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바람꽃(4)
* * *
무덤처럼 둥근 굴 안.
그곳은 좁고 어두워서 폐소공포증 걸리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흙과 어둠 밖에 없는 공간이지만, 이 곳도 엄연히 생명체의 서식지였다.
그 괴생명체는 땅에서 돋아난 돼지머리처럼 생겼다.
내가 휘파람을 부르며 놈이 물고 있던 천을 풀어주자, 그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어흑, 그만해…! 그 소리 좀. 제발. 해달라는 거 다 할테니… 그 맑고 청아한 소리는 이제 그만…!"
놈은 침을 질질 흘려가면서 괴로워했다.
나도 입 주변 근육이 뻐근했기에 슬슬 그만하려고 했다.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되었군."
"……제발, 제발."
나는 무려 3차례에 걸쳐서 방문했다. 아침점심저녁으로 꾸준히 휘파람을 들려주었다.
덕분에 토끼 같은 애랑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하고, 엄한 곳에 시간을 써야했다.
'기분 잡치는 일이야.'
하루종일 빛도 들어오지 않은 굴에 갇혀서 휘파람을 들어야했던 남자는 초췌했다.
하긴 차디찬 땅속에 쳐박혀서 쫄쫄 굶어야했으니 그럴 수밖에.
나는 주변의 잡초를 뜯어 만든 부침개와 물을 코앞에 놓으며 말했다.
"그 뭐냐, 버터?"
"…비우터다. 마갈린 드 비우터 남작이다."
"맞아, 마가린 더 버터."
"……."
나는 침묵하는 마가린을 보며 이상이 깨진 느낌을 받았다.
내가 생각한 귀족의 이미지는 고상하고 품격이 있었는데….
'이건 뭐… 오크족의 귀족인가?'
외모와 다르게 그의 소지품을 보면 나름대로 높은 신분 같기는 했다.
내가 문화충격으로 멍때리자, 마가린이 물을 달라고 보챘다.
"일단 물이다, 물…!"
근데 혀를 내미는 모습은 가히 끔찍했다.
그 모습이 너무 추했기에 그냥 머리에다가 물을 부어주었다.
"크하, 아악, 꿀꺽!"
눈 뜨고 보기 힘든 비쥬얼은 물을 부으니 점입가경이었다.
어떻게든 물을 마신 놈은 기름진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닭똥 같은 눈물도 찔끔 흘렸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까지 핍박하는가…!"
언뜻 보면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심문을 마친 나로서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혹시나 하고 물어본 내가 병신이었다.
"아가리 닫아."
나는 놈에게 호의나 배려는 사치라는 생각으로 얼굴에 부침개를 던져주었다.
"으, 쓰다. 우웨엑, 풀내. 크흐흑, 눈물에 젖은 맛이야…!"
그는 울다가도 허겁지겁 부침개를 먹었다.
퍽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그다지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인간으로서 보기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이딴 게 귀족인가.'
이건 악어의 눈물이다. 놈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에 불과했다.
이 자는 제 고통만 아픔이고 슬픔인 줄 아는 인간조무사다.
마가린이라는 남자는 외모만 추악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상기하고 , 내게 동정심을 요구하듯이 불쌍하게 쳐먹는 돼지 머리를 노려봤다.
'씹새끼.'
어린아이를 무참히 찢어발긴 주제에, 감히 동정을 바란다.
동정을 바라는 주제에, 그 만행에 대한 죄의식은 없다.
그 만행은 놈에게 가축을 도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 채찍질을 가했는지 들었을 때, 놈은 부끄러워 하며 말했다.
그 수치심조차 어린아이를 고문했다는 사실이 아닌, 자신의 불능에 대한 자백에서 비롯되었다.
'…발기부전 치료?'
거지같은 세상에, 참으로 좆같은 이유였다.
놈에게 들어야할 것이 없었다면 진작에 패죽였을 것 같다.
나는 심호흡하며 그에게 물었다.
"…네 놈에게 수인족을 제공한 노예상에 대해서 털어놔라."
인족에 비해서 견족, 묘족과 같은 이종족은 희귀한 존재였다.
인간과 동물 섞어놓은 듯한 수인들의 신체적 능력은 인간보다 훨씬 우월했다.
