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5화 (15/117)

〈 15화 〉 바람꽃(3)

* * *

'차가워….'

아이는 서늘한 공기을 맞이하고 스르륵 눈을 뜬다.

그녀를 맞이하는 흐릿한 조명이 아직 아침이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이슬을 머금은 새벽공기의 차가움이 그녀의 몽롱한 정신을 일깨운다.

"하아암…."

결국 아이는 태양조차 늑장을 부리는 시각에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간밤에 일찍 잠든 탓인지 금방 정신이 또렷해진다.

"으…?"

그녀는 자연스럽게 팔다리를 쭉 펴려다가 참는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몸이 찌푸등했지만 얌전히 누워있기로 했다.

'조금만 더…….'

이미 잠은 달아났지만, 그녀는 모포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게으름은 어떤 남자의 말처럼 '이불 밖은 위험해요'라는 이상한 변명의 산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엊그제 그가 잔소리할 때 써먹은 대사를 떠올린다.

(명분이 없잔아요, 명분이! 꼬꼬마 데이지? 당근을 먹지 않아도 될 합당한 이유을 가져오면 봐드릴게요!)

'이번엔 명분이 있어.'

당근에게 패배한 날을 떠올리며 데이지는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데이지가 생각하기로는 이번엔 명분이 있었다.

무려 찬 공기가 그녀의 단잠을 방해했다는 합당한 이유.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필요했다.

'추워서 그런거니까.'

남자의 말대로, 명분으로 무장한 데이지는 이 정도 어리광은 괜찮다고 합리화한다.

아이는 꼼지락거리며 자세를 고치고 규칙적인 심장소리를 들었다.

'…따듯해.'

새벽공기의 차가움은 오히려 기분 좋은 대비를 안겨주었다.

익숙해진 온기는 그녀를 감싸듯이 곁에 있다.

귀 기울이면 들리는 심장소리는 무척 가깝고 생생했다.

그 사실은 안심되고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할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어째서일까….

이윽고 어느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창백한 그날. 당시는 눈도 오지 않은 시린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행복해질 거야… 사랑하는 내….)

잃어버린 것.

그 때처럼 이 온기마저 곁에서 사라져버린다면….

"추버요… 데히지…?"

문득 자신을 부르는 어눌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덜 깬 남자는 그녀의 등을 토닥인다.

그녀의 작은 손보다 훨씬 커다란 손길에 점점 몸의 떨림이 가라앉는다.

데이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잠에서 깨어난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조금씩 밝아오는 아침에 어렴풋하게 보였다.

데이지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옅은 갈색 눈동자를 본다.

그녀에 비해 흔하고 평범한 색이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한 눈빛이었다.

어느 때는 장난스러웠지만 이따금 그녀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 따스히 바라본다.

'닮았어….'

그 눈동자가 누군가와 닮아있기에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사라지기 전에.

데이지는 홀린 것처럼 그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 음…? 피터가 그렇게 잘생겼나?"

남자는 피하지 않고 아이에게 얼굴을 내주었으나, 겸연쩍은 듯이 혼잣말을 했다.

피터의 말에, 데이지는 멈칫하며 이목저목 만져보던 손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그녀가 변명하듯이 말한다.

"아니. 그냥. 신기하게, 생겼어."

"와."

아이의 솔직한 말에 남자가 충격받은 얼굴로 실소를 지었다.

그는 데이지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되갚아준다.

"너도 찹쌀떡이거든."

"차살떡?"

"찹쌀떡이라고, 하얗고 말랑한 게 있어요."

피터는 눈을 크게 뜨고 언제나 되묻는 데이지에게 짖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쫀득쫀득하게 늘어나는 거. 자자, 이런 식으로!"

"하, 하지마…! 히, 간지러!"

데이지는 자신의 뺨을 늘리다가,

갑자기 옆구리를 파고드는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는 언제나 그녀가 겪지 못한 것들을 알려준다.

안아주고, 머리를 만져주며, 맛있는 음식을 해준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따금 노래도 불러준다.

작은 일에도 웃으며 칭찬해준다. 가끔 짖궂게 굴어도 호의가 느껴지는 장난이었다.

'다른 어른, 아니 사람들이랑 달라.'

그는 그녀가 접시를 떨어뜨려도 때리거나 욕하지 않았다.

그녀가 악몽을 꾸고 울어버려도, 울지말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어딘가에 가두지도 않고, 떨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흐흐흐, 복창합니다. 피터는 존잘이다."

지금은 어린애나 간지럽히면서 웃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웃다가 지친 데이지는 항복하며 손사래쳤다.

"아핳, 아라써, 존자. 존자리야…! 그만햏…."

"역시 나야. 아직 죽지 않았네."

남자는 헥헥거리는 아이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농락 당한 아이는 그저 못난 어른을 샐쭉한 눈으로 쳐다봤다.

"안녕, 전 존자리입니다만?"

피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데이지는 능글맞은 태도가 약간 분했지만, 동시에 우울하던 머릿속이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잠은 잘 잤어요, 데이지?"

