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6화 (6/117)

〈 6화 〉 다짐

* * *

문득 정신이 들었다.

반쯤 깨어났지만, 노곤해서 일어나는 것이 귀찮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멍하게 누워있었다.

누워있다보니 잠들었던 동안에 꾸었던 꿈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누구?'

'난 피터라고 해요.'

그 꿈은 무척 기묘하고 생생했다.

여동생이 추천한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을 내가 납치해서 도망간다는 이야기.

도중에 드래곤을 만나서 협상을 하고, 주인공을 추노하러 온 서브남주를 속인다는 스펙타클한 내용의 꿈이었다.

제법 고단한 꿈이었다고 생각한다.

'피터!'

나는 눈을 감은채로 쓴웃음을 지었다.

밤 늦게까지 웹소설을 읽어대서 그런 꿈을 꿨노라고 생각하니 살짝 우스워졌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여동생의 최애소설은 내가 무심코 꿈 속에 들어가버릴 정도로 인상 깊었나보다.

­꼬르륵.

'몇 시지? 슬슬 일어나야겠어.'

나는 꿈 속의 여운에서 빠져나왔다.

자꾸만 항의를 보내는 위장을 달래주어야한다. 얼마나 잠든 건지 몰라도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분명 밤에 굶고 잠들지는 않았는데 공복감이 심하다.

허기에 질려서 그만 일어나려고 이불을 걷어올린다.

그런데 이불이 턱하고 걸린다.

뭔가가 이불 위에 있었다.

'혜은인가?'

나는 여동생이 또 장난치는 건가 싶었다.

고등학생이라는 녀석이 지겹지도 않나. 배고프고 성가셨기에 짜증이 났다.

나는 녀석에게 한소리하려고 했다.

눈을 뜬다.

바로 상반신만 일으킨 채로, 이불을 짓누르는 녀석을 노려본다.

그리고ㅡ….

"너…, ……?"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내 입은 저절로 벌어졌다.

어… 그러니까.

"……."

나는 정지해버린 가련한 뇌를 탓할 수 없었다.

그만큼 영문 모를 상황이었다.

일단 멍청하게 퇴화된 채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윤기가 나는 검은 명주실이다. 무척 부드러워 보이고 고급스러운 색감이었다.

반짝이는 검은실은 새하얀 이불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대자로 뻗은 채로 뒤집혀 있었다.

'…어쩐지 왼쪽이 묵직하더라.'

반쯤 정지한 뇌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는 일단 사방으로 퍼져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새삼 만지니 무척 간드러진 머리카락이다. 뉘집에 사는 누구의 머리털과 비교도 못할 수준이다.

마침 할 게 없었던 나는 그 머리카락을 땋으며 생각하기로 했다.

마치 반려동물의 털을 만지며 릴렉스하는 것처럼.

정신이 없던 나는 내게 주어진 머리카락을 열심히 가지고 놀았다.

'이게 무슨 일일까? 그러고보니 내 침대도 아니네. 여기가 어디지? 얘가 왜 여기있어?'

세갈래로 머리를 땋는데 집중하자, 점점 뇌가 정상 운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온갖 가정을 떠올렸다가 지우며 사태 파악에 나섰다.

비록 내겐 영민함은 없었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정도의 침착함과 적응능력이 있었다.

차분하게 머리카락을 땋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내게 고무줄이 없었다.

"아차."

나는 땋은 머리를 쥐고 탄식했다.

오랜만에 작품을 만들었음에도 완성시킬 마스터피스가 없었다. 통탄할 노릇이다.

"……모해?"

어, 일어났어?

언제 눈을 뜬 건지 몰라도, 자수정 같은 눈이 나를 향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영롱하고 독특한 눈동자를 보며 생각한다.

아직도 내가 꿈을 꾸고 있거나ㅡ

어쩌면 꿈이 아니었다고.

***

"음… 안녕?"

"응, 안녕."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눴다.

나는 불편하게 엎드린 채로 있는 용사를 위해, 그녀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용사는 꼬물거리면서 일어나 바로 앉는다.

그녀는 땋은 머리카락이 신기한 모양인지, 동그란 눈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들여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고.

"…으응."

내 앞에 용사를 앉히고,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게끔 손가락으로 빗어주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의해 갈라지며 해일을 만들었다. 빗어줄 때마다 장미향이 은은하게 났다.

­흠칫!

내가 머리를 빗어줄 때마다 용사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드나? 여동생 머리는 많이 만져봤는데….

어쩌면 내가 너무 친한 척해서 그녀가 불편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괜히 찔려서 나는 용사에게 물었다.

"불편해? 그만할까?"

"아니…… 기분 좋아…."

용사가 머리를 도리질했다. 그리고는 뒤통수를 내게 들이밀었다. 더 만져달라는 제스처같다.