더군다나 쉽게 꺾이지 않는 성질과 동족에 대한 집단의식 때문에 원한도 깊게 가진다.
그런 점에서 수인족에 대한 위험부담이나 관리 난이도는 평범한 노예상이 취급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레베카의 말대로 학대 당한 아이가 북부 출신이라면…
수인족 아이와 묘사가 유사했던 A14도 같은 출신일 확률이 높았다.
시기상으로나, 직감으로나 마가린에게 노예를 제공한 녀석이 뒤가 구렸다.
버터는 미치겠다는 얼굴로 발작했다.
"대체, 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요!! 뒤틀린이요, 뒤틀린 암트만! 난 이름만 안다니까…! 제길, 그리 원한다면 그 암캐는 선물로 드… 아악!"
헛소리를 하길래 얼굴을 걷어차주었다. 안 그래도 낮은 그의 코가 풀썩 내려앉았다.
사람을 부수는 느낌은 썩 좋지 않았지만…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풀렸다.
"또 올게. 기대하고 있어."
등불을 가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마가린이 소리를 악을 썼다.
"아아아아악, 해보해져… 보해달하고! !"
떼쓰는 고함소리를 들으니 미처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가서 재갈을 물려야하나 싶었지만, 소리는 금방 그치고 꺼이꺼이 우는 애원이 들렸다.
'울어서 순수가 증명이 되겠냐.'
나는 어둠 속에서 그가 조금이나마 반성하기를 바라며 굴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이미 밤이었고, 구름이 낀 밤하늘은 달빛조차 어두워서 음산했다.
"시간 아깝네…."
데이지랑 놀아줄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니 여러모로 손해본 기분이다.
내가 일하러 간다니깐, 반짝거리는 보라색 눈이 축쳐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마가린이 아는 것을 전부 털어놓은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좀 더 교차작업이 필요했다.
실로 불쾌한 일이지만… 결국 필요한 일이었다.
노예상인에 대한 정보는 그만큼 중요하다.
"뒤틀린 암트만…."
얼굴을 숨기고 마가린에게 접근한 암상인.
수인족을 전문으로 취급한다는 놈.
그 이름조차 가명일 확률이 높았지만….
그럭저럭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돌아가자.
이런 더러운 이야기는 잠시 잊고, 귀엽고 순수한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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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낙엽을 밟아가면서 소리내어 걸으면, 내게로 달려오는 존재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퇴근 후 나를 반겨주는 누렁이 같았다.
"피터…!"
그녀가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는 모습을 볼 때면, 그나마 이 세상에도 양심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도 이 얘가 인류 최후의 보루지만.
'뭐, 이젠 망해버리라지.'
나는 내 복근을 향해 달려오는 작은 희망을 위해 쪼그려 앉았다.
데이지를 살짝 안으며 관리하지 않아도 특급인 머리결을 마구 헝클어주었다.
그녀는 머리 모양이 망가져도 얌전했다.
데이지는 눈높이를 낮춘 내 뺨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차나? 많이 힘들어?"
그녀가 보기엔 내 안색이 썩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스럽게 휘어진 눈썹이 펴주며 인정할 건 인정했다.
"네, 그래서 충전 중이예요."
"충저언?"
나는 데이지가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순진한 꼬맹이를 놀리는 게 소소한 취미가 되어버렸다.
놀린 것에 대한 배상으로 헝클어놨던 머리카락을 정리해준다.
데이지는 갸르릉거리는 느낌으로 손길을 받아들였다.
나는 적당히 충전을 마친 후 아이에게 말했다.
"잠깐 레베카랑 이야기할 게 있는데, 먼저 가서 기다릴래요?"
"…같이 가면 안돼?"
저녁 출근은 제법 길었기 때문인지 데이지가 웬일로 떼를 썼다.
나는 데이지의 부탁이 기꺼웠고, 레베카에게 안부만 전할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같이 갈까요?"
"응!"
손을 흔드는 꼬맹이의 모습은 퍽 만족스러워 보였다.
역시 뉘집 애랑 다르게 참 착하다. 부디 이 심성 그대로 자랐으면 한다.
'나중에 피터같은 건 밥해주는 기계로 생각하지 않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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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가 있는 천막에 도착한 나는 바깥에서 그녀를 부르려고 했다.
