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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13화 (13/117)

〈 13화 〉 바람꽃(1)

* * *

석양이 지고 점점 푸르스름함이 늘어난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계는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대로 세상에 우리만 남는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화르륵.

그러나, 어둠 속에서 하나둘씩 불꽃이 피어오른다.

드문드문하던 광원은 경쟁하듯 반짝이며 하나의 선을 그렸다.

이윽고 끊어진 빛은 연결되어,기나긴 여정을 알려준다.

마치 촛불로 이루어진 강을 보는 것 같아서나름대로 운치있는 광경이었다.

다만…그 불똥 중 하나가 된 입장에서는 그저 비극에 지나지 않았다.

"피터…아직도 많아… 우리 언제가…?"

저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본 데이지는 질린 목소리를 냈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마주한 아이는 드물게 칭얼거렸다.

좀처럼 칭얼거리지 않는 아이가 우리 데이지다.

그런 착한 어린이가 기다리다 못해서 성낼 정도였다.이건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은 셈이다.

"그러게요……."

실제로도 우리는 거의 6시간을 넘게 기다렸다.그럼에도…행렬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급기야 야밤이 다 되어감에도 아직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쯧, 군바리 새끼들이 빠져가지고…일처리가 아주 개판이야.'

역시 감수성이 부족한 중세시대의 군인이라서 그런지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고객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면, 그깟 검문 정도는 좀 대충해줄 수도 있지.

망할 놈의 경비병에게 대한민국 군인들을 본받으라고 조언해주고 싶었다.

"흠, 곧 문을 닫을 모양이구나. 주변이 어수선하다."

내가 속으로 구시렁거릴 때, 레베카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둠 속을 꿰뚫어보고, 몽골인 뺨치는 시력을 가진 그녀의 말이다.

레베카가 쓸데없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으니 진실이겠지….

'결국 공쳤나'

나는 허탈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레베카가 만능이라고 자부하던 황금패조차 쓸 기회가 없었다.

절대적인 타켓팅 스킬도 눈앞에 대상이 있어야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다.

"그럼, 어쩌죠? 성문 앞까지 날아가면 역시 눈에 띄겠죠?"

"아무래도. 인간 마법사는 영 시원찮으니, 날았다간 소란이 일겠지."

제국의 치부를 털어야하는 우리가 그들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나 지금은 그들이 인재에 욕심이 많을 시기였다. 하늘을 나는수준의 마법사에게는 반드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오늘까지 야영하고 내일 다시 올까요? 더이상 기다려봐야 시간 낭비 같은데."

"그러자꾸나. 그대도, 아이도 곤해 보인단다."

지금은 마땅히 방법이 없었기에 작전상 후퇴하기로 했다.

나는 축 늘어진 데이지를 안아들고,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남겼다.

"데이지, 조금만 더 힘내요. 우리는 이 세상의 굴레와 속박를 벗어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요."

"…어. 으응? 국, 박?"

가엾게도.

데이지는 많이 지친 모양인지 내가 친 대사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게다가 배가 고픈지 뭔가 국밥을 찾아댄다.

"음. 오늘 저녁은 국밥으로 가죠. 뭐 쌀은 없지만."

밥 없는 국밥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찰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더이상 지체해버리면 야영준비하는 것도 빠듯할 것이다.

우리는 갑갑한 행렬을 빠져나왔다.

행렬을 이루고 있던 불빛들이 삼삼오오 흩어지는 게 보였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나는 바퀴벌레처럼 흩어지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빨리 걸어! 망할, 너희들 때문에 늦어지는거 아니야!

­아아악! 아파, 죄송해요. 흐으, 엄마….

어스름 속에서는 고함소리와 가냘픈 비명소리가 들렸다.

짜증 섞인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왜 다른 사람의 목에 사슬을 달고 다니는 걸까.

채찍질로 상처입히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걸까.

보고 싶지도, 보여주고 싶지도 않은 현실이다.

