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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5화 (5/117)

〈 5화 〉 용에게 주워진 날

* * *

여동생에게 꼰대라는 소리를 듣던 나는 염색머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면 검은 머리가 당연히 최고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붉은 머리카락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 정도로 감명 깊은 순간이었다.

나는 영롱하게 흐드러진 두 장미를 본다.

내 눈에는 레베카와 용사가 진짜 모녀처럼 보였다.

그 정도로 용사의 붉은 머리카락은 흠 잡을 데가 없이 자연스러웠다.

[…….]

광신도가 트집을 잡지 못하고 침묵할 정도로.

'젠장, 믿고 있었다구!'

나는 속으로 레베케에게 수백번의 절을 올렸다.

그녀는 신이며 그저 빛이었다.

나에게 더이상 쫄릴 것이 없었다.

나는 당당하게 광신도에게 다가가 말한다.

"이제 끝났습니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합니까? 아이의 옷이 이래서 서둘러 가봐야합니다만."

나는 천으로만 감싸인 용사를 가르키며 불쾌한 척했다.

그제서야 용사의 옷차림을 파악한 광신도가 목소리를 잘게 떨었다.

[그, 그렇군.]

광신도가 뻘줌하게 물러나자마자, 나는 용사의 머리를 천으로 감싸주었다.

가까이서 본 용사의 머리끝이 벌써 검붉어지기 시작했다.

'…위험했다.'

원작의 설정으로 용사의 머리카락에는 항마력이 깃들어 있다.

그런 만큼이나 그녀는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강했다.

그나마 드래곤이 사용하는 마법이 잠시나마 통해서 천만다행이다.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마지막 불안요소마저 제거한 나는 더이상 꺼릴 게 없었다.

내게 더이상 광신도는 추격자가 아니다.

나는 용사의 손을 잡고, 멀뚱히 서있는 광신도에게 방긋 웃어주었다.

"보상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가급적이면 현물로 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그리고ㅡ"

그는 이제 채무자에 불과하다.

**

[……사례금이다.]

광신도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피곤했지만 기쁘게 두 손을 내밀었다.

"아 고맙습니다.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복 받으실 거에요."

나는 기어코 그에게서 금화 세 닢을 뜯어냈다.

아직 물가를 잘 모르지만 금화의 가치가 작지 않음을 안다.

은화 20개가 모여서 금화 하나이니 제법 거금이지 않을까.

내가 악착같이 양심을 팔고, 교회도 팔고, 여신님도 팔았더니 그가 금화까지 내주셨다.

앞으로 광신도라고 쓰고 호구라고 읽어야겠다.

'이 영롱한 금화의 디테일을 보라고!'

덕분에 용사의 옷도 사고, 밥도 좀 먹일 수 있게 되었다. 하는 김에 나도 같이.

옛말에 전화위복이라더니, 이걸로 당장의 생활비가 생겼다.

나는 기쁜 마음에 용사의 머리통을 꾹꾹 눌러주었다.

기분 좋게 웃고 있으려니 광신도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찔리는 게 많아서 그의 시선이 무척 불편했다.

'설마 돈 뜯겨서 화난 건가? 아니면.'

그는 내 우려와는 달리 의외의 말을 했다.

[자네도, 아이도 많이 고되보이는군.]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괜히 꼬투리를 잡히기 전에 재빨리 변명을 쏟아냈다.

"하하, 딸아이랑 너무 신나게 놀아서 그렇습니다. 진흙탕 때문에 옷도 다 버릴만큼요. 그래서 아내가 잔뜩 화가 났지 뭡니까, 하하!"

가면은 내 말을 듣고 침묵하더니, 나와 용사를 번갈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대는 좋은 아버지인가.]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가 발길을 돌렸다.

그는 백마에 올라타고 길을 재촉한다.

아마도 찾지 못할 용사를 쫓아 떠나는 것이리라.

나는 깔끔하면서 허무하게 떠나는 그를 보며 생각한다.

그의 속삭임을 떠올리며.

'적어도 당신네들보다는.'

.

.

.

태풍 같던 인간이 백마를 타고 떠났다.

가장 걱정했던 위험요소가 사라지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보는 용사가 안절부절못하며 허공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피터, 괜찮아?"

꼬맹이 주제에 걱정하기는.

용사가 울상이길래, 나는 씨익 웃어주었다. 따로 대꾸는 하지 않았다.

……사실 말할 기운이 없다.

피터의 몸이 이미 지쳐있던 데다가, 하루종일 걸어다녔다.

한 끼니도 먹지 못했고, 물조차 마시지 않았다.

거기에 드래곤에게 죽을 뻔하고, 살인귀와의 기 싸움까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지치는 하루였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뻗어버릴 것 같다.