나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다시 빗질을 했다.

그녀는 조용해진 채 손길을 받아들였다.

"……괜찮아?"

문득 용사가 말했다. 그 말은 두서가 없었고, 무척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래봬도 나는 제법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담긴 걱정을 이해하고, 그 작은 머리통을 탁탁 두드렸다.

"머리 안 감았어요? 으, 그건 좀 그런데."

"……! 아, 아니야!! 감았어, 감았어!"

"그럼 이 냄새는…?"

"하, 하지마…!"

내가 냄새를 맡는 척하며 놀리자, 용사가 새빨개진 얼굴로 빽소리를 질렀다.

자꾸 놀려대는 내게 잔뜩 삐친 그녀가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다.

나는 쪼그만한게 때려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며, 실실 웃으면서 맞아줬는데…

…그 조그만한 주먹이 존나게 매웠다.

진심. 거짓말 안하고, 진짜로 아팠기에 나는 탭치면서 사과해야만 했다.

***

"그래서 여긴 어디야?"

10살짜리 애한테 얻어맞고 항복한 피터가 물었다. 내가 아닌 피터의 몸으로 패배한 것이기에 나는 떳떳했다.

못난 어른의 말을 용사가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쁜 마녀의 집."

마녀라? 이 소설이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갑자기 웬 마녀래.

나는 만난 사람 중에 마녀라고 할만한 사람을 떠올리며 물었다.

"빨간 머리 누나?"

"응, 그 아줌마."

아.

용사의 대답이 왠지 웃겼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고 그녀에게 묻는다.

"네, 그 아줌, 집주인은 어디갔어?"

"몰라. 그 사람 싫어. 나 괴롭혔어…."

"네?"

레베카가 용사를 괴롭혔다고? 내가 놀란 눈으로 묻자, 그녀가 답했다.

"막… 물에 담갔어. 마음대로 만지고…. 또 이거도ㅡ"

"아…."

난 또 뭐라고.

나는 용사의 칭얼거림을 듣고 안심했다. 그저 목욕하기 싫었던 꼬마의 투정이라 다행이다.

그렇지, 아이를 좋아하는 레베카가 용사를 괴롭힐 리가 없다.

나는 실실 웃으며, 시시콜콜하게 레베카의 악행을 꼰지르는 용사를 본다.

볼을 상기한 채로 재잘거리는 모습에 제법 생기가 돌았다.

처음에 그녀를 상자 속에서 발견했을 때와 비교도 할 수없을 정도로 말끔해졌다.

고작 씻기고 옷을 입힌 것만으로, 용사에게 빛이 났다.

'레베카가 잘해줬구나.'

그러나 여전히 볼이 홀쭉해서 살 좀 찌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터ㅡ"

­꼬르륵.

마침 그녀의 배꼽시계가 눈치있게 끼어들었다.

나도 배가 고파서 일어나기도 했고. 나는 입을 앙다문 용사를 보며 말한다.

"배고프다. 뭐라도 좀 먹을래요?"

"……웅."

용사는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무심코 보고 있으면 미소가 그려지는 모습이다.

나는 아직 어린 그녀를 보며 생각한다.

지금의 그녀에겐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녀의 삶은 지금까지도 고되었을테지만, 가장 큰 시련은 아직 닥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다.

원작에서 버려야했던 그녀의 수많은 감정들을.

타인에 의해서 살인병기로서 키워져야했던 그녀의 유년기를.

지금이다.

지금이라면.

오직 지금 뿐이다.

그래, 나만이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게 어떠한 이득도, 성공도 보장되지 않는다.

내게 남는 것은 위기와 고난 뿐일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쉽사리 그 폭풍 속에 발을 내딛을 수 없다.

나는 두려웠다. 이 이야기가 무서웠다.

고작 일반인인 내게 가시밭길을 헤쳐나갈 용기와 능력이 부족하다.

언젠가의 충동으로 그녀를 도울만큼 다급하지도 않았다.

"……피터?"

그런 나를 바라보는 자주색 눈은 무구하다.

그저 투명하게 나를 비춘다.

나는 이 눈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주 불쾌한 이야기다.

"갈까?"

나는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는 조그만한 손이 쏙 들어온다.

그녀의 손은 너무 작았다.

이 빌어먹을 이야기를 혼자서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그래, 혼자라면.

"아이고, 집주인이 손님 대접을 할 줄도 모르네. 그치?"

"응…! 못됐어!"

"이러면 털어먹어도 된다. 인정?"

"인, 정…?"

나는 내 옆에서 붙어서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걸음에 맞춰서 걷는다.

그래, 함께 걷는다.

혼자가 안되면. 같이 가보자.

나는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불행했던 여자애가 마지막에는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

그런 해피엔딩을 만들어 보고 싶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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