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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18화 (18/117)

〈 18화 〉 쉼터

* * *

나는 흙투성이인 손을 씻고자 천막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흙놀이를 하느라 바쁘구나."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던 레베카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대사는 언뜻 들으면 짖궂었지만, 목소리는 그저 나긋했다.

나는 레베카의 따듯한 시선이 조금 멋쩍었지만…

한편으로 마침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편리한 레베카만 있으면 굳이 손을 씻으러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녀의 농담에 맞장구 쳤다.

"원래 예쁜 꽃을 보면 지나칠 수 없는 법이죠."

"……?'

나는 능청스레 레베카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레베카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풉하고 깔깔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어디서 못된 것을 배웠구나."

중의성이 담긴 농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레베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친히 물을 내려주셨다.

역시 칭찬은 드래곤도 웃게 한다.

나는 손을 헹군 김에 바로 아침밥을 차리려고 했다.

"오늘이야말로 당근스프나 해볼까요?"

"멈추거라."

대충 생각나는대로 용과 어린애가 질색할 메뉴를 말했더니 그녀가 정색했다.

당근이 그렇게 싫은가?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야채가 불쌍해서 피식 웃었다.

"붕대 꼴이 형편없구나."

그러나. 내 감상과 달리, 레베카는 내 손을 감싸쥐며 말했다.

저항할 수 없는 힘 때문에 나는 그녀와 마주보는 자세가 되었다.

레베카는 검붉게 물든 붕대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이 상태로 요리를 하겠다고? 그대는 입 짧은 아이보다 철딱서니가 없구나."

고운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엄격한 목소리로 나를 타일렀다.

어쩌다가 데이지보다 철 없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살짝 억울했던 나는 자존심을 부려보았다.

"뭐,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낫, 흐아얏!"

"어제 혼자 내버려둔 벌이다. 음… 같잖은 허세는 접어두고, 일단 붕대부터 갈자꾸나. 피가 다시 나는구나."

"아니, 이건 레베카가."

"씁."

약해빠진 나는 손쉽게 제압당해서 천막 안으로 도로 들어와버렸다.

누워서 꽃을 구경하고 있던 바람꽃이 우리를 보며 흠칫 놀랐다.

"……!"

"아, 일어났니? 안색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구나. 잠깐만 있다가 갈테니 눈치보지 마렴."

레베카는 바람꽃에게 안부를 전하고, 나를 의자에 앉혔다.

얼척 없다…

그녀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신난 몸짓으로 붕대와 약을 모으기 시작했다.

실험대상으로 전락한 나는 그 과정을 멍하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제길, 졸지에 간호사놀이를 하게 생겼다.

뭐… 어찌보면 엄청난 미녀 간호사이긴 한데…

간호사가 너무 돌팔이라서 설레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

"아흑, 레, 레베카. 제발, 살살, 살살 좀 해요. …너무 세요."

내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자 레베카가 흠칫했다.

"미, 미안하구나. 이렇게 하면 되니?"

"아니… 더 느슨하게 조여요. 아! 어흑, 잠깐만, 끊어질 거 같아여! 레베카!!"

"…그대는 엄살이 심하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레베카는 우월한 태생 탓인지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 덕분에 손재주가 지독하게 없어서 매듭하나 잘 묶지 못했다.

"아악! 나 주거! 진짜로 주거!!"'

"……힉!"

내가 비명에 놀란 바람꽃이 담요를 덮고 숨어버렸다.

저런.

나도 모르게 분위기를 타서 아픈 애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말았다.

'반성해야지….'

나는 입 다물고 레베카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흠…."

고작 붕대를 매는 것에 불과하지만, 레베카의 태도는 명의나 다름 없었다.

물론 솜씨는 형편 없었지만.

나는 무엇이 그녀를 절박하게 만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러고보니 엊그제 다친 바람꽃을 치료하던 날, 내가 레베카를 보고 파멸적인 손재주라고 놀렸었다.

'그 당시에 아무 반박도 못하더니….'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은 그때의 오명을 씻어내려는 레베카의 야심찬 계획이 아닐까…?

"이, 이게 아닌가?"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레베카의 무식한 손보다 데이지의 고사리 손이 훨씬 유능할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말했다가 레베카가 삐치면 곤란해서 잠자코 있었다.

나는 이 고문 행위를 해결하기 위해서 남은 팔로 은글슬쩍 그녀를 도왔다.

거기에 레베카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말을 걸었다.

"그래서 데이지랑 좀 친해졌어요? 제 덕분에 소원 성취하셨잖아요."

언젠가 내게 데이지와 함께 자보고 싶다고 하소연하던 레베카였다.

어젯밤을 계기로 그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궁금했다.

뭐, 어젯밤의 까탈스런 데이지를 봐선 결과가 썩 좋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후우."

아니나 다를까. 레베카는 깊은 한숨부터 쉬었다.

그 탓인지 그녀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이때 다 싶어서 진도를 훅 뺀다.

"애가 밤새 그대만 찾더구나… 그 탓에 마법으로 재워두었다… 대체 내가ㅡ"

레베카는 마침 고민이었다는 듯이 말한다.

대충 강제로 데이지를 재워야해서 속상하다, 데이지가 나만 찾아서 섭섭하다, 데이지가 자신을 고까워 하는 이유가 뭘까, 등의 하소연이었다.