실제로도 긴장의 끈을 놓자마자 눈앞이 몽롱했다.

'…이제 끝난 건가.'

멍 때리는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장미향이 나는 붉은 그림자였다.

"인간. 나랑 할, 얘기가, 남았지?"

"아."

…맞다. 아직도 큰 산이 남아있었다.

어쩌지?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딸피인 채로 최종보스인 드래곤이라니….

나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어, 어라.'

그리 생각하니 정말로 점점 눈이 풀렸다.

…그러고보니 누군가가 말했다.

목적을 이룬 사람은 쉽게 꺾이는 법이라고 했다. 물론 내가 방금 만든 개소리지만.

아무튼… 더이상은 무리다. 조금만 자자.

'꼬맹아…. 아저씨, 아주 잠깐만 눈 좀 붙일게.'

몸이 점점 기운다.

몰려오는 수마 속에, 레베카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음을 떠올렸다.

레베카가 당분간 나와 용사를 돌봐줘야 할 이유가 될 정보. 쓰러지기 전에….

"레… 베카… 당신, 딸…."

마지막 남은 의지를 짜내 입을 움직였다.

"살아, 있어…."

(뭐…?)

결국 의식이 점멸한다. 눈앞이 캄캄하다.

(……피터! 피ㅡ)

잠들기 직전에 어린애의 애타는 고함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흔들지마….

야, 어, 그래….

오빠… 안 잔다….. 그냥, 눈만. 잠깐 눈만 붙이는…….

***

"피터! 피터어!"

'그 아이가 살아있다고?'

정신을 잃기 직전에 피터가 남긴 말이 레베카를 뒤흔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온갖 기억과 감정들이 요동친다. 그 대부분은 곧 회한과 당황스러움으로 가득찼다.

'인간, 너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느냐.'

레베카는 흔들리는 눈으로 의식을 잃은 피터를 보았다.

그의 곁에는 그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우는 아이가 있었다.

"피터! 피터어!"

무척 어린 인간의 아이였다.아마 그녀의 딸이 무사했다면, 이 아이와 엇비슷할 것 같았다.

그 아이는 피터라는 남자를 흔들어 깨우려고 노력한다.

조그만 손으로 열심히 남자를 두드렸다.

그러나, 피터는 눈을 뜨지 않는다.

"안돼. 안돼. 안돼…."

그 사실을 인지한 아이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질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피터의 곁에서 온몸으로 덜덜 떨었다.

기어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피터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던 레베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룡은 어린 아이의 처절함을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레베카가 아이를 말렸다.

"그만하렴. 그저 잠이 든 것뿐이란다. 아직 심장이 뛰고 있잖니."

아이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레베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다급하게 피터의 오른쪽 가슴에 귀를 대었다

­두근. 두근.

반나절 동안 들었던 일정한 울림.

그 고동을 들으며 아이는 이를 앙다물었다.

그녀는 불퉁한 얼굴로 레베카에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어."

"그러니? 그거 다행이구나."

레베카는 입을 꾹 다문 어린 인간을 바라보았다.

역시 작다. 메말랐고, 무척 여려보이는 몸이다.

툭치면 부러질 것 같은 어린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의 아이가 자신을 밀어냈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엄연히 드래곤인 나를.

'그러고보니 검은머리인가.'

레베카는 그녀가 아직 어린 드래곤일 적에 보았던 인간을 떠올렸다.

거의 천년 가까이 지나간 과거의 기억.

인간들은 스스로 잊어버렸으나,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고룡은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아이였나.'

레베카는 스스로 답을 낸 후, 속으로 감탄한다.

그녀는 아이에게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이 수상쩍은 기묘한 노마.

'피터라고 했던가.'

기절한 피터의 옆에는 아이가 꼭 붙어있었다.

아이는 레베카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도리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새끼고양이가 제 어미를 지키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레베카는 그 모습을 보고 실소를 터트렸다.

"안 잡아먹어."

"싫어. 저리가. 오지마."

왠지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

죽지 못해서 떠돌던 그녀의 세상에 별난 종자가 나타났다.

레베카는 별난 것들을 사랑하고, 마음에 들면 반드시 수집해야만 직성에 풀렸다.

그녀는 피터와 아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물어볼 것도 있고.'

그녀는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결정에는 대상의 동의는 중요하지 않았다.

[qkqcodruemtpdy.]

레베카는 주문을 외운다. 사나운 어린 아이를 위한 자장가였다.

주문을 마치고, 그녀는 사이좋게 포개어진 두 남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가자마자 씻겨야겠구나."

길에서 고양이를 줍는 마음으로, 레베카는 지저분한 두 인간을 주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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