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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11화 (11/117)

〈 11화 〉 여로(2)

* * *

수도를 향해 걸음을 옮긴 지 4일째 되던 날.

나는 고작 4일 만에, 중세시대의 미개함에 탄식했다.

새삼스럽게 문명이라는 게 얼마나 편리했던 것인지 되돌아볼 수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봐도 현대사회에 숨겨진 기술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아오, 씁."

뾰족한 돌부리를 밟아버린 나는 고통을 참아야했다.

비포장된 산길을 조잡한 가죽신으로 4일 간 걸었더니, 진저리나던 전투화가 그리워졌다.

아니, 차라리 싸구려 운동화조차 간절했다.

광신도에게서 도망쳐야했을 때는 절박해서 미처 알지 못했다.

당연한 일상이라고 여겼던 신발은 과학기술의 결정체였다.

'망할, 발바닥 곱창났네….'

뾰족한 모양의 가죽신은 쿠션감이 전혀 없었다.

무겁고 질긴 가죽으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발의 모양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함 그 자체였다.

먼 길 가야하는데, 신발이 이 모양이니 발바닥이 비명을 질러댔다.

차라리 군대에서 행군하는 게 편할 것 같았다.

벌써부터 현대 사회가 눈물나게 그리웠다.

그러나…

이제 익숙해져야하는 내 현실이다.

"피터, 많이 아파?"

내 허리 언저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나를 올려다 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걱정스러운 빛을 내었다.

"응? 제가요? 설마 그럴리가."

"아핳, 간지러워…!"

그녀의 머리는 손을 올려두기 딱 알맞은 높이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살살 빗어주니 데이지가 꺄르륵 비명을 질렀다.

녀석은 내 악마같은 손가락 빗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도도 달아났다.

과연, 젊은 녀석이라 그런 지 체력이 남아도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할만해.'

나보다 한참이나 작은 어린애도 불평없이 제 발로 걷고 있었다.

내가 앓는 소리를 내기에는 일러도 너무 이르다

"조금만 더 힘내렴. 이제 곧 도착할 거란다."

지친 상태로 반성하고 있는 내게 레베카가 위로의 말을 보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망… 그 말이 벌써 4번째입니다만…?'

천년을 넘게 산 용과 50년도 살지 못한 직장인의 시간개념은 천지차이였다.

레베카에게 4일은 4시간쯤 되는 모양이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장 바닥에 뒹구르고 떼쓰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이는 어린애 앞에서 냉수먹기 힘든 어른의 고단함이었다.

'시부럴, 내 발을 부순 제국… 언젠간 부숴주마….'

제국은 제국이라는 거창한 이름답게 지독하게도 넓었다.

기본적으로 다른 도시로 넘어가려면 며칠 단위를 너끈히 잡아야했다.

레베카의 말에 의하면, 고작 이동하는데 한달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이게 아직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였다.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 세계는 넓어도 너무 넓었다.

'자동차, KTX, 비행기… 하다못해 자전거….'

하루만에 수백킬로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발명이었다.

…그런 과학기술조차 없는 미개한 중세 판타지에 로망은 없….

'…진 않나.'

나는 인정할 건 인정하는 성격이다.

4일 간의 경험으로 이 세계에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이유를 조금 납득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세계에도 로망이 있었다.

내가 10년 넘게 소설을 들여다보며 열망했던 것.

나는 판타지의 결정체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베카는 괜찮아요? 어제도 마법 많이 쓰셨잖아요."

"흠, 그 정도로 피곤이라?"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의 미녀가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레베카의 살 떨리는 아름다움도 일종의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일단 그것 말고.

이 세계에는 현대사회에는 존재하지 없는 법칙이 존재했다.

다름이 아니다.

'마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초자연적인 힘.

'마나'라는 것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ㅡ

[과학기술? 문명? 깝치지마. 만능 마법이 있는데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웬만한 게 '마법'이라는 마법의 단어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마법으로 불도 피우고, 물도 만들어낼 수 있으며, 능력이 허락하면 거리마저 초월할 수 있다.

거기에 물건을 공중에 띄우거나, 사람을 손쉽게 죽이거나 살릴 수도 있다.

그야말로 미친 듯한 효용성.

…세계관이 로맨스 판타지가 아니랄까봐, 마법이라는 설정으로 핍진성을 쉽게 떼워버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도 '마법'은 중세 시대에 더없이 잘 맞아 떨어지는 설정이었다.

'솔직히 이해는 가.'

마법은 그 이름처럼 마법 같은 현상이었다.

이는 사람의 인지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여 벌어지는 신비였다.

나도 레베카가 펼치는 마법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상에… 뭐 이런 사기적인 게 있냐고 반박하고 싶었다.

