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맹약
* * *
"맹약을 맺어요."
내 말에 레베카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로 그리운 말이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회상에 젖어있었으나 동시에 미미하게 떨리는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
레베카는 감정을 갈무리하고 물었다.
"까마득한 기억이구나. 인간아, 무엇을 알고 있느냐. 그대는 누구지?"
세로로 그어진 안광이 내 면면을 들여다보았다.
피터의 몸을 차지한 내 영혼을 도려낼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나는 메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억지로 미소를 가장하고 레베카에게 대꾸한다.
"지금 제 정체가 그리도 중요하십니까? 지푸라기를 쥐려할 때는 언제고, 지금에 와서 저를 의심하고 있군요. 뭐 저도 이해합니다. 저도 제가 수상한 사람 같거든요."
"······당연한 의문이다. 반 백년도 살지 못한 인간아. 그래서 답할 수 없느냐?"
나와 레베카는 서로를 탐색하듯이 마주보았다.
나는 내심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읽고 있던 소설 속에 빙의했다고 말하면 믿어주시나요?'
잘도 믿겠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아직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현상인데, 그런 이유를 들어 남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럼 묻겠습니다. 당신은 제 말을 모두 믿을 수 있습니까? 한치의 의심도 없이?"
"······."
내 말에 레베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나는 심기불편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서둘러 말을 잇는다.
"당신은 가장 완벽한 증명을 두고서 제게 믿지도 않을 대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답안을 제출했습니다. 이제 나머지는 레베카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맹약인가."
레베카는 곱씹듯이 눈을 감았다.
이윽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뇌하듯이 고운 미간을 모았다.
'언제나 계약서에 도장 찍는 건 두려운 일이지.'
나는 그녀의 고민를 이해하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아마도 고룡인 레베카에게는 '맹약'의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거론한 맹약은 단순한 약속의 의미가 아니었다.
[우리의 맹약은 절대적이다. 이는 죽음조차 갈라 놓을 수 없는 영혼의 맹세다.]
작중에서 천년 전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등장한 표현이었다.
내가 파악한 맹약은 쉽게 생각하면 구두로 맺는 각서였다.
상호 동의하에, 인간과 드래곤을 신뢰관계로 이어주는 영혼의 계약.
천년 전의 강세한 마(?)와 혈투를 벌여야했던 용과 인간들의 맹세가 기원이었다.
서로를 믿어야했기에 두 종족이 만들어낸 고대의 마법.
비록 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가 누리며,
영웅들이 흙으로 돌아가고 용이 잠들면서 완전히 잊혀진 마법이지만ㅡ
'이보다 완벽한 보증서는 없지.'
솔직히 영혼의 계약이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맹약은 내 목적과 순수를 증명하기 적절한 수단이었다.
레베카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루비색 눈동자가 전보다 뚜렷했다.
"내 아이에 대해 듣고나서 결정하겠다."
과연, 오래 살아온 만큼이나 레베카는 완고했다.
기어이 스포일러를 듣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레베카가 내 제안을 거부하든 말든 모두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던, 레베카에게 알 권리가 있다.
"그전에 말씀 드리는 건데, 전 무조건 레베카의 편입니다. 절대로 과몰입하지 마세요."
"과몰입? 그게 무슨 말이니?"
"···끝까지 날뛰지 말아달라고요."
얼떨떨한 표정이던 레베카는 샐쭉한 얼굴로 나를 흘겨봤다.
나는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을 잇는다.
"레베카. 어린 자식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부모가 건강한 모습으로 곁에 있어주어야 할 겁니다."
"···옳은 말이구나. 그런데, 아까부터 그런 사족을 왜 붙이는 거니?"
레베카는 떨떠름해보였다. 그녀는 눈빛으로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는 더이상 레베카가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냉혹한 현실에 충격을 받고, 나와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기를 바랐다.
최대한 가감없이 레베카에게 사실을 전한다.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정보, 그 곳은. 드래곤조차도 쉽사리 드나들지 못할 곳입니다. 아마 레베카도 익히 알고 있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들어보셨죠? '연옥'이라고."
"···뭐···!"
