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중간자리(2)
* * *
레드 드래곤, 레베카는 천년 전 마족과의 전투까지 기억하는 고룡이었다.
드래곤이란 존재는 브레스 한 번으로 산을 지울 수도 있고, 하룻밤만에 성을 만들 수 있으며, 마음이 내키면 하늘의 별조차 떨어뜨릴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망각의 축복을 받지 않은 만큼 용의 지혜란 끝도 없이 무한하고 광대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레베카에게 불가능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불가능한 것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마치 지금처럼.
"……."
레베카는 조금 난감한 눈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나뭇가지로 들고 있는 소녀를 봤다.
등을 돌리고 있는 아이는 흙 위에 삐뚤어진 원을 그리고 있었다.
용이 보기에는 그 작은등은 더없이 초라하고 우울해보였다.
마음 약한 그녀는 아이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전에도 나섰다가 거부당한 전적이 있으니 신중해야했다.
특히 동반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위기의 상황이었기에 더욱 조심해야한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렸다.'
레베카는 홍옥을 반짝이며 기회를 엿봤다.
"…언제와…."
이윽고 아이는 삐뚤어진 원 안에 점과 네모를 찍었다.
멍하니 그림을 지켜보는 아이는 지치고 우울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게 기회인가?'
전에 동반자가 말했다.
눈높이를 맞추고, 공감해주는 게 아이들과 친해지는 지름길이라고.
용은 아이의 그림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그 그림이 엊그제 먹은 참깨빵과 비슷해 보였다.
레베카는 정답을 알아차렸다는 생각에, 재빨리 말했다.
"아주 맛있겠구나."
"……힉!"
아이는 경악한 눈으로 레베카를 노려보며 그림을 가렸다.
그림을 감추려는 아이의 모습은 겁 먹은 토끼가 애써 용기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레베카는 기대와 다른 아이의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양팔을 펼치고 그녀를 노려보는 아이의 자색 눈동자에 물기가 생겨서 반짝거렸다.
"으, 나빠…! 먹지마!"
"…아니, 난 그저 맛있어 보인다고…."
"으으, 안돼에! 저리가!!"
아이는 양팔을 빙빙 돌리며 레베카를 쫓아냈다.
심상치 않은 거력에 용은 속수무책으로 물러선다.
'왜, 내가 뭘 했다고.'
레베카는 아이의 격렬한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칭찬했을 뿐인데….
또 거부 받았다는 생각에 우울했지만…
언제나 위로해주고, 해답을 알려주던 동반자가 없었다.
따라서 레베카는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했다.
용이 지닌 지고의 두뇌는 순식간에 답안을 떠올렸다.
혹시…
'…내가 뺏어먹을까 걱정하는 걸까?'
자신이 아이의 빵에 욕심냈다고 생각해서 과민반응한 게 아닐까?
그러고보니… 이 아이는 평소에도 식탐이 있었다.
용은 그림조차 넘겨주지 않으려는 아아의 고집이 마냥 귀여웠다.
'후후, 귀엽구나.'
레베카는 자신만만하게 확신을 내고, 데이지에게 사과하기로 했다.
"미안하구나. 뺏어먹지 않을테니. 용서하렴."
그러나.
그녀의 사죄에,
"…흐윽."
데이지는 오히려 눈을 더욱 글썽거렸다.
곧 울음이 터질 듯한 아이를 보고, 레베카는 당황해서 손을 이리저리 휘젓었다.
"어, 왜, 왜, 응?"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용에게 데이지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히으, 피터는… 먹을 게… 아니… 흐으윽…."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보며,
지혜로운 용은 생각했다.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천년의 삶으로도 불가해한 영역이라고.
**
나는 데이지를 레베카에게 잠시 맡겨두고,
바람꽃과 함께 저세상 두더지의 서식지로 찾아왔다.
그 놈이 사는 굴 안은 서늘하다기 보다는 습하고 갑갑했다.
아마도 밀폐된 환경이라서 좀처럼 환기가 되지 않은 탓이리라.
"크르…."
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풍기는 불쾌한 냄새에, 내게 들려있는 바람꽃이 하악질을 해댔다.
원수의 냄새를 알아차린 듯이, 이를 드러내고 버둥거려서 안고 있기 불편해졌다.
'후우.'
나는 물릴까봐 차마 토닥이지는 못하고, 그저 아이를 고쳐 안았다.
"……."
들썩이는 와중에도 바람꽃은 이를 악물고, 찌푸린 눈으로 어둠 속을 노려보고 있었다.
흥분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몸이 살짝 위태로웠다.
괜히 아픈 애를 엄한데 데려갔다가 상하게 하면 엄마에게 크게 혼날 것이다.
