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17화 (17/117)

〈 17화 〉 바람꽃(5)

* * *

"푸른 질풍의 딸, 바람꽃이다…."

바람꽃.

다른 말로 아네모네인가.

그녀의 푸르스름한 머리카락이 하늘색 아네모네를 연상시킨다.

바람이라는 수식이 붙은 꽃의 이름은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다.

나는 통증을 잊을 겸 실실 웃으면서 소감을 말했다.

"바람꽃, 예쁜 이름이네요. 잘 어울려"

"넌, 이상해…."

바람꽃은 그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축 쳐지는 것을 보니 힘이 다한 것 같았다..

나는 다급히 팔을 고쳐서 그녀를 지탱했다.

오른팔이 욱씬 거렸지만, 움직이는데 문제가 없어서 안심했다.

"미안…."

눈을 감은 채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 오른팔에 구멍을 낸 것에 대한 사과인 듯 했다.

결국 바람꽃은 의식을 잃은 듯이 조용해졌다.

혹시나 하고 확인했으나, 숨을 쉬고 있어서 일단 한시름 놓았다.

'이걸로 일단락 된 건가….'

안심이 되자, 팔뚝에 남은 야무진 잇자국에서 화끈한 통증이 몰려왔다.

이게 제 2의 심장인지 뭔지 아무튼 겁나게 맥박친다.

손 한뼘밖에 안되는 상처였지만… 제법 세게 물린 듯했다.

옷에 배어 나오는 혈액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구토감이 올라왔다.

마음 같아서는 팔을 부여잡고 뒹굴며 의무병을 불러대고 싶다.

"괜, 찮아…?"

그러나, 저기서 데이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레베카가 말리지 않았으면 진작에 뛰어왔을 것이다.

'호들갑 떨면 안돼.'

안 그래도 불안증이 있는 데이지였다.

여기서 내가 오버했다가는 그녀의 증상이 악화될 지도 모른다.

원래 보호자에게 이상이 생기면 아이도 영향을 받는 법이다.

나는 멀쩡한 손으로 상처를 가리며, 평소처럼 말하려고 노력했다.

"나참, 분위기가 왜 이리 싸해. 뭐가 문제야 썸띵?"

"……??"

내 현란한 멜로디 때문인지 그렁그렁한 자수정 같은 눈동자에 갈고리가 새겨졌다.

그래… 차라리 갈고리나 띄우렴. 울면 못난이라고 놀릴 거야.

나는 벙찐 데이지에게 피식 웃어주고, 레베카에게 눈짓했다.

내겐 상처를 치료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때마침 레베카의 천막에는 약초와 붕대가 있었다.

그녀가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많이 곤한 것 같구나. 우리 아이는 내가 볼테니 그 아이를 돌봐주렴."

레베카는 짐짓 태연하게 말했지만, 내게 미안하다는 듯이 눈썹을 모았다.

어찌보면 내 팔뚝의 비극을 레베카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백프로 그녀의 과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오해와 불행이 겹쳐서 일어난 사고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여주었다.

뭐, 결과만 따지면 데이지와 친해지고 싶다고 하소연하던 레베카에겐 기회가 생긴 게 아닐까?

"…왜 피터가 쟤랑 가? 아줌마가 가면 안돼?"

그렇게 해결되나 싶었는데…

뭔가 불만인지 꼬꼬마가 뾰로퉁하게 말했다.

아이의 솔직한 거절에 드래곤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그대여…."

루비색 눈동자가 촉촉한 것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타격이 큰 모양이다.

'…멘탈이 겁나 약하시네.'

용사에게 마음이 베인 드래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친 팔도 아프고, 기절한 아이를 이대로 둘 수 없었다.

나는 타협하고, 레베카 하나 정도는 가뿐히 외면하기로 했다.

이것도 다 본인의 업보 아니겠는가.

레베카의 유리멘탈에 고개를 절레 저으며 등을 돌렸다.

"피, 피터여!"

결코 내 팔에 구멍이 나는 것을 구경만 하던 레베카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이 넓은 남자니깐!

어쩌면 이걸로 드래곤과 드래곤 슬레이어가 친해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잖아?

…뭐, 아님 말고.

**

나는 상처를 처치하고, 어설프게 감은 붕대를 바라봤다.

비록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만신창이가 된 어린애가 기를 쓰고 새긴 상처였다.

작지만 깊게 패인 상처는 작은 입에서 비롯된 것치곤 너무 큰 원한이 담겨있었다.

이 세상은 저만한 아이가 이토록 한을 품을 정도로 업이 깊었다.

"하아."

문득 쓰레기들이 벌인 개짓거리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린애에게 새겨진 것이 육체의 고통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괘씸하게 다가왔다.

나는 마가린 버터라는 폐기물에게서 대략적인 정보를 들어놨다.

그가 토해낸 정보는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원작의 흐름 그대로였다.

'…전쟁이라.'

현대사회에선 막역하게만 들렸던 전쟁이라는 단어가 부쩍 실감이 나서 입맛이 썼다.

어쩌면…이 아이가 돌아갈 곳은 없을 지도 모른다.

나는 시체처럼 창백한 아이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녀의 고통이 비롯된 계기를 떠올린다.

'마왕과 신탁인가….'

천년 만에 탄생한 만마의 왕과, 그 마왕에 대적할 영웅이 나타날 것이라는 신탁.

그 두 존재가 원작의 주요 배경이자, 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

천년이라는 세월 속에 쇠퇴한 제국은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전하, 마족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하옵니다.

­급보요! 대장군께서 전사하셨습니다…! 성이 함락 당했단 말입니다!

