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데이지
* * *
나는 해리포터를 시작으로 꾸준히 판타지 소설을 읽어왔다.
내게 판타지는 삶의 일부였고, 이룰 수 없는 꿈과 같았다.
그런 만큼 나는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어쨌든 판타지 세계다.
…드래곤이었다.
무려 드래곤의 집!
이른바 드래곤의 레어. 둥지 짓는 드래곤!
판타지 속 최강의 종족이 어떤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기대가 된다.
스마우그처럼 금화를 쌓아놓았을지, 아니면 어떤 성 또는 동굴에 똬리를 틀어놨을 지 궁금증이 일었다.
미래가 걱정된다지만, 그렇기에 현재에 충실해야한다.
근심에 매몰되면 사람은 동력을 잃고 금세 꺾여버린다.
나는 나아가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구경 정도는 해도 괜찮잖아?'
어차피 집주인이 손님을 두고 집을 비웠다.
이건 무척이나 예의가 없는, 몰상식한 짓이었다!
그래, 비인간적인 처사다.
어차피 우리가 빈집털이할 것도 아니고 잠깐 돌아다니는 것이니, 드래곤도 내게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는 소년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아."
약간 실망스러운 마음에 탄식이 새어나왔다.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곧 호기심이 들었다.
여기는 또 어디야?
보이는 것은 나무로 이뤄진 내부였다.
원목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통나무와 가공된 목재들이 짙거나 연한 갈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치 오두막 같다.
완전히 나무로 지어진 집은 처음이라서 신선했다.
현대식 건물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게 중세시대다, 라는 옛스러움이 있었다.
…말이 좋아서 옛스럽다지, 그냥 낡았다는 거다.
"피터, 저기."
용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난간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내가 있던 방은 2층이었나.
…그나저나 드래곤의 집이라며? 이거는 오두막 컨셉 펜션 아닌가?
나는 용사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했죠?"
"마녀네 집."
"그 빨간 머리 여자?"
"응."
용사는 확신에 찬 끄덕거림으로 답했다.
역시 레베카의 집이 맞았다. 나는 댓글로 지적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드래곤의 레어가 웬 오두막이란 말인가.
'작가님아, 이건 낭만이 없잖아요.'
나는 좀 더 둘러보기 위해서, 일단 내려가서 보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계단의 높이가 제법 가파르다.
아직 작달만한 용사에게는 조금 높아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자, 이리와요."
"……괜찮은데."
용사는 툴툴거리면서 순순히 안겨주었다.
역시 가볍다.
그리고 이제 익숙해진 무게감이다.
제법 뜨듯한 체온과 은은한 장미향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의식해서 최대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조심해야한다. 넘어졌다가는 큰일난다.
집중해서 한땀한땀 발을 딛는다.
"피터."
"응?"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용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뭔가 할 말이 있나. 잠깐 멈춰서서 그녀를 보았다.
커다란 자수정이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무척 예쁘고 신비로운 눈동자다. 무심코 들여다 봤다가 빨려들어가 버릴 것같다.
'너무 빤히 쳐다보면 부담스러운데.'
언젠가 어린 아이는 어른의 눈을 통해서 감정을 확인하려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나는 애써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들여다봤다.
이윽고 그녀가 말한다.
"…피터는 왜 안 물어봐? …내 이름."
"아."
용사는 약간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탄식했다. 그제서야 지금의 그녀에게는 이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서 용사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기호명이나 별칭, 멸칭으로만 불렸다. 이를테면, A013 또는 반마족 용사, 저주받은 아이 따위로.
강제로 훈련을 빙자한 고문을 받아야했던 용사에게 이름이란 개성은 가장 먼저 소거되야할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줄곧 A013이었고, 용사였다.
온전히 그녀를 가르키는 고유명사는 원작에서 단 한 번도 불리지 않는다.
나는 한대 얻어맞은 얼얼한 기분이었다.
나 또한 용사라는 역할을 그녀의 이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안일했다.
위급한 상황이었다, 현실감각이 떨어졌다, 따위의 변명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
그러나 추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좋은 것만 보고 배워야한다.
"미안해요. …늦었지만. 알려주실래요?"
"…ㅡ지."
그녀가 작게 웅얼거렸다.
나는 좀 더 집중해서 귀를 기울인다. 품 속에서 간질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지."
꽃의 이름이었다. 태양에서 유래된 꽃의 이름.
그녀의 부모가 어떤 의미를 담아서 지어주었을까. 꽃에 무지한 나로선 알 수 없다.
나는 되새듯이 말한다.
"데이지."
한때 용사라고 불리운 여자는, 데이지라는 이름의 평범한 아이가 되었다.
"예쁜 이름이에요. 무척 잘 어울려."
이제 그녀가 용사라고 불릴 일이 없을 것이다.
***
1층은 제법 넓은 홀이었다.
벽면에 커다란 화로가 있고, 대여섯개의 테이블과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나는 건물의 배치를 보자마자, 선술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레베카가 그녀의 레어가 아닌 여관 내지는 술집에다가 우리를 데려온 모양이다.
'조금 아쉽네.'
드래곤의 레어만은 못했지만, 낯선 환경은 제법 흥미로웠다.
엘더스크롤에서나 나올 법한 목조 건물은 나름 풍취가 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구 쪽에 안내 데스크처럼 보이는 구조물에 다가갔다.
