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여로(3)
* * *
짜잔~!
레베에몽은 품 속에서 황금패를 꺼내들었다.
그게 뭔지 물어봐주길 원하는 눈치였다.
"그게 뭔데요?"
"후후···."
드래곤은 아련한 눈을 하며 황금패를 쓸었다.
그녀가 꺼낸 패는 똬리를 틀고 있는 용이 새겨진 주먹만한 크기였다.
척보기에도 고풍스러운 예술품처럼 보이는 물건이다.
그 쓰임새를 알 수 없었지만, 언뜻봐도 겁나게 비싸보였다.
"내가 젊을··· 아니. 유희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둔 가문의 패란다. 나름대로 유서깊은 가문의 것이니, 명확한 증명이 되어줄 게다. 문지기 따위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테지."
짝짝짝.
나는 호언장담하는 레베카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런 나를 따라서 데이지도 조그만한 손뼉을 마주쳤다.
진구에게 파란색 로봇 너구리가 있다면, 우리에겐 빨간색 용가리 누나가 있었다.
'과연 몇 천살···.'
연륜이 넘쳐나는 그녀는 준비된 드래곤이었다.
하긴, 허공에서 집도 꺼내는 마당에 그깟 신분패가 없을까.
···그나저나.
신분패에는 유통기한이 없나? 레베카가 젊을 적이면 대체 얼마나ㅡ
"······뭔가 불쾌하구나."
"기분 탓입니다···! 그, 그나저나 저희는 어떻게 해요?"
레베카가 째려보길래, 나는 냉큼 데이지를 안아든 채로 말을 돌렸다.
내가 데이지로 그녀의 시선을 가렸더니, 레베카가 혀를 세게 차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쯧, 됐다. 이거 하나면 충분해. 그대들은 내 가문의 인원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니? 그 아이는 내 딸이라고 하자꾸나."
그리 말하며 레베카는 아공간에서 갖가지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종류도 모양도 다양한 옷들로 작은 산이 만들어진다.
하나같이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장식이 달려있는 옷이었다.
나는 남자옷에 달려있는 프릴에 치를 떨면서 레베카에게 물었다.
"데이지를 레베카의 딸이라고 치면. 저는요?"
"흐음···."
레베카는 작게 코를 울리더니, 새초롬히 나를 보았다.
그녀가 입가를 살짝 치켜올린 채 말한다.
"그래, 그대는 내 무엇이 되고 싶으냐?"
"예?"
"어디 한번 편하게 말해보렴. 그대가 원하는대로 부를 수 있는 기회란다. 아니면, 저번에 그걸로 하겠니?"
레베카는 작은 반달을 그린 눈으로 나를 들여다봤다.
날이 갈수록 레베카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 같이 행동한다.
나를 놀리는 게 지상최대의 즐거움이라는 듯한 감정이 느껴져서 고개가 저절로 저어졌다.
'늙으면 어려진다더니···.'
나이먹고 주책인 드래곤은 기어이 뇌절을 했다.
···어쩌면 이게 맹약의 부작용일지도 모르겠다.
긴 세월을 무료하게 지내야했던 레베카에게 인간의 감정이란 무척 신선한 자극이겠지.
뭔가 드래곤에게 허락된 유일한 마약같다.
'······그동안 심심했다더니, 이젠 아주 신나셨구만.'
그래, 니가 재밌으면 된 거죠.
나는 즐거워 보이는 레베카에게 그러려니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와 첫만남을 떠올린다. 이것 또한 그 삼류 연극의 연장선이었다.
나는 애써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한다.
"예예··· 그러면 뭐, 제가 레베카를 '여보'라고 부르면 될까요? 아니면 부인? 편하게 자기야?"
"······."
내가 자포자기로 툭 던진 말에, 레베카가 일순간 멍하게 입을 벌렸다.
잠깐 얼었다가 해동된 그녀가 우물쭈물거린다.
"···그대는 하인이나 하려무나···."
이윽고 레베카는 토라진 것처럼 웅얼거렸다.
말을 마치자마자 샐쭉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린다.
···기껏 맞춰줬더니, 어르신은 내 반응이 성에 안 차는 모양이었다.