­그건 괴물이다… 그것도 터무니 없는 괴물…! 마치 천년 전 기록처럼… 그 자는 마, 그 자체였다!

­결국 우리는 멸망할 것이다.

천년 만에 튀어나온 마왕이라는 지상최대의 위기는 평화에 찌든 인류가 감당하기 벅찬 재앙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멸망당할 수 없었던 인류는 여신께 자비를 구걸했다.

마음 약한 여신은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고, 인류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잊혀진 영웅의 후손이 그대들을 구원하리라.]

제국은 여신의 신탁을 바탕으로, 그들 스스로가 지워버렸던 영웅의 흔적을 쫓았다.

이윽고 그들은 먼지 속에 파묻힌 고서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북쪽에서 나타난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홀로 군단과 맞서 승리했다.

­한 번 휘두름으로 산을 베고, 하늘이 갈랐다.

­용과 함께 결국 재앙을 토벌하였다.

말도 안되는 전설 속 이야기.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기록들은 한 가지만을 가리켰다.

그게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살길을 찾던 제국은 혐오하던 이들에게 숨겨진 비밀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다른 위기를 느꼈다. 기록에 적힌 영웅의 힘은 제국조차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다룰 수 없다면 오히려 위험하다.'

제국은 언제나 빼앗고 지배해야만 한다.

그 사실을 익히 아는 황제는 전국에 왕명을 내린다.

'확보하라. 그리고….'

'충성하게 하라.'

거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릴 이유가 없었다.

**

언젠가의 기억이다.

눈여우를 쫓아 설원을 뛰어다니다가, 온 몸이 젖어서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고열 속에 몸져 누워있는 내게 그가 '북부의 늑대가 한심하게 감기에 걸렸다'며 혀를 찼다.

그는 야속하게도 나를 돌봐주지 않고, 언제나처럼 사냥에 나섰다.

그럴 때면 무뚝뚝한 아빠보다는 상냥한 엄마가 그리웠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건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러고보니 내 이름이자, 그녀가 좋아했다던 꽃도 차가운 북부에서 피지 않아서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엄마도, 내 이름으로 된 꽃도 보지 못한 게 참 속상했다.

그 꽃의 의미나 생김새만이라도 알고 싶었지만….

그는 보면 안다고.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찾아보라며 말할 뿐이었다.

답답했지만, 원체 심술궂고 무뚝뚝한 사람이었기에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아픈 자식을 두고 집 밖이나 싸돌아다니는 못된 아빠였으니.

'왜 그 일이 떠오른 걸까.'

아무래도 몸져 누워있으니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죽을 것 같았는데… 그러고보니 그 때는 어떻게 나았더라?

'아! 열매였어….'

아주 달콤하고 새콤한 열매였다.

꼬리털까지 폭싹 젖은 그가 가져온 열매를 먹고 거짓말처럼 나았지.

'…눈 떠보면 그때처럼 아빠가 있지 않을까.'

그 달콤한 열매와 함께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

.

그녀는 작은 소망과 함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방이 아닌 낯선 천막이었다.

주위에서 가죽과 눈의 냄새가 아닌 짙은 풀내음이 났다.

역시 그녀의 집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도 곁에 없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수 십번을 넘게 마주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자고 일어나면 집이기를 바랐다.

지겹던 눈의 차가움과 더운 이마에 무심히 올려준 차가운 손길이 그리웠다.

아픈 건 질색이지만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더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문득 눈앞이 흐려졌다.

바람꽃은 그녀가 울면 슬퍼보이던 남자 때문에 소리내어 우는 법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녀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눈에 고인 물을 흘려보냈다.

"바람꽃."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또렷하고 편안했다.

바람꽃은 자신을 부른 목소리를 향해 흐린 눈을 돌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녀는 뜬금 없는 고백에 두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기대와 희망. 음, 저는 이정도 꽃말 밖에 모르겠네요. 워낙 뜻도 종류도 많은 꽃이라서."

슬며시 다가오는 그의 오른팔에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바람꽃은 구면인 그 남자가무해한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째서인지경계심이 들지 않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것은 흙이 담긴 그릇과 꽃이었다.

그는 그 중에서 푸른꽃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저도 이게 바람꽃이 맞는 지 모르겠는데… 맞는지 알려 줄래요?"

그가 내민 꽃은 보라색이 섞인 옅은 하늘색이었다.

화려한 색과 둥근 모양이 예뻤지만….

"……모르겠어."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꽃을 그녀가 알 리가 없었다.

그래도. 막상 그 꽃을 보니 아빠의 말처럼 그냥 알 것 같았다.

'엄마가 좋아했던 꽃은 작고 동그란 꽃이구나.'

멍하니 꽃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닌가? 뭐, 그래도 예쁘지 않나요? 꺾어버리기 미안해서 뿌리채 데려왔거든요."

실실 웃는 남자는 역시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낱 꽃에게 동정을 품는 남자가 신기했다.

그는 흙이 담긴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뿌리가 남아있으면 죽지 않고 잘 살 거예요."

"그래?"

"그럼요."

그리 말한 그는 꽃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릇에 심어두고,

화분이 되어버린 그릇을 그녀의 머리맡에 놓았다.

"어때요, 괜찮지?"

바람꽃은 볼품 없는 그릇에 돋아난 푸른꽃을 보았다.

그 꽃은 여전히 작고 연약했지만...

"응. 예뻐."

꼿꼿이 고개들고 있는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

.

먼 훗날, 그가 가져온 꽃이 바람꽃이 아닌 노루귀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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