.]

"진실인지 증명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 당신을 믿을 수 없군요. 가면을 쓴 것부터가 무척 수상합니다."

[…본교의 패다. 비록 내 신분은 밝힐 수 없지만, 본인은 수상한 인물이 아니며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사실을 그대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여신께 맹세코 그대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협조해다오.]

맹세코는 지랄. 용사가 누구인지 알면 바로 다 죽일거면서.

그러나 나는 놈이 교단의 패와 임무를 들먹이며 협조를 요청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놈이 지키는 선은 무척 얇고 편협해서, 수틀리면 다시 검을 빼어들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됩니까."

[간단하다. 저기 있는… 저 아이의 얼굴만 확인하면 된다.]

내가 행동하기도 전에, 가면이 용사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천을 뒤집어쓴 용사에게 새하얀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녀는 숨 죽이며 서 있었다.

사내의 건틀렛이 용사의 머리를 향한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본다.

만약 용사의 검은머리가 들통 난다면, 지금까지의 연극이 전부 무쓸모가 된다.

그리고 그녀의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결국 천이 벗겨진다. 드러난다. 용사의 머리카락이.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실례했다.]

사내의 떨떠름한 미성을 듣고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두 적발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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