텐트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피터가 물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존재를 존중하는 목소리였다.

"응. 피터는 잘 잤어?"

"당근이죠. 역시 젊음이 좋긴 좋아요. 잠만 자도 피로가 풀리네."

"…당근은 싫은데."

노인네처럼 말하는 피터를 보며 데이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지는 피터라는 남자는 이상한 말을 자주하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해.'

어느날, 상자에 갇혀있던 그녀의 세상을 열였던 남자는 깜짝상자 같았다.

그것도 신기하고 즐거운 것만 튀어나오는, 그런 보물 상자.

뭐가 들어 있을지 몰라도… 열어보고 알고 싶었다.

누군가를 알고 싶다는 건, 그녀에게 낯선 감각이었다.

"그럼 오늘은 당근 스튜로…?"

"못 됐어."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

개미도 잠잘 시간에, 성실한 피터는 뚠뚠 일어나 스트레칭을 한다.

"후아암…."

나는 기지개를 펴며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피스타치오인지 뭔지하는 숲의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신다.

이슬을 머금어 촉촉한 공기로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아니, 포톤캐논이었나?'

나는 피스타치오는 견과류 이름이었다고 생각하며, 몸을 쭉쭉 폈다.

마침 내 옆에도 당근이 싫다며 원망하던 꼬꼬마도 나를 따라서 짤막한 팔다리를 쭉쭉 늘렸다.

나름 열심히 하다고 따라하지만 역시 수줍은 모양인지 어딘가 어설펐다.

"거, 똑바로 합니다. 키 크기 싫습니까?"

"…피터, 이러면 정말로 키 커?"

데이지는 내가 키 큰다고 꼬셔서 하는 쭉쭉이 체조에 불신을 품고 있었다.

나는 성장기에 하는 스트레칭의 효능을 달달 설명해주고 싶었으나…

"…아마도?"

데이지에게 만큼은 무어라 호언장담을 할 수 없었다.

'글쎄, 너 로판 주인공이라….'

원작에서 용사는 체구가 작고 빈약하다고 표현되었다.

뭔가 성장기 때 영양부족의 원인이라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 개연성은 로판 여주인공들의 특정부분을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네.'

나는 내 말만 믿고 쭉쭉 몸을 늘리는 데이지를 보았다.

실제로 그녀는 또래 나이대에 비해서 몸집이 많이 작았다.

언뜻 눈으로 보기에는 130초반? 그것도 팔다리가 길어서 잘 쳐준 셈이다.

"……."

문득 나는 데이지가 160cm도 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 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도 어린애의 꿈과 희망을 박살낼 무자비한 괴물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잘 먹고 잘 자면 조금이라도 더 크겠지….'

나는 영원히 꼬꼬마일 데이지를 위해서 키가 크는 스트레칭을 만들어주었다.

나중에 어디가서 땅콩이라고 무시받으면 서럽지 않겠는가.

게다가…

언젠가 만날지도 모를 그 싸이코들 때문이라도.

데이즈는 차라리 170정도 되었으면 한다.

'그 로리콘 새끼들.'

까짓꺼 모델이 되어 작은 여자애나 괴롭히는 놈들의 수비범위에서 벗어나렴….

"힘내서 열심히 해요. 세상은 노력을 비웃지 않는 법입니닷…!"

"응!"

내 진심을 이해한 건지 데이지가 다시 의욕을 붙였다.

데이지는 올챙이가 개구리되는 모습을 형상화한 체조를 한다.

뒤뚱거리는 데이지를 두고, 나는 아침을 차릴 준비를 한다.

가장 중요한 불이랑 식재료를 구하는 겸, 어제 레베카가 주워온 강아지 속성을 살펴보러 간다.

임시로 쳐둔 텐트에서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다.

"레베카, 계세요? 들어가도 되나요."

­일어났구나. 들어오렴.

텐트 안에 들어서자 레베카는 어젯밤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반겨주었다.

"오늘도 일찍 일어났구나. 잘 잤니?"

나는 그 기시감에 멍하니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레베카가 나른하게 미소지었다.

"아. 네, 레베카는요?"

"그럭저럭이란다."

혹시 안 잔 건가? 너무 멀쩡한 모습이라서 잘 모르겠네.

나는 밤새 환자를 돌보느라 고생했을 레베카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같이 줍줍 하자고 동의한 당사자였으나, 피곤하다며 자러 가버렸으니….

일단 죄책감은 뒤로 하고, 쥐죽은 듯이 누워있는 환자의 용태를 물어봤다.

"얘는 좀 어때요. 정신은 차렸나요?"

"아직은. 그래도 금방 차도를 보이는구나.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눈을 뜰지도 모르겠어."

레베카의 말처럼, 시체같이 질려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전날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안정된 모습이었다.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나는 회복속도가 남다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깨어날 때를 대비해 그녀에게 먹일 죽 비스무리한 것도 준비해 놔야겠다.

