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Precious(수정)
* * *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배고픈 사자보다는 배부른 사자와 맞서 싸울 것이다.
물론 가장 현명한 것은 처음부터 사자의 눈에 띄지 않는 거다.
"이걸 나보고 먹으라는 거니?"
그런 점에서 나는 무척 비합리적인 인간이지 싶다.
사자도 아닌, 드래곤의 면전에다가 팬케이크를 내밀었으니….
드래곤이 나와 팬케이크를 무표정한 얼굴로 들여다본다.
그녀의 무기질적인 눈빛이 둘 중 뭐가 간식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맛있어요. 그치?"
"응!"
나는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어린애를 동원했다.
데이지의 환한 미소를 흘겨본 레베카가 조용히 포크를 들었다.
깨끗하게 덜어먹어서 천만다행이다.
"흐음."
레베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팬케이크를 관찰한다.
그녀는 포크로 팬케이크를 조각낸 후 입에 가져갔다.
레베카의 선명한 입술이 오물거린다.
그런데 표정이 썩 밝지가 않다.
'입맛에 안 맞나?'
고든 램지에게 요리를 내온 요리사의 심정이 이러할까.
나는 손에 땀을 쥐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손에서 포크를 떨어뜨렸다.
짤랑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허."
레베카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나는 그녀의 싸늘한 표정에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언제 터질 지 모르는 드래곤의 분노가 두려웠으나ㅡ
"……나보다 낫다니."
레베카가 그저 충격받은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포크를 다시 들었고, 미간을 찌푸린 채로 붉은 입술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크흠."
레베카는 헛기침을 하며 깔끔하게 비어낸 접시를 내려놓았다.
입가에 카라멜 소스가 묻은 드래곤은 지나가듯이 소감을 말한다.
"갈색 소스가 진하고 달콤하더구나. 반죽 안에 사과와 호두를 넣어놨니? 덕분에 풍미와 식감이 좋았어. 나보다 '조금' 낫구나."
"어… 감사합니다."
이 여자도 평범하게 말할 줄 아네.
나는 레베카의 어투에 살짝 의문이 들었으나, 어쨌든 그녀의 반응이 좋았기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인정 받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뭔가 그녀가 내게 조금 우호적인 분위기가 된 것 같다.
드래곤의 호평을 받은 팬케이크 정도면 장사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레베카에게 입가를 닦으라고 손짓해주었다.
"크흠, 이 팬케이크에 대해서 묻고 싶은게 있지만. 그 전에. 그대는 나와 해결해야할 이야기가 있지?"
카라멜 소스마저 닦아버린 레베카는 엄중한 표정이었다.
시작부터 본론을 꺼낸 것을 보아하니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다.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속이 약간 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는 해결해야할 이야기. 레베카의 딸에 대해서 떠올린다.
어느 매드 사이언티스트에게 구금당한 채 실험당하고 있을 비운의 해츨링.
데이지가 끌려가지 않은 시점이라면, 그녀도 아직까지 살아있을 것이다.
다른 용사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원작에서처럼 폐기당하지는 않겠지.
게다가ㅡ
"어린애가 들을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있다.
지금이라면 원작에서는 날개도 펴지 못한 해츨링이 살아날 가능성이 차고 넘쳤다.
어머니의 품 속으로 어린 드래곤이 돌아갈 수 있다.
"그럼 이 아이를 잠시 내보내면 되는거니?"
"데이지와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말해보거라."
"데이지는 아직 어립니다."
물론 내가 제대로 입을 열 경우에.
쾅!
"그만. 내 인내심이 그리 깊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텐데. 앞으로도 혓바닥을 놀릴 생각이라면, 더이상 내게 자비를 바라지 말거라."
레베카의 손에 의해 테이블이 산산조각 났다.
세로로 그어진 동공이 나를 노려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저, 저를 건드려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전적으로 저를 믿으세요. 제가 일부러 이러겠습니까? 예?"
"……."
나는 덜덜 떨리는 주둥이를 억지로 놀렸다.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데이지가 아니었으면 위아래로 분수를 터트릴 뻔했다.
'제길. 이게 내 밑천인데, 순순히 털어 놓겠냐고.'
레베카의 딸에 대해서 모두 털어놓는 것은 내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유는 크게 세가지였다.
"레베카 님의 따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확실한 정보입니다. 여기에 제 영혼도 걸 수 있지만, 지금의 제게 증명할 수단이 없습니다."
"……."
첫째, 출처가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딸에 대한 정보는 원작에서 있었던 떡밥을 토대로 만들어낸 가정이었다.