레베카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역시 인간사에 관심이 많은 그녀라 그런지 알고 있었다.
[연옥]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소문만 무성한 제국 최악의 감옥.
그 누구도 실체를 알지 못하지만, 분명 존재한다.
여기에 활자로 그 지옥의 일부를 엿보았던 이가 있다.
내가 본 연옥은 지하 7층으로 구성된 수감시설 겸 실험실, 그리고 인재양성을 위한 훈련소였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실험이고, 훈련일 뿐.
실체는 참담한 인체실험과 가혹한 고문만이 존재하는 지옥이었다.
그곳은 제국이 꼭꼭 감춰둔 추악한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
드러나서는 안될 민낯을 지키기 위해, 연옥은 제국의 어느 곳보다 살벌한 대비와 경계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맨발로 들이미는 것은 개죽음에 불과하다.
설령 드래곤이라도 거대한 국가와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때때로 저마다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서 어리석은 행동하게끔 프로그래밍이 되어있었다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드래곤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말로··· 정녕! 그 악독한 곳에 내 아이가 있단게냐!!"
레베카가 선혈이 새겨진 입과 붉은눈으로 분노를 내비쳤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거짓이다! 거짓말이라고!!"
핏빛 눈동자가 나를 찢어죽일 것처럼 노려본다.
믿을 수 없는 진실을 거부하는 송곳니가 나를 향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한 기세 때문에 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역시 감당이 안 되네.'
원작의 레베카는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슬픔과 애정으로 서서히 말라죽어 갔다.
현재의 레베카도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껏 죽음을 기다려 왔을거다.
그녀에게 죽음은 큰 의미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레베카는 티끌 같은 가능성만 있으면, 자식을 구하러 갈 무모한 어머니였다.
'어머니라···.'
내게 레베카를 말릴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없다.
하물며 나서야할 거창한 이유나 신념도 댈 수 없었다.
그럼에도ㅡ
나는 입을 연다.
격해진 감정 그대로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인다.
"전부 진실입니다, 레베카! 제가 목숨이 널려서 당신에게 이딴 헛소리를 하겠습니까? 나도 당신 마음 이해한다고요! 그러니깐, 좀 진정하세요. 밖으로 나갈 생각마세요! 그곳은 당신의 묫자리가 아닙니다!"
"···감히 네 놈이 뭘 안다고! 내가 어떤 심정으로 네 헛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지 알고는 있느냔 말이다···!"
'알아, 이 망할 파충류야. 네 최후 정도는 알고 있다고.'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떠한 장면을 지워버리고, 빌어먹게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바로잡는다.
더이상 억제하지 않은 충동과 관성에 의해서 나아간다.
시바, 될대로 되라지.
"맞습니다. 사실 쥐뿔도 몰라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네놈·····!"
"그런데! 이것만은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결국 당신의 딸을 되찾아야한다는 것! 그리고 분노와 충동에 맡겨서 쳐들어갈 일이 아니라는 것!"
"······."
"말했잖아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실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존나 깊은 나락 아래에 깔려있을 더럽게 많은 억제기와 제국에서 숨겨둔 마스터급 괴물들의 실력을! 레베카, 애초에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잖아요! 당신은 그저 죽고 싶은 거잖아···!"
안일한 동정심과 쓸데없는 오지랖이 내 말의 원동력이다.
나는 돕고 싶었고, 도울 수 있었다.
운 좋게도 나는 무일푼으로 이세계에 오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어느 모녀의 행복을 되찾아줄 정도의 지식이 있었다.
나는 레베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선언한다.
"진심으로 딸을 구하고 싶어요? 그러면 살려고 노력을 해! 그 정도 자신이 없으면 나를 데려가! 그깟 어린애 정도는 얼마든지 빼낼 줄테니깐. 시발! 나도 내가 못미더운 거 알아. 그래도 믿어! 자신이 없으면 나같은 거라도 믿어봐! 그럼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줄테니까!"
논리라곤 쥐뿔도 없는, 정리되지 않은 말이었다.
동시에 감정에 치우친 조잡한 대사다.