쯧, 변덕스러운 도마뱀 같으니.
그나마 느껴지는 감정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발닦개도 쉴 땐 쉬어야지.'
콕. 콕.
뭔가가 내 뺨을 콕콕 찔러댔다.
작고 부드러운 감촉에 눈알을 굴린다.
"풉."
내게 안겨있는 데이지가 뭔가 재밌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풀린 볼따구에 심술이 가득했다.
얘가 왜 이럴까?
혼자보기 아까울 정도로 재밌었지만, 궁금했기에 눈만 크게 떠주었다.
그러자 데이지가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피터는 피터야. 다른 게 아니야."
'피터는 피터일 뿐이라···.'
뭔가 있어보이는 말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피터도 내 이름이 아니거든?
얘가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름이 아닌 데이지 선생의 금쪽 같은 어록이다.
그냥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
수도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 남짓한 거리에서 우리는 꽃단장을 했다. 앞으로 꽃길을 걷기 위해서.
파아앗.
어느 열혈팬의 요청에 의해서,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쓴 데이지가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자, 하늘하늘한 순백의 원피스가 풍성하게 나부꼈다.
마치 새하얀 꽃이 만개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와아! 이게 누구야! 어디 사는 공주님이야!"
나는 박수치며 환호성을 내뱉었다.
진심.
많고 많은 꼬꼬마 중에서 데이지가 제일 귀여운 것 같았다.
오빠에게 반말하는 어떤 망나니의 어릴 시절과는 감히 비교도 안된다.
역시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인가··· 데이지에게서 경국지색의 싹이 엿보였다.
"······아, 아냐."
삼촌팬의 과한 칭찬이 부끄러운 듯이 데이지가 모자를 눌러썼다.
얼굴을 감추려고 애쓰는 태도가 귀여웠기에 좀 더 칭찬으로 혼내주기로 했다.
"음, 아닌가? 하긴 공주님은 아니겠네요···."
"······치."
긍정하는 내 말에 데이지가 작게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데이지의 뺨을 살짝 꼬집어주며 말한다.
"이 나라 공주님보다 데이지가 훨씬 더 예쁜 걸요?"
"···?!"
내 말에 데이지가 일순간 벙찐 얼굴로 있다가, 이윽고 감추지 못하고 헤실 웃고 말았다.
제법 환한 미소였으나, 역시 부끄러운 모양인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피터도 멋있어."
가는 말이 칭찬일변도였던 만큼, 그 대가도 훈훈했다.
"고마워요."
나는 데이지의 수줍은 칭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름 옷을 갈아입은 보람이 있었다.
장식이 없는 무난한 검은색 옷이었지만, 하인 신분에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눈꼴시리구나. 언제까지 이럴거니? 곧 해가 질 거 같구나."
눈치 없는 어르신이 토라진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외당한 어르신의 투정이었다.
"슬슬 출발할까요? 쥔님?"
나는 심기불편한 레베카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연극에 들어가기 전에 합을 맞추는 건 중요한 일이다.
"···가자꾸나, 집사."
'애 딸린 부부사이'와 '마님과 돌쇠'에서 고민하던 우리는 '애 딸린 부부사이'가 연기하기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안주인과 집사라는 수직 관계를 채택해야만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 3자의 극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싫어···! 피터는 피터야! 아줌마는, ···우리 엄마가 아냐! 흑···.
데이지가 죽어도 우리를 엄빠라고 부르기 싫다고 드물게 고집을 부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상처 받는구나."
레베카는 살짝 충격받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데이지를 예뻐하는 만큼, 데이지에게 거부받은 게 실망스러울 만했다.
그래도 얘가 싫다는 데 어쩔 수 없지.
아쉬운 일이지만 존중해줘야한다.
'음···?'
한편,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레베카가 데이지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레베카는 양손에 사탕을 든 채로 데이지를 유혹하려했다.
이건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얘야? 여기 맛있는 당과가 있단다. 어떠니? 한 번만 엄마라고ㅡ"
그러나, 데이지는 현명한 어린이였다.
음흉한 드래곤이 주는 사탕따위에 넘어가지 않는다.