레베카의 손짓 한 번에 집이 아공간으로 사라진다.

전이마법 한번으로 몇 달이 넘게 걸렸을 여정이 일주일 내로 바짝 줄어들어 버렸다.

그 이치를 파악할 수 없는 편리성은 과학기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눈앞에서 보고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사실 납득이 안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제 손에서 불이 튀어나오는 것 정도는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솔직히 편리하니 뭐든 좋았다.

"그대는 참 생각이 많구나. 내 걱정을 다 해주는 거니?"

나른하게 운을 띄우는 레베카의 눈은 곱게 휘어있었다.

…치명적인 눈웃음이다.레베카가 내 반쪽 같은 느낌과 별개로.

판타지 속의 비현실적인 외모는 여러모로 심장에 좋지 않았다.

"아, 네, 뭐. 당, 당연하죠?"

여동생의 말이 맞았다.

눈웃음 치는 여자는 하나같이 요물이다.

천년 묶은 드래곤이 내게 바짝 몸을 붙인다.

나는 그녀에게서 짙은 장미향과희미한 장난기를 느꼈다.

이 여자가 나를 골리려는 게 분명했다.

"그럼, 이번에도 맛있는 식사. 기대해도 될까?"

레베카는 입술을 살짝 핥으며 속삭였다.

나는 자뭇 태연하게 '재료만 제공해주면 얼마든지'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기랄. 그 때부터 정말 너무 하네.'

내 것이 아닌 게 분명한 즐거운 감정이 얄미웠다.

내가 틈을 보일 때마다 장난치는 게 아주 요오망하다.

어떻게 반격해야할 지 고민하는 찰나에ㅡ

"저리가! 떨어져. 불편해."

갑자기 아래층에게 항의가 들어왔다.

얘는 언제 돌아왔는지, 내 허리춤에 매미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빼애액 울어대는 데이지의 새하얀 얼굴에 심통이 가득했다.

"미안하구나. 이제 되었니?"

적의를 드러내는 데이지에게, 언제나처럼 레베카가 한 수 져주었다.

그녀는 투정부리는 데이지가 귀엽다는 듯이 은은한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흥!"

데이지는 레베카에게서 고개를 홱 돌리며 그저 내 옷을 꾹 쥐었다.

덕분에 걷는 게 불편해졌지만, 나는 한창 어리광 부릴 나이인 데이지에게 순순히 옷을 내주었다.

주름이 꾸깃 잡혔지만… 이 정도면 값싼 희생이다.

"피터, 피터."

"응?"

레베카를 쫓아낸 데이지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내게 고개를 낮추라고 손짓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익숙하게 자세를 낮춰주었다.

그러자 데이지가 손으로 입을 감싸며 귀에 대고 속삭인다.

"···저번에, 하얗고 몽글한 거."

"아, 스튜요?"

"응응! 스투으. 맛있었어···!"

"아하."

엊그제였던가?

우유가 있길래 만들어 본 하얀 스튜가 데이지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레베카의 말을 듣고서 또 먹고 싶었던 눈치였다.

이게 뭐 그리 거창한 비밀이라고,

귓속말까지 해야했던 어린애의 엉뚱함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럼 오늘 저녁은 스튜로 하죠. 고기도 듬뿍 넣어서."

"응···! 고기 듬뿍!"

데이지가 환하게 입을 열자, 침이 살짝 흘러내렸다.

으이구, 나는 얼른 소매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내게 얼굴이 문질러진 데이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둥글게 뜬다.

"풉."

아이의 벙찐 얼굴을 보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키히힛…."

내가 웃기 시작하자, 내게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덩달아 데이지도 꺄르륵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재밌니?"

두 인간에게서 소외당한 드래곤이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표했다.

***

데이지는 바라마지 않던 하얀 스튜를 3그릇이나 비우고서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배가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아서 제법 웃겼다.

"…으, 몽글…."

누가 업어가도 모를 데이지는 레베카의 품에 안겨있었다.

눈을 뜨면 레베카에게 항상 틱틱거리는 데이지였지만, 잘 때만큼은 레베카에게 무척 후한 편이었다.

'뭔가 모녀 같네.'

나는 훈훈한 풍경을 보며, 딱딱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모닥불에 장작을 짚어넣었다.

곧이어 타들어가는 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닥불을 피우는 이 시간만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한 무수한 빛이 뇌리에 새겨진다.

'별이 쓰레기보다 많다···.'

이 세계의 밤하늘이 무척 짙고 선명했다.

전기가 없어서 그런 지 이 곳의 별은 원래 세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반짝거렸다.

마치 보석을 있는대로 때려박은 듯한 호화스러움이었다.

폴라네타리움으로 감상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다.

