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0화 (10/117)

〈 10화 〉 여로(1)

* * *

우거진 숲에 인마가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새겨진 길.

울퉁불퉁한 산길은 사람 셋 정도가 나란히 걸을 정도의 폭이었다.

중간에 조그만한 아이를 끼워넣은 남녀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미안해요, 레베카. 제가 말을 타본 적이 없어서…. 괜히 걷게 만들었네요."

"괜찮대도. 그대는 평민이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단다."

레베카는 손을 휘저으며 나른한 미소로 대꾸했다.

동기화된 감각이 그녀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레베카의 배려심 넘치는 말은 고맙지만, 동시에 못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여행이 길어진 원인은 내게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말을 타고 갔으면 편안하고 이틀만에 도착했을 거리였지만.

평범한 현대인이었던 내가 승마 경험이 쥐뿔도 없었기에 도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 괜히 그러는구나. 말했지 않니? 말을 타는 것도 그리 편한 일은 아니란다. 다른 의미에서 걷는 것보다 괴롭지."

우울해하는 나를 알아차린 레베카가 내 어깨를 툭 건들며 말했다.

이윽고 그녀는 말에 대한 끔찍한 탑승감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처음 타면 근육통 때문에 고생하고, 오래타면 사타구니가 쓸려서 괴롭다던가, 의외로 허리가 아프다던가 하는 등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물론 드래곤인 레베카가 승마 때문에 아플 일이 있겠냐만은….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불편사항은 순전히 나를 위한 배려에서 나온 말이었다.

'헤으, 눈나가 너무 상냥해….'

나는 배려심 넘치는 파트너의 속마음를 이해하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문제인 게 아니라… 현실이 잘못된 것으로!

'이게 다 빌어먹을 중세배경 때문이야.'

문명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판타지 세계. 이 세계에 비행기는 커녕 자동차도 없었다.

하물며 잘 포장된 도로는 꿈과도 같은 단어였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의 사람들의 이동수단은 튼튼한 다리였다.

재산이 깨나 있는 사람만이 우마를 끌고 다녔다.

'결국 내가 기본이란 말이지.'

자기합리화를 마친 나를 보며 레베카가 살포시 미소를 띄웠다.

뭔가 장난스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피터, 그대는 의외로 순진하구나. '그 때'는 순수한 마을처녀처럼 굴더니. 지금은… 호의에 약한 소꼽친구 같단다."

뜬금없는 레베카의 비유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강조한 '그때'라는 과거적 표현은 내게 약점과도 같은 단어였다.

"아닌데요! 누가 순진해요? 거참, 저도 할 거 다 해봤거든요? 그, 그때는 맹약을 말로만 들어서… 잠깐 당황해서 놀란 것 뿐이고ㅡ"

나는 레베카가 나를 조리돌림 하려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급히 반박했다.

반면에,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는 나를 보면서 피식 웃던 레베카가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짐짓 우는 시늉을 했다.

"…그저 절차였을 뿐이니 질색하지 말거라. 너무 싫은 티를 내면 상처받지 않느냐?"

"아. 제발, 이제 안 속아요! …놀리지 좀 마시죠."

나는 레베카의 형편없는 우는 연기를 눈치채고 지친듯이 대꾸했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큭큭 웃는다.

"미안하구나. 그대의 반응이 즐거움을 준단다.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라서 말이지."

나는 웃고 있는 레베카가 멎쩍어서 뒤통수나 긁적였다.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감정이 느껴지니 뭐라하기 뭐했다.

그냥 이게 내 업보구나, 하고 그러려니 받아들이자.

아니… 솔직히 조금 억울하다.

먼저 들이박은 건 레베카였는데….

'그때 갑자기 훅 들어올 줄은 누가 알았냐고….'

나는 조금 괘씸한 마음에 레베카를 노려봤다.

변함없이 비현실적인 미모는 살짝 웃으니 더욱 치명적이었다.

과연…

이 세계도 예쁘면 용서가 되는,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요망한 도마뱀 같으니….

살포시 웃고 있는 얼굴의 레베카는 한결 여유로워보였다.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미쳐서 날뛰던 불안정한 모습이 아니었다.

빈껍떼기 같았던 그녀의 육신에는 조금씩 생기가 돌고 있었다.

나름 보기 좋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뭐 기운 차렸으면 됐나.'

쓸데없던 주둥이가 한 건 해낸 뒤부터,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처럼 레베카의 감정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약간의 배려와 즐거움, 호기심. 그리고 신뢰와 안심.

일말의 불안함이 남아있긴 하지만 당장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의 레베카는 안정되어 있다.

아마도 내 감정에 어느정도 영향을 받은 탓이리라.

'이게 맹약인가.'

나와 레베카는 지금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감정을 교류한다는 것은 의외로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단수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든한 안정감을 주었다.

공허한 드래곤과 나약한 인간을 이어주는 고대의 계약.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를 속일 수 없었다.

나의 정체를 그녀에게 설명할 수 없더라도, 나는 진심을 레베카에게 전할 수 있었다.

레베카는 온전하게 내 진심과 의지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맹약으로 하여금 복잡한 기싸움 없이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서로의 손을 잡고 가시밭길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나도 정상이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이 선택은 충동적이었다.

스스로도 이해불가한 감정의 격류에 의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지금에 와서 걱정과 후회가 안 든다면 거짓말이겠지만ㅡ

"피터, 피터…?"

내 손에 들어온 앙증맞은 온기가 열심히 나를 불렀다.

나는 지금껏 묵묵히 머나먼 길을 제 발로 걸어온 아이를 보았다.

그녀는 지치고 무미건조한 표정이었으나 눈동자만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응?"

"잠깐만."