나는 씩씩거리며 침묵하는 레베카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망했다···.'
처음부터 정해진 결론이었다.
어차피 내게 레베카를 설득시킬만큼 뛰어난 언변은 없었다.
있는 건 같잖은 지식과 악바리 뿐이다.
이제 레베카의 바지자락이라도 물고 늘어질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혼란스럽구나."
잔뜩 떨리는 목소리였다.
레베카는 촉촉히 젖은 붉은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에게서 강대한 드래곤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내 아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도, 내 아이가 왜 그런 장소에 갇혀있는지도 영문을 알 수 없구나. 하지만 그대의 말이 맞다. 내게 그 아이를 찾으러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버러지 같은 것들 때문에···! ······아니, 처음부터 내가 그 아이를 잃어버린 탓이로구나. 이 몹쓸 어미를 만나 지금도 그 아이가 핍박 당하고 있었던 거야.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미쳐버릴 것 같구나.
···차라리 차디찬 설풍에 얼어 죽어버려야 했다. 같잖은 심장 따위는 진작에 뽑아냈어야 했어. 인간아, 그대여.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했니? 이제 더이상 견디기 벅차단다···."
지고의 생물 또한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였다.
내게 투명한 눈물은 피눈물보다 더 진해보였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녀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할 지 모르겠다.
다른 건 다 몰라도 나는 위로하는 것만큼은 서툰 사람이었다.
"따님, 아니 레일라가 행복하려면···."
곧 꺼질 것처럼 작아진 그녀를 보며 말한다.
말을 더듬어 가면서 꿋꿋이 의도를 전한다.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데이지에게도, 저에게도 레베카가 있어야만 합니다. 누구나··· 모자란 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살아가면서, 서로를 채워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법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레베카에게 잠시 쉬어날 버팀목 정도는 될 수 있을 거에요. 제게 그럴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
여자의 눈물은 남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뭔가가 깃들어있다.
설령 그 정체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나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또르르 떨어지는 이슬을 보며 눈을 꾹 감았다.
방금 내가 뭐라고 지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구나."
침묵을 깨고 레베카가 말했다.
조금 떨렸지만 아까보다 훨씬 안정된 목소리였다.
문득 부드러운 온기가 내 손을 감쌌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뜨자, 레베카가 기도하듯이 내 손을 감싸쥐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대의 말을 믿고 싶어진다. 쭉 봐온 것처럼···. 참으로 기묘하구나."
내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간 채로 그녀가 말했다.
숨이 닿아서 무척 간지러웠다.
'와 깜짝이야.'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새삼 다시보니 살이 떨릴 정도로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외면하고 말한다.
"믿, 믿어주세요. 레베카와 따님의 행복을 되찾아 드릴게요. 제 영혼에 맹세코."
맹약에는 계약서가 없었다.
필요한 건 서로의 영혼과 드래곤의 허락.
내 영혼은 진작에 판돈으로 걸어놨다. 남은 건 레베카의 허가 뿐이다.
만약 레베카가 맹약을 거부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아쉽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선택을 내렸다면 나는 그녀의 뜻을 존중할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을 레베카에게 털어놓고, 각자의 갈 길을 떠나면 된다.
분명 가시밭길일 테니,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기도하면서.
서로의 운명이 걸려있는 레베카의 말을 기다린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린다.
루비 같은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듯이 떨리고 있었다.
"그대는 너무 저돌적인 인간이야."
레베카는 지금껏 잡고 있던 손을 황급히 놓았다.
가녀린 겉모습에 비해 엄청난 힘에 끌려버린 내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니? 그대가 이렇게까지 나설 이유는···."
레베카가 한심한 추태를 벌인 나를 지탱하며 말했다.
태연한 척하며 장난친 주제에,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그녀에게 피식 웃어주었다.
"레베카. 잘 부탁드려요."
"······."
레베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런 루비 같은 눈동자에 내 영혼이 빨려들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보기 좋은 선명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정당한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나, 레드베로니카는 영원히 그대의 곁을 지키겠노라."
기도하듯 읆조리며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짙은 장미향이 가득했다.
눈앞에 만발한 붉음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구두계약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