가장자리에 작은 종이 설치되어 있었다. 끈을 당기면 되는 소리가 울리는 방식이었다.
주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일단 종을 당겨보았다.
띵.. 띵..
종소리는 영 매가리가 없었다.
그래도 데이지는 흥미가 생긴 모양인지, 동그란 눈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줄을 넘겨주고, 혼자서 데스크 안 쪽에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 보았다.
띵, 띵, 거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살핀다.
넓고, 복잡했다.
온갖 조리기구와 정체 모를 구조물들이 즐비했다.
주위의 냄새와 흔적을 보아서, 아무래도 이 곳이 주방인 것처럼 보였다.
'먹을 것라도 좀 찾아볼까.'
둘러보다가, 나는 익숙하게 생긴 구조물을 발견했다.
…어째서인지 이 기구의 역할과 사용법을 잘 알 것 같았다.
나는 생각나는대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화르륵 열기가 올라왔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게 뭔. 인덕션이냐고….'
전기선은 없었지만, 인덕션이었다.
심지어 작동방법도 같다. 나는 개연성이 없다면서 혀를 찼다.
그걸 따지고 있기에는 너무 허기졌다.
얼른 먹을만한 것들을 추스려 모았다.
밀가루, 버터, 계란, 견과류, 소금, 설탕, 감자, 사과, 물….
애매하네. 재료가 많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적었다.
이걸로 뭘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려나….
"피터? 머해?"
배고프고 지겨웠던 데이지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녀가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보며, 번뜩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여동생이 어릴 때 자주해주었던 간식.
"잠시만 기다려요. 기깔 나는 거 해드릴게요."
아마 꼬꼬마들은 그 마성을 거부할 수 없을 거다.
***
얼추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나는 마지막으로 구워낸 노르스름한 반죽을 접시 위에 층층이 쌓았다.
그 위로 카라멜팅한 설탕을 곁들이자, 제법 그럴듯한 비쥬얼이된다.
왕년의 솜씨는 죽지 않아서 그럴듯한 모양새였다.
"와아…."
데이지가 홀린 것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달콤한 냄새에 홀린 것처럼 침을 삼킨다.
나는 의자를 내어와 그녀를 앉히고, 포크와 작품을 내밀었다.
데이지는 눈 앞의 팬케이크를 두고 머뭇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뭔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아, 너무 큰가?
나는 팬케이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그녀에게 입가에 가져갔다.
"아~"
데이지는 내가 내민 포크를 보며 눈알을 굴리다가, 내 재촉에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었다.
살살 밀어 넣어주자, 팬케이크 조각이 그녀의 입속에서 빨려들어갔다.
"………!"
데이지는 흠칫하며 경악한 표정으로 팬케이크를 노려봤다.
허공에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아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는 신이 나서 한 조각을 더 잘라서 내밀었다. 작은 동물에게 먹이주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낚아채갔다.
여전히 눈이 동그랬다.
'팬케이크가 처음인가?'
나는 데이지가 감질날 것 같아서 도로 포크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포크를 쥐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
"맛있어요?"
끄덕끄덕.
누군가가 내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은 언제봐도 기분이 좋다.
하물며 깜찍한 꼬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가에 묻혀가며, 포크를 드는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코를 박고 팬케이크를 먹는 데이지를 보면서, 왜 어머니들이 짜장면을 안 좋아하시는 지 알 것 같았다.
진짜 안 먹어도 배부를 듯?
꼬르륵.
그건 아니었다.
나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배가 고팠기에 그럭저럭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부실한 재료로 이 정도면 무척 성공적인 팬케이크였다.
팬케이크가 밥은 안되지만 허기정도는 달랠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지금껏 팬케이크에 홀려있던 데이지가 내게 꾸벅 인사했다.
소스 하나 없이 깨끗한 접시가 그녀의 만족도를 알려주었다.
'모야, 이 생물….'
나는 여동생에게 밥해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취감이 들었다.
걔는 오빠가 밥해주는 기계인 줄 알고 있던데….
그에 반해 데이지는 뭔가 기특했고, 보람찼다.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게 얘를 키우는 맛인가?
나는 부성애가 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데이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피터는, 마법사야?"
실실 웃는 내게 데이지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웃겨서 골려주려고 싶었다.
"아뇨. 아직은요. 난 3년 남았어요."
남자는 누구나 30대에 마법을 쓸 수 있다. 그 조건을 만족한다면.
"……?"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데이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나는 그대가 예비 마법사인 줄은 몰랐는데? 너도 실력을 숨긴거니?"
내가 데이지를 보며 킥킥 웃는데,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언제?
나는 뻑뻑한 고개를 돌려서 뒤를 보았다.
붉은 머리가 아름다운 여인이 곰방대를 쥐고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넷처럼 영롱한 핏빛 눈동자와 세로로 그어진 동공에는 호기심과 의심으로 가득했다.
눈 앞에 신기한 벌레가 나타났는데, 그게 뭔가 싶어서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레베카를 보며 섬칫했다.
비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는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아, 뭐라도 말해야하는데.
그러나 갑작스러운 애드립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침을 삼키며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드래곤이 사람을 먹지는 않겠지?'
그 멍청한 생각 때문에 내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레베카의 배를 채우는 것만이 지상과제인 것처럼.
그래서 그런 헛소리를 했다.
"잡수실래요?"
왜 있지 않은가.
일단 배가 불러야 사람이 유해지는 법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