벌어지는 만행을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제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 방관자 사이에 나도 껴있었기에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

반나절 내내 마음을 무겁했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어쩌면.품 속에서 떨고 있는 아이를 괴롭히던 것은 기다림이 아닐지도 모른다.

"데이지. 이번에 브레맨 특공대가 악당돼지를 파멸시키고, 친구들을 구출하는 이야기예요."

나는 괜찮다는 가벼운 말보다, 그저 실 없는 헛소리를 늘어놓기로 했다.

반나절 내내 떠들어서 입이 뻐근했지만, 독서 10년치 내공은 어디 가지 않는다.

"……?"

웹소설식 사이다를 잔뜩 먹여놓은 데이지의 떨림이 잠깐 멈춘다.

이미 이야기에 중독 되어버린 그녀는 내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윽고 데이지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음악…대, 아냐?"

"잠깐 전향했어요. 음악으로 먹고 살려니깐 세상이 좀 퍽퍽해서. 복수하고 본업으로 갈 거예요. 시작할까요?"

"응…!"

4마리의 동물친구들은 못된 돼지를 소세지로 만들고, 각자의 히로인을 구원한다.

그 후, 세상은 구하지 않고, 다시 모여서 음악이나 하러 간다.

굳이 거창하게 세상을 구해야할 필요는 없다.

경험상 그런 게 없어도 잘 굴러가던 게 세상이었다.

그녀는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으면 된다.

내 지리멸렬한 이야기의 가치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

**

수도에 도착하고도 노숙을 하게 되었다.

레베카의 만능 마법 덕분에 야영하는 게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동시에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시구경 해보나 했더니.'

일주일 가까이 산과 나무만 보았더니 조금 질리는 감이 있다.

콘크리트 숲 속에서 뛰어놀던 나로서는 자연보다는 삭막한 도시가 그리웠다.

"킁킁."

그러거나 말거나.

시골소녀에게는 지금 어디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데이지에게중요한 건모닥불 위에서 사이좋게 익어가는 토끼 가족의 그을린 몸이었다.

그것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풀 사이를 깡총깡총 뛰어다니던 앙증맞은 토끼. 그것도 세 마리지요.

­피터여, 저녁거리란다.

­와아, 토끼다!

나는 레베카가 눈치없이 토끼 가족을 잡아왔을 때, 좋아라하는 데이지를 보고 조금 식겁했다.

어린애 앞에서 귀여운 토끼 씨가 고깃덩어리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좀 그랬다….

'완전 동심파괴 아녀.'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시골소녀는 터프했다.

­피터, 얘도 고기지? 맛있어?

데이지는 베어그릴스가 칭찬할 영재소녀였다.

앙증맞은 토끼조차 그녀에게 단백질에 지나지 않는다.

­지르륵.

"마시게따…."

기름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고기는 환상적이었다.

역시 캠핑의 꽃은 바베큐다.

남자는그런 바베큐를 구울 때야말로 가장 빛나는 법이고.

그러나 내가 고기를 백날 구워봐야, 데이지의 눈은 한번도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요란하게 향신료를 뿌려댔음에도, 그녀는 요염한 토끼의 맨몸을 홀린 것처럼 바라보았다.

'토끼보다 못한 남자….'

일일 요리사로서 내 요리에 관심을 가져주는 건 뿌듯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에겐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으니 조금 섭섭했다.

"쯧쯧, 그 귀한 걸 아까운 줄 모르고 낭비하는구나. 그 쪽 고기가 탄다. 한 번 뒤집거라."

미식에 조예가 있는 듯한 레베카는 요리할 때면 옆에서 훈수를 뒀다.

막상 예리한 척 조언하지만.그녀의 조언은 언제나 고기를 뒤집으라는 말뿐이다.

'피터만 일해야하는 이 편한 세상.'

피터는 요리하고, 레베카는 거들먹거리며, 데이지는 춤추고…침을 삼킨다.

오늘도 완벽한 밤이 무르익어 간다.