그간 제대로 못 먹은 게 분명한 환자에게 아무거나 먹일 수는 없을테니….

'그 새끼는 깨어났으려나?'

나는 그녀의 툭 불거진 갈비뼈를 떠올리며, 어느 인간말종을 떠올렸다.

이 아이와 달리 20일 정도 굶어도 넉넉할 것 같던 놈.

레베카가 죽지 않게끔 조치해놨으니 살아는 있을 것이다.

'이왕 사고친 거 써먹어야지….'

"식사준비?"

"아."

내가 주된 목적을 까먹고 생각에 잠기자, 레베카가 흘리듯이 내 임무를 상기시켰다.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딴청을 부리는 척하며 말한다.

"오늘 아침은?"

"일단 계란요리를 해보려고요. 엊그제 챙긴 새알로. 그거면 양이 꽤 되지 않아요?"

"아아, 충분하지. 그 새도 맛있는데…. 아쉽구나."

레베카는 입맛을 다시며 내가 불러주는 것들을 꺼냈다.

늘여놓은 재료를 보더니 그녀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오늘도 당근이니? 아이한테 싫은 것을 억지로 시키면 성격이 나빠진단다."

"참… 누가 보면 괴롭히는 줄 알겠네요. 이게 데이지를 위한 일이라니까요."

"이제보니 그대도 성격이 썩 좋지만은 않구나…. 쯧, 악질이로다."

"이게 당근이 얼마나 좋은 지 몰라서 그래요. 얼마나 좋으면, 제 고향에는 당근을 흔들어 달라는 말의 유래가ㅡ"

내가 헛소리를 퍼붓자, 레베카가 진저리 난다는 듯이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나는 탈주해버린 레베카를 망연히 보다가 재료를 주섬주섬 챙겼다.

문득 색색거리는 수인족 아이를 보고, 손에서 양파를 빼버렸다.

'개가 당근은 먹어도 되나?'

가끔 당근스틱 주면 잘 먹던 뉘집 누렁이를 떠올렸다.

나는 양파 대신에 당근 몇 개 더 챙기며 편식하는 이들을 혼내주러 나간다.

여우 같은 도마뱀과 올챙이 같은 토끼가 당근을 기다리고 있다.

*

달걀만으로 물릴 것 같아서 당근을 듬뿍 넣어 만든 계란말이과 계란찜은 의외로 호평이었다.

­맛있어서 짜증나는구나.

­나쁘다. 거짓말쟁이….

두 손님은 툴툴거리면서 먹었어도, 입은 솔직해서 남김없이 먹어주었다.

어쩌면 일일이 떼내고 먹기에는, 너무 잘고 많은 당근이어서 포기한 걸지도 모른다.

'보람차구만.'

역시 남에게 좋은 것을 전도하는 일은 언제나 기쁜 법이다.

…이 세계에도 오이가 있다면 그 기쁨이 배가 될텐데….

나중에 오이를 찾으면 냉국이라도 해보자.

과연, 그 두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ㅡ

"……어휴. 고문은 음식고문만으로 충분한데…."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애써 띄우려고 노력하며 어디론가로 향했다.

'앞으로 2달인가.'

남은 기간은 그다지 여유롭지 않았다.

숨겨진 비밀을 찾아야하는 만큼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예상할 수 없었다.

내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때문이라도 신속하게 움직여할 일이지만ㅡ

­아이가 깨어나기를 기다려야겠다. 사정을 물어보고, 가족이 있다면 곁으로 돌려보내야지….

마음 약한 누군가의 의견대로 수인족 아이가 회복하기 전까지 기다려야했다.

덕분에 수도를 들어가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게 마땅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손을 놓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두툼한 만큼 털면 뭐라도 나오겠지.'

나는 어떤 생각을 레베카에게 전했다.

그녀는 다소 비인도적인 의견임에도 내게 동의 했으나, 내가 나선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그러나, 단순하고 다혈질인 레베카보다는 차라리 내가 적격이다.

레베카는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다친 애와 불안증세가 있는 애를 혼자 내버려둘 수 없었다.

게다가 애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지금부터 상영될 내용이 보호자 동반해도 어린애들이 관람하기엔 부적절한 내용이다.

우리가 자리잡은 야영지 근처에 숨겨진 동굴.

레베카가 어젯밤에 흙을 쌓아올려 만든 인위적인 것이었다.

­타박. 타박.

나는 그 안으로 일부러 소리내어 걷는다.

­휘~ 휘휘~ 휘휘휘~

내친김에 휘파람을 불었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동굴에 울려서 음산하게 되돌아온다.

"우우ㅡㅂ, 우읍!"

메아리 속에는 애절한 누군가의 울먹임도 섞여서 돌아왔다.

나는 그 자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더욱 줄기차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 휘휘~ 휘휘휘~

피터야, 휘파람을 불어라!

"우으으우…!"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못돼먹은 돼지를 내가 혼내줄 생각이었다.

앞으로 휘파람 소리만 들어도 영원히 고통 받을 수 있도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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