자칫하면 도리어 레베카에게 내가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레베카 님이 다급해 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런만큼 신중해야 합니다. 따님의 일이지 않습니까. 흥분한 상태로 들으시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
둘째, 시나리오가 완전히 개변된다.
이미 데이지가 내게 납치된 시점부터 크게 달라질 이야기였다.
여기서 이야기가 더 달라진다면,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내가 가진 유일한 이점이 사라지게 된다.
내게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외에는 이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우위를 점할 수단이 없다.
"옛말에 급할수록 되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은 차고 넘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레베카의 원조가 필요하다.
그녀는 적어도 나와 데이지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발판이 되어줘야한다.
쫓기는 몸인데다가, 나나 데이지에게 이 세계의 경험과 지식이 부족했다.
여기서 보호자나 다름 없는 레베카가 해츨링을 구하러 섣불리 움직였다가 그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즉, 내 일신의 안위를 위해 레베카의 딸을 희생시켜야한다.
레베카에게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나나 데이지를 위해서라면 필요한ㅡ
"……제."
잘 들리지 않았다.
내게 닿기에는 너무 가녀린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있었다.
물기라니…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나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본다.
"……제발. 말해다오. 난 그저…."
이번에는 똑똑히 들렸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무뚝뚝한 얼굴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으로만 우는 여인의 뺨에 투명한 선이 아로새겨진다.
나는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온갖 설정과 짤막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식을 잃은 후, 죽을 자리를 찾아서 떠돌아 다니던 드래곤.
자신의 딸의 모습을 다른 종족에게서 찾았던 어머니.
딸아이의 피에 반응해 멀리서 용사를 지켜보았던 레베카.
그녀는 누구보다 강대한 주제에, 고작 인간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드래곤이다.
지금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국과 이간질 시켜서 후환을 제거해버리는 것도ㅡ
"피터."
데이지가 내 손을 꾹 쥐었다. 나보다 훨씬 작은 온기가 나를 옥죄였다.
아련한 보라색 눈동자가 축 쳐진 레베카를 향하고 있었다.
문득 스스로가 부끄럽고, 혐오스러워졌다.
나란 인간은 데이지를 돕겠다고 떠들면서, 다른 사람의 아이에게는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불행한 용사는 행복하게 만든다면서, 절망스러운 모녀를 내버려두려 한다.
'사람은 위기의 상황에서 본성이 드러난다고 했던가.'
쓴웃음이 지어졌다.
나도 몰랐던, 내 자신의 계산적이고 모순적인 면모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데이지와 레베카를 번갈아보았다.
둘 다 나같은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순수한 존재였다.
적어도 내게 두 존재를 저울에 올려둘 자격이 없었다.
애당초 싸구려 동정심을 발휘해서 여기까지 온 내게 걸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계산이나 이득 따위를 고려했다면 처음부터 데이지를 구하면 안됐다.
나 혼자 도망쳐서 흘러가는대로 방관이나 했어야 한다.
결국 나는 감정적이고, 동시에 위선적이며 비합리적인 인간이었다.
"데이지, 잠깐만 바깥 구경 좀 다녀올래요?"
"어? …응!"
내 말에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나를 향한 아이의 눈빛에 호의가 가득하다.
내가 뭐라고.
나는 데이지가 보내오는 일방적인 호의가 무거웠다.
대체 내 무엇을 보고 믿어주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믿어주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게 어른의 책무 아니겠는가.
뭐, 알아서 굴러가겠지.
언제 내가 계획대로 움직였다고.
나답게 굴자.
오히려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해서 아주 좋았다.
나는 데이지를 내보내고 레베카에게 요구한다.
"레베카. 따님은 행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들어보겠다."
레베카가 동그랗게 뜨던 눈을 가늘게 고치며 되물었다.
그녀는 의외로 표정이 다양했다.
나는 짐짓 유쾌한 기분으로 입을 연다.
"네, 들어보시지요. 여차하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설령 거부하시더라도 전부 말씀해드릴게요."
"……."
레베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으로 내가 아는 지식을 끌어모아 되새긴다.
레베카는 무척 충동적이다.또한 자포자기로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살만큼 살았다고 합리화하며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다.
그러니 그녀의 영혼에 무게를 심어주어야한다.
그녀를 이 땅에 속박할 이유와 강제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원작보다 불안정해 보이는 그녀에겐 목줄이 필요하다.
그녀의 곁에서 충동을 말려주고, 길을 이끌어주는 잔소리 심한 목줄이.
때마침 그게 여기 하나 있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하기 시작한ㅡ
"맹약을 맺읍시다."
나는 인간 목줄에 지원해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