**

사이좋게 하나씩 고기를 뜯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 때 토끼였던 것은 금세 뼈만 남아서 3마리 모두 사이좋게 뒤섞였다.

나는 그 뼈를 보며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철학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ㅡ 유투브 알고리즘에 의해서 보았던 호주청년의 토끼해체쇼가 삶에 도움이 될 줄이야….

'고마워요, 백형…!'

토끼를 잡아먹었다는 죄책감보다 배부름에 의한 만족감이 컸다.

나는 배를 두드리며 찾아오는 식곤증에 하품한다.

"하~아슈움……."

그러자 내 옆에 기대어 있던 데이지도 묘한 하품을 했다.

나는 그녀의 특이한 하품에 전염되듯이 크게 입을 벌렸다.

"적당히 하고 자렴."

나와 데이지가 경쟁하듯이 하품을 해대자 레베카가 잔소리 했다.

하긴 하루종일 고생도 했고, 저녁도 먹었고,거기에 달님마저 떴으니 꿀잠 잘 시간이긴 했다.

이미 모포마저 깔아둔 상태였으니 눕기만 하면 된다.

영특한 데이지도 그 사실을 아는지, 쪼르르 달려가 풀썩 누워서 제자리를 선점했다.

그리고는 내게 오라는 듯이 손짓하며 신난 목소리를 내었다.

"신데렐라는 소드마스터!"

꼬마는 나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반쯤 감겨있던 자수성 같은 눈동자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몹시 졸렸지만, 꼬꼬마는 내가 한 소절 꺾을 때까지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분위기였다.

'이게 업보인가.'

데이지는 내가동화를 파쿠리해서 만든 웹소설이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그녀가 잠들기 전마다 들려줬더니, 언젠가부터 알아서 유료결제까지 했다.

"그 다음은 푼젤이로."

은근슬쩍 용누나도 끼어들면서 의견을 피력했다.

레베카는 내가 짜낸 사이다식 웹소설보다는 디즈니 식 이야기를 선호했다.

'어휴, 입이 방정이지'

문명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이 세계는 오락이나 즐길 거리는 얼마 없었다.

그런 만큼,데이지와 레베카는 특이점에서 찾아온 내 이야기가 흥미로웠던 것 같다.

남이 만들어둔 이야기를 풀어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이러다가 내가 이 세계의 제 2의 디즈니가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하루종일 떠들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편하게 쉬고 싶었다.

더군다나…데이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요것봐라?'

내가 고민하는 듯하자, 데이지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뭔가 수상쩍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그걸' 시킬 걸 알고 있음에도, 영리한 데이지가 모포에 누워버린 것부터 이상했다.

깨달았다.이건 하기 싫은 것을 어물쩍 넘어가기 위한 꼬맹이의 작은 모략이다.

나는 피도 눈물도 많지만 어른이었다.

자고로 어른은 어린애의 약삭빠른꾀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전에."

나는 모포 속에서 눈만 내민 데이지에게 씩 웃어주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데이지. 이 닦으러 가야죠?"

"으, 피터어,꼭 해야돼… 안 해도 되는데?"

"응, 해야돼. 누런니, 입냄새, 충치 극혐."

"으으…."

내가 들고 있는 숯을 보며 꼬마가 우울한 얼굴로 주섬주섬 일어났다.

무던한 데이지조차 양치질은 질색인 듯했다.

역시 만국공통으로 꼬맹이에게 양치질이란 원수나 다름없나 보다.

그래도 어쩌겠니? 나중에 누런니로 살고 싶지 않으면 해야지.

나 또한 거슬한 숯을 입에 머금고 양치를 했다.

"레헤하도 하히래요? 해훈해요."

나는 우리를 멀뚱하게 지켜보는 레베카가 심심해보여서, 그녀에게도 숯을 권해 주었다.

"아니… 많이 하렴."

레베카는 내 입 쪽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양치하기 싫은 것은 애나 어른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

이를 닦고 삐친 데이지가 먼저 잠자리 누웠고.