내가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명 받을 광경이었으리라.

그만큼 감동적인 절경이었다.

내 생에 실제로 웅장한 은하수를 보게 될 날이 있을 줄 몰랐다.

이걸 감개무량하다고 해야할지···.

별자리 정도는 원래 세계의 것과 같으려나?

별자리를 외울 정도로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만….

'역시 세계가 다르다는 걸까.'

이 곳은 영문도 모른 채로 도달한 리얼 판타지 세계였다.

새롭게 시작된 내 삶이 이어질 장소.

나는 한동안 여기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만큼 앞으로 내게 닥칠미래를 잠깐 상상해보았다.

활자로 엿보았던 이 세계에는 초자연적인 것이 즐비했다.

흔히 정령이나 신으로 불리는 존재가 있으며, 몬스터니 마수니 하는 괴물들도 있었다.

덧붙여 판타지답게도 종족도 무척 다양해서 엘프나 드워프 등은 기본 옵션이다.

원작에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잘 찾아보면 고양이귀 미소녀까지 있을 지도 모르는 세계였다.

'아주 그냥 희망과 로망이 샘솟네.'

아마도 내게 무척 불친절한 세계라고 생각된다.

고작 모닥불 하나도 피우기 힘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넘쳐났다.

…그런 점에서 모닥불은 참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피터로서 눈뜨자마자 마주한 것도 모닥불이오.

내게 불피우기가 더럽게 힘들고, 꺼지기는 오지게 쉽다는 세상의 쓴맛을 알려주었다.

항상 어둠 속에서 사람을 지켜주었던 것은 불이다.

우연의 일치로 몹쓸 나를 세상에서 지켜주는 것도 불과 꼭 닮은 붉은색이었다.

'새벽 감수성 오지네.'

하긴. 모닥불과 새벽은 언제나 쓸데없는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였다.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른한 목소리가 나를 향한다.

"내가 지켜볼테니 편히 쉬려무나.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그녀는 겉보기에는 가녀리지만,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불길이었다.

감히 나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존재.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람.

"옳지. 잘 자렴."

항상 고민 때문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지만.

그녀의 한마디에 안심하고 뻗어버리는 내가 한심하지만.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갔다.

****

흔히 소설이나 만화에서, 주인공이 여행하는 도중에 무조건적으로 만나는 존재가 있다.

무협에서는 녹림. 다른 말로 산적.

판타지에서는 노상강도, 또는 몬스터.

길가다가 갑자기 덮쳐온다는 점은 무척 흔해빠진 클리셰였지만.

그만큼이나 사골로 자주 쓰이는 이벤트였다…!

나는 약탈자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을 하며 여행하는 내내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제국의 수도가 보이는 거리에 도달했음에도 그런 불한당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약탈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고라니처럼 생긴 들짐승 때문에 이따금 놀랄 뿐이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심했으나, 동시에 뭔가 김이 샌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여기까지 오면서, 데이지와 레베카에게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도적이 나타날 거다'라고 호언장담했던 터라 민망하기까지 했다.

'이걸 안 오네?'

쪽팔린 나는 직무를 유기한 삼류 조연들을 탓했다.

할 말 많았지만 말할 수 없었던 나는 레베카에게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수도 근처에서 노략질할 정도로 간덩이 부은 인간은커녕 몬스터도 없단다. 이거 상식이란다."

레베카는 드물게 나를 놀리지 않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루비색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짠맛 때문에 내 귀가 새빨개졌다.

어쩐지 내가 상식이 결여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괜찮아. 나도 몰랐어!"

다행히 데이지도 모른단다.

퍽이나 고맙다?

나는 창피한 대화의 주제를 돌리고자, 황급히 수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거의 도착했는데 저희 신분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레베카가 해결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제국의 심장부가 수도인 만큼, 수도는 나름대로 철저한 방비를 갖추고 있었다.

소드 익스퍼트 급의 실력자가 수시로 순찰을 돈다는 재능 낭비는 기본 사항이었다.

더군다나 레베카의 말로는 수도는 보이지 않는 결계가 쳐져 있다고 한다.

억지로 전이마법으로 진입했다가는 사지의 일부가 없어질 수 있다나···.

결국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정문을 통해서 가야만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피터는 화전민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신분패가 없었고, 데이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원래 같았으면 불법체류자나 다름 없는 우리 둘에게 수도란 반드시 멀어져야할 곳이었다.

'레베카의 딸만 아니었으면···.'

어쨌든 와야만하는 이유가 있었고, 이미 도착해버렸다.

이제와서 무를 수 없는 노릇이다.

방법이 있다는 레베카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렴. 이 몸이 누구라고 생각하니?"

레베카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웠다.

""??""

나와 데이지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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