내 허리에 간신히 닿는 작은 아이가 내 손을 밑으로 당겼다.

조그만한 게 힘이 쎄다.

대체 얼마나 거창한 것을 말하려고.

나는 피식 웃으며, 내게 자세를 낮추라고 요구하는 아이의 뜻을 따랐다.

내가 내린 첫번째 선택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간질거리는 소곤거림은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아줌마… 내가 혼내줄까…?)

생각보다 스케일이 너무 컸다.

나는 빵터져서 낄낄 웃으며 데이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촉감 좋은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하, 하지마…."

데이지는 나른한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소심하게 반항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데이지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다가 다시 정리해주었다.

'그냥 이게 더 나아.'

나는 나를 이들과 만나게 한 불가사의한 현상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서, 아니면 꿈, 또는 몇 억분의 우연….

무수히 많은 가정들을 떠올렸다가 지워버린다.

결론이 없는 고민을 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결국 그런 점에서 나는 무지렁이였다. 누가봐도 어리석은 사람.

하지만. 그런 나라도 한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었다.

나를 피터의 몸에 집어넣은 이 현상에서 어떠한 바람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상자를 열였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야, 나도 만지게 해줄래?"

"…싫어. 저리가."

내 곁에 티격태격거리는 여인과 꼬마가 있었다.

그들은 웃으며 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독자는 보고싶은 걸 봐야지….'

고로 마음에 들지 않는 원작을 부순다.

그래, 그 생각뿐이었다고 치자.

**

레베카의 딸, 레일라를 구하기 위해선 충분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특히나 우리는 우선적으로 연옥을 찾아야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내가 원작에서 본 지식만으로는, 제국의 특급비밀이 숨겨진 장소를 콕 집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하나만은 알지.'

'연옥'이 제국의 수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 나는 그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우리가 언제 연옥의 입구를 찾을 수 있을 지 미지수였다.

해츨링의 구출은 시간제한이 걸려있는 구출미션이었기에.

우리는 급하게 여정을 떠나야 했다.

비록 수도를 향해 가고는 있지만, 이대로 철옹성 같은 지옥에서 해츨링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륙 최강국이 상대라면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한수 접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바늘구멍 같은 틈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직은 잡히지 않았겠지.'

데이지가 13번째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아직 연옥에 도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연옥의 입구를 열어줄 조연.

동시에 연옥에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자.

'A­14.'

나는 속으로 그의 코드네임을 되새겼다.

훗날, 임펠타운 급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소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한 때 A­14가 만들어준 틈 덕분에 소녀는 잠깐이나마 새장 속을 벗어나 자유를 누렸다.

데이지가 용사가 아니게 된 이 세상에선 사라져버릴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주인공이 없더라도 연옥은 원작 그대로일 것이다.

애당초 지옥은 그녀가 도착하기 전부터 있었다.

원작 속 용사는 13번째였다.

그녀가 지옥에 도착하기 전에, 그녀보다 일찍 고통받던 12명이 있었다.

무려 12명의 아이들.

고문 당하고, 실험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나가던 불우한 생명.

데이지와의 차이점이라면 고작 내 손에 닿지 않았다는 것 뿐….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 아이들에 대한 생각은 의식적으로 밀어내버렸다.

이는 지극히 모순적이고 이기적인ㅡ

'아니, 지금은 아니야…!'

애써 생각을 떨쳐버렸다.

유감스럽게도 내 손은 무척 작았다.

눈앞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담는 것이 어려운 손이었다.

내겐 딴 생각을 해도 될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

.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에게 A­14는 열쇠다.

그를 이용해서 '연옥'을 찾고, 지옥문을 열어야한다.

"...얼마나 걸리겠니."

내 설명을 모두 들은 레베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어떠한 불신도 없이 나를 믿어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감정소모 없이 부족한 답안을 채워나갈 수 있다.

원작에서 A­14가 폭주하는 날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물음에 확답할 수 있었다.

"붉은 보름이 뜨는 날입니다."

"올해는 시기상 두어달뒤로구나. 지나친다면…."

작중에서 붉은 보름달은 격년으로돌아온다고 했다.

즉,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2년이란 세월을 다시금기다려야한다.

'원작의 전개는2년 뒤인가.'

원작의 흐름을 따른다면,

2년 뒤에 있을 A­14의 폭주를 기다리는 편이 구출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미 원작은 달라졌다.

그곳에는 있어야할 주인공이 없기에,내가 바꾸어버린 운명으로 인해서.

예정된 불행한 두 아이의 만남이 틀어져버렸다.

이로써A­14의 행동에도 변화가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원작대로 전개될 거라는 안일한생각은 버려야한다.

결국 이번 기회가 마지노선이라는 소리였다.

고작 조그만한 애 하나를 유괴했을 뿐인데, 그걸로난이도가 급증했다.

정말이지 불합리한 세상이다.

'뭐, 차라리 잘됐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덕분에 어느 모녀가 겪을 고통과 기다림을늘리지 않아도 된다.

'...조금고생하면 되겠지.'

다행스럽게도, 진정한용사인 데이지가 이 곳에 있는 한 해츨링은 무사할 것이다.

용의 피가 용사의 피를 일깨우는 각성제인 만큼. 제국 놈들이 해츨링을쉽게 처분할 리가 없었다.

내가 그 사실을 전했음에도 레베카는 우울해했다.

이는어쩔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자 재차 단언한다.

"반드시 만나게 해드릴게요. 레베카."

레베카는 입술을 꾹 깨물고, 반쯤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지었다.

"그래, 믿는다. 동반자여."

나는 다짐한다.

두 달 뒤.

억지로 웃는 여인이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이왕이면 넷이 모여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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