아무래도 간밤은 레베카에게 작은 시련이었나보다.

그런데 반해 나는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밥 못하는 엄마와의 클라스 차이지.'

아이가 나를 잘 따라준다는 사실이 내게 만족감을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데이지의 호의는 인프린팅 효과인지 아니면 어떠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내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아이의 모습은 약간 의존증처럼 보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같이 지낸 레베카조차 거부하는 것은 잠재적인 문제였다.

'레베카한테만 그러는 거면 차라리 다행이지.'

만약 다른 사람들도 거부한다면 문제가 심각할 것 같다.

불안과 의존은 험한 세상에서 아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니 사람을 받아들여야한다.

나도 영원히 곁에 있어줄 수 없을테니.

나는 레베카의 하소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한 번 데이지랑 말해볼게요."

"응… 부탁하마."

어찌됐든 데이지에 대한 주제로 붕대도 얼출 마무리되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레베카가 내게 붕대를 감아주려는 게, 그녀 나름대로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려던 노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도 머리를 잘 빗어줄 수 있거늘…."

실제로도 애를 좋아하는 드래곤은 사람을 좋아하는 개가 사람에게 버려진 것처럼 기가 죽어버렸다.

그녀에게 힐링이 필요해 보인다. 뭔가 좋은 게 없을까….

­부스럭.

나는 문득 꼼지락거리는 담요를 발견하고, 고양이 대신 강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힐링은 강아지한테 받는 법.'

뭐,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나는 일단 멘탈이 나간 드래곤과 담당 대상을 교대하기로 했다.

그나마 강아지가 고양이보다 덜 까칠하겠지.

"죽상 그만하고, 밥 차리고 나면 쟤 좀 돌봐줘요. 아직 거동이 불편할 거예요."

"밥?"

­!?

밥이라는 말에 담요에서 귀가 삐져나왔다.

…그러고보니 쟤가 이틀은 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뭐라도 먹어야겠네.'

나는 배고픈 숲속 친구들을 위해 내 본분을 다하러 나섰다.

애정에 굶주린 드래곤과 배고픈 새끼 늑대.

…뭔가 잘 어울리는 한쌍 같다.

**

오늘도 어김없이 내가 차린 아침.

메뉴는 당근 스프에서 틀어서 고기와 야채를 적당히 섞어만든 잡탕죽이었다.

환자도 있거니 해서 푹 끓인 탓에 식감은 별로였지만, 향신료와 재료를 있는대로 부은 탓에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다.

그러나, 내 야심작은 평소보다 인원 1명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뎠다.

그건 음식의 맛이 문제라기보다는 손님들의 태도가 문제였다.

데이지에게 거부 받은 반동 탓인지… 레베카의 호의는 내 생각보다 과했다.

­와구와구.

"옳지. 잘 먹는구나. 그래도 천천히 먹으렴."

레베카는 잘 먹지 않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저 푸른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반면에,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바람꽃은 그 상황이 몹시 불편한 듯 입맛을 다셨다.

"…알아서 먹으면 안되나."

"씁. 자, 아."

"……아."

아이는 어째 주눅 든 느낌으로 레베카의 무릎 위에서 음식을 받아먹었다.

가끔 소심하게 저항하긴 했지만, 레베카가 쓴소리를 내면 금세 포기했다.

'거대 악어한테 눌려버린 강아지 같네.'

왠지 모르게 바람꽃은 레베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본능인지 뭔지 몰라도… 이건 겁을 먹은 게 분명해 보였다.

멀리서 보면 잔뜩 쫄아있는 강아지한테 억지로 밥 먹이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레베카는 마냥 행복한 지 웃고 있었다.

'그래, 행복하면 됐지.'

나는 희생당한 강아지에게 눈을 떼고, 아까부터 내 옷자락를 당기는 힘에 고개를 돌렸다.

"피터…."

내 옷을 늘린 데이지는 간밤에 마법으로 숙면하셔서 그런지 얼굴이 반질반질했다.

그런 데이지가 레베카의 품 속에서 밥을 먹고 있는 바람꽃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한 아이 치고는 제법 적대적인 눈빛이어서 놀랐다.

'잔뜩 뿔이 나셨네.'

내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머리통을 톡톡 두드려주자,

데이지는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또래 아이에 대한 경쟁심리의 발로인지… 그녀는 급기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평소 식탐이 있던 데이지에게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나는 커다란 결심을 한 데이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해달라면 못해줄 것도 없지.'

"아."

아기새에게 먹이주는 느낌으로 비행기를 운영한다.

입술 가까이 다가가서 기다리자, 작은 입이 벌어진다.

"…아."

눈까지 감는 애한테 장난칠 수 없어서 그대로 착륙시켰다.

남이 숟가락을 오물거리는 감각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혀까지 이용해서 깨끗해진 숟가락은 마치 새것 같았다.

소소한 떼쓰기가 받아들여져서 인지,데이지는 언제 짜증냈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맛있어…!"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지.

밥 먹을 때는 그렇게 웃으면서 먹어야한다.

결국 나와 레베카는 식은 죽을 먹어야했지만.

그것도 그럭저럭 맛있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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