데이지에게 괜히 다친 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레베ㅡ"
나 혼자 천막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고 할 때였다.
천막 안에서 레베카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내가 그 다급한 목소리를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ㅡ
입구를 가린 천이 크게 들썩이더니, 시커먼 뭔가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인간!"
맹수처럼 달려드는 그것은 내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목을 물리기 전에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내민다.
"큭."
화끈한 통증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근육과 살이 씹히는 감각은 소름이 돋았다.
그 아찔한 고통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들었다.
'이게 무슨.'
그러나, 차마 뻗지 못하고 그저 오만상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내 팔뚝에 구멍낸 짐승은 쥐어패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으아, 존나 아파."
그 짐승은, 온몸이 망신창이인 수인족 아이였다.
붕대로 감싼 몸 밑에는 아직도 멍과 상처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 아이였기에 폭력으로 떼어놓자니 내 양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크르르르."
그녀는 꼬리털이 삐죽 솟은 채로 내 팔을 냠냠 씹어댔다.
치악력이 아픈 어린애치고는 존나게 쎄서 너무 아팠다.
"피터! 얘야, 괜찮니!"
"피터!"
내가 이도저도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자 레베카가 황급히 뛰어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 데이지도 와버려서 분위기가 급박해졌다.
"놔! 하지마!!"
잔뜩 열받은 데이지가 주먹을 꾹 쥐고 이쪽으로 뛰어온다.
저 작은 주먹은 드래곤조차 날려버린 전적이 있었다.
'이런.'
그런 꼬꼬마 펀치를 다친 애가 맞으면 산산조각 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급하게 내 팔을 깨문 아이의 머리를 다른 팔로 지그시 누르고 허허 웃었다.
"데, 데이지! 괜찮아! 괜찮아요… 이거 노는 거예요."
"……아니야. 아프잖아."
"걱정 노노… 으, 일종의 애정표현. 아이고 착하다 착해."
"크르르르…."
봐봐, 데이지. 머리를 쓰담쓰담해주니 얘가 좋아서 으르렁거리잖니.
나는 내 영혼의 단짝에게 어서 데이지를 말리라고 신호를 보냈다.
레베카는 눈치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인족은 마음에 드는 것을 깨물곤 하지."
"……안 아파?"
"저 정도로 사람은 죽지 않는단다."
어른들의 거짓말에 속은 아이가 긴가민가한 듯이 눈썹을 모았다.
나는 타는 듯한 고통 때문에 레베카가 원망스러웠다. 이 또한 그녀가 얘를 간수하지 못해서 생긴 일 아닌가.
'애당초 얘는 왜 나를 물고… 아.'
…아마도 그 마가린인가 버터인가 하는 빌어먹을 돼지새끼 때문이겠지.
어쩌면 내 몸에 그 자의 체취가 베어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인간 자체가 밉거나….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적응이 안되는 고통을 참으며 아이의 머리를 좀 더 지그시 눌렀다.
예전에 개에게 물렸을 때 억지로 팔을 빼려고 하면 심하게 다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크……."
그게 불편한 듯이 팔뚝을 물고 있는 턱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내 말이 그녀에게 안심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너를 괴롭힌 돼지는 피터맨이 해치웠으니 안심하라고."
개드립이라도 치지 않고서는 못 견딜 고통이었다. 가끔은 아플 때 웃음이 나더라.
"……."
적개심이 가득했던 코발트 블루의 눈은 실실 쪼개기 시작한 나를 본다.
그 푸른 눈동자에 당황스러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고민하듯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이윽고, 팔뚝을 옥죄던 턱이 스스륵 풀렸다.
그러다보니 내가 아이를 받치고 있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그녀는 선혈이 묻은 입술을 혀로 핥짝이며 말했다.
"……누구야, 당신."
어쩐지 당혹과 죄책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누구라고 물으신다면….'
이 동네 사람은 성이 없으면 자신의 출신지를 붙여서 말하곤 했다.
피터의 인적사항을 모르는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태초 마을의 피턴데요? 그 쪽은?"
저세상 디그다를 혼내주고 왔으니 나도 포켓몬 마스터가 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내 완벽한 자기소개를 들은 수인족 아이는 어딘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바람…. 푸른 질풍의 딸, 바람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