"시, 시러···! 안 먹을래···. 아줌마는 저리가."
레베카는 난감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이윽고 목소리를 내리깐다.
"···아이야. 선택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단다. 지금이라도ㅡ"
이 옹졸한 드래곤이 애한테 겁이라도 주려는 모양이었다···.
허나, 어린 용사는 너무나도 굳건했다.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녀는 내가 이전에 알려준 대로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했다.
"어휴, 알아써. 입 꾹 할게"
지이익.
"크큭···!"
단호박인 데이지와 애한테 물 먹은 드래곤의 모습은 퍽 유쾌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서 낄낄거리고 말았다.
"뭐가 그리도 재밌느냐? 진짜로 우스운 게 뭔지 보고 싶지 않니?"
이런.
레베카는 데이지에게 바람 맞아놓고, 괜히 나를 째려봤다.
귀여움도, 힘도 없는 가엾은 피터···.
나는 드래곤의 분노 앞에 쭈그리처럼 바가지 긁힐 수밖에 없었다···.
***
"와··· 미친."
외벽에 도착한 내가 감탄을 넘어 질려버린 목소리를 내었다.
멀리서봐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가까워지면서 보이는 성벽의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좌우로 아무리 눈을 굴리고 굴려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회색의 장벽이다.
끝없이 이어진 회색선은 일정하고 정밀하게 쌓여 있었다.
10미터를 너끈히 넘는 높이를 생각하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노동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내가 '미쳤다'고 질색한 대상은 웅장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하물며 두 개의 뾰족한 첨탑 사이에 자리잡은 거대한 철문도 아니다.
"···토할 거 같애."
가발을 뒤집어 쓴 데이지가 괴로운 듯이 속삭였다.
나도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여린 등을 토닥여주었다.
나와 데이지를 질리게 만든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무수히 많은 인파가 있었다.
개미가 줄을 이은 것처럼 시커먼 행렬이 길게도 뻗어 있다.
그 까마득한 인파는 지긋지긋하게도 많아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지치게 만든 것은 수 천명이 넘는 인간들이 뿜어내는 칙칙함이었다.
어딘가 암울한 표정과 근심 가득한 시선, 그리고 신경을 갉아먹는 웅성거림.
대체적으로 사람을 우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이 줄을 채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일상적인 풍경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슨 날이에요?"
나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레베카에게 물어봤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저 앞 너머를 바라봤다.
"···날이라기 보다는 저들 때문이구나."
레베카는 길쭉한 손가락을 뻗어서 한쪽 무리를 가르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서 눈을 가늘게 뜬다.
저멀리서 정체된 것처럼 느릿하게 이동하는 수 백개의 수레가 보인다.
수레?
나는 좀 더 집중해서 관찰했다.
수레 위에 뭔가가 얹혀져 있었다. 단순한 짐은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는 정육면체였다. 뭔가 검은 창살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결국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쾌한 예감이 들었다.
"저게 뭐죠?"
"글쎄···. 어딘가 손속이 지독한 인간들이 전쟁이라도 벌인 것 같구나. 상당한 물량이다. 쯧, 대부분 핏덩이구나···. 실로 악취미다."
레베카는 한숨처럼 말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나는 덜컥 다가온 무거운 현실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저 수레 안에 사람이 가축처럼 운반되고 있는 셈이었다.
새삼스럽게 이 곳이 단순히 낭만이 넘치는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와닿았다.
이 놈의 세상은 합법적인 노예가 존재하는 거지같은 세계였다.
'A14도 저기 있을까···.'
나는 비로소 저 수레의 정체를 깨달았다.
잠깐 잊고 있었던 메인스트림. 비극의 서막이었다.
수레 속에 갇힌 이들은 희생양이다.
썩어 문드러진 제국에 의해 희생될 죄 없는 어린양이었다.
'이봐요, 빛의 여신님. 당신은 정말 몰랐어?'
그대의 같잖은 자비심이 누군가의 지옥을 만들어냈다고.
'아니… 원작자의 잘못인가…?'
뭐가 되었든.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결국 이 세계에서도, 나는 무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신이란 존재는 없으니만 못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