나도 드디어 쉬는구나, 하고 긴장을 풀 때였다.

­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뾰족한 목소리를 보아서 썩 유쾌한 일이 아닐 것 같았다.

혹시나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이따금 급박한 목소리가 근방에서 들렸다.

뭔가 성가실 것 같은 예감에 나서기 전에 레베카에게 의견을 구했다.

"들었어요?"

"그래, 들리더구나. 멀지 않은 곳이다."

레베카는 붉게 빛나는 눈으로 어둠 저편을 노려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녀의 미간을 좁혀져 있었다.

"가보는 게 좋을까요?"

"…가지 않으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구나."

레베카는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고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의 그늘진 표정이 불안했기에 따라 일어섰다.

"같이 가요."

"……."

레베카가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들여다봤다. 나도 그만큼 또렷하게 마주본다.

짧은 침묵 끝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네! 그럼 갈… 어?"

내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갑자기 세상이 기울었다.

다리가 붕뜨고, 등쪽과 허벅다리 사이에 부드러운 게 닿는다.

"가볍구나. 그대도 아이에게 남말할 처지는 아니구나. 좀 더 챙겨먹으렴."

내 위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차리고 보자, 레베카가 나를 양팔로 받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동작은 내가 데이지를 안는 것보다 훨씬 고난이도다.

일명, 공주님 안기.

난데없는 접촉에 당황한 나는 그녀에게 이의제기를 하려고 했다.

"저, 저기요?"

"시간이 없다. 혀 물지 않게 조심하렴."

그러나,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레베카가 냅다 뛰었다.

아니 날았다.

이게 빛의 속도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리게 빨랐다.

'시부우우울… 그냥 오지 말 걸.'

부드러움이고 나발이고.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공간이 압축되는 느낌은 자이로드롭 뺨친다.

나는 나도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애써 소리지르고 싶은 것만 참는다.

'아, 소변 누고 탈 걸.'

항상 절규머신을 타고 나서야 깨닫는 사실에 부들부들 떨어야했다.

­콰지지직!

­꾸어억…!

눈도 뜨기 힘들었던 풍압은무언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그쳤다.

잇달아 돼지 멱따는 소리도 들렸다.

뭔가 고라니라도 쳐버린 느낌이었다.

레베카가 실수로 교통사고라도 낸 게 아닐까, 싶었던 나는 황급히 눈을 떴다.

"버러지 같은 것이."

눈을 뜨자마자, 경멸을 가득 담은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싸늘한 눈빛이었으나,그나마 나를 향한 것이 아니어서 참을만 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서 눈을 돌린다.

"우으, 으…."

나무에 쳐박혀서 피를 질질 흘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특이사항이라면 두텁한 뱃살에 감춰져서 사타구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있겠다.

물론 그 자는 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 말은 즉슨 바지를 어디다가 팔아먹고, 새로운 개념의 하의실종 패션을 내게 보여주고 있다는 소리다.

'웩, 시발. 왜 벗고 있고 지랄이야.'

그 자는 레베카가 분노를 품을만한 극혐인 흉물이었다.

나는 내 눈을 버리게 한 놈에게 치를 떨며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강탈한 흉물을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나니, 그제서야 무언가가 눈에 밟혔다.

나는 그걸 보고나서야 레베카가 분노했던 이유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레베카, 일단은 저 애부터."

"……그래."

나는 우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그녀를 말렸다.

우리는 나무에 묶인 채로 축 늘어져 있는 형상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는 온 몸에 시퍼런 멍과 상처로 가득했다.

방금 전에 생긴 듯한 채찍 자국은 움푹 패여서 피고름이 맺혀있었다.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은 눈 뜨고 지켜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실날 같은 숨을 이어가며,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힘없이 뜬다.

흐릿한 푸른색에 원한이 서려있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인, 간… 죽, 일거야."

피로 물든 회색털이 우리를 경계하듯이 삐죽 솟아올랐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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