나는 혹시라도 이가 상할까봐 넌지시 타일렀다.
"약속했잖아. 얌전히 있기로."
"…알아."
바람꽃은 시린 푸른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야성이 깃든 표독스러운 눈이 내게 길이나 안내하라고 보챘다.
'하긴. 지금도 참아주는 건가.'
신체접촉을 꺼려하는 아이가 얌전히 안겨있는 것만으로도 기특한 일이었다.
뭐… 그 인내심의 동기는 썩 바람직한 종류가 아니지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대신에… 우리를 좀 도와줘야겠어.)
'…복수라.'
복수는 허무할 뿐이라는 흔해빠진 말이 있다.
그리고, 그런 복수를 위해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마다한 아이가 있었다.
(뭐든, 뭐든 좋아… 그 새끼들… 죽여버릴거야….)
현대로 치면 초등학생인 어린애가 내뱉은 말은 살의로 가득했다.
내가 불 붙여버린 시퍼런 분노는 원한으로 연료 삼아서 활활 타올랐다.
'…참 잘하는 짓이네.'
문득 어린애한테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 넣은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바람꽃이 어리다고 해서 덮어 놓기에는 내가 알게 된 것이 너무 많았다.
마가린이란 쓰레기가 저지른 죄악은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가 아이에게 새긴 상처는, 갚아주지 않으면 언젠가 고름이 될 종류였다.
'…원한을 잊지 못하는 종족인가.'
나는 바람꽃의 분노가 언젠가 필연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이런 극단적인 제안을 떠올린 것도,
그녀에 대한 공감과 그 자에 대한 보복심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이 복수는 그녀를 곧바로 고향에 데려다주지 못한, 내 나름대로의 보상이었다.
어리다고 해서, 복수할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죄를 지었으면 혼나야지.'
나는 정의로운 주인공과 달리 속이 아주 좁은 사람이었다.
암덩어리도 생명이라서 소중하다는 생각따위는, 사이다식 웹소설에 절어버린 뇌가 용납하지 않는다.
내가 보는 이야기에 사이다와 권선징악이 빠져선 안된다.
죄인은 어떠한 형태로든 대가를 치루어야한다.
**
바람꽃과 함께 최심부에 도착했다.
발 밑에 등불을 비춰보자, 꾸벅꾸벅 졸고있는 돼지머리가 보였다.
3일 정도 봤으면 정이 들 법도 하지만… 그 생물체는 여전히 혐오스러웠다.
촤아악.
나는 텅 비어버린 머리카락이 시들시들해 보여서 물을 부어주었다.
"끄아아악!"
시원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놈은 만족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왜! 대체, 왜! 같은 인간이… 꾸엑!"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한순간에 내 품에서 빠져나온 바람꽃이 그를 걷어찼다.
묵직한 공차는 소리와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났다.
맨발이었던 그녀는 다리를 절면서도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죽어, 죽어!"
"아악! 그만, 그마!"
돼지머리는 고통으로 울부짖었지만…
놈의 단단한 머리통을 아이의 맨주먹으로 때려봤자 크게 기별이 가지 않았다.
나는 어쩔 줄 몰라서 자신마저 상처입히는 바람꽃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쓰레기 하나 족치자고 몸이 상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당히 지켜보다가 그녀를 말렸다.
"진정해. 다치잖아."
"놔, 놓으라고! 놔아!"
내게 붙들린 바람꽃은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는 듯이 버둥거렸다.
그러나, 이미 쇠약해질대로 약해진 몸은 금세 제압당해서 축 늘어졌다.
"…똑같이 만들어줄 거야… 죽여버릴 거야…."
나는 흐느끼는 목소리를 들으며 퉁퉁 부은 마갈린을 본다.
그의 단추구멍처럼 작은 눈은 바람꽃을 향한 채로 쉴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네, 네 년… 어째서."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제멋대로 다룰 수 있었던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보이는 모양이다.
문득, 자신이 저지른 업보가 눈앞에 나타난 사내의 기분이 궁금했다.
'반성? 후회? 아니면, 외면?'
설사 그 뭐가 되었든.
더이상 놈에게 들을 말이 없었다.
우리는 알랑한 변명이나 고해를 듣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왔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는 내게도 자각이 필요했다.
바람꽃은 애도하기 위해 왔다.
글귀로도 남겨지지 못한 동족의 넋을 달래고자 했다.
"오, 오지마! 오지마라고!!"
놈은 꼴에 제 목숨줄이 간당간당하다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내가, 내가 누군지 알고도 이러는 것이냐! 나, 난 남작따위가 아니다. 차기르 폰 비우터 백작…! 백작가의 장남이란 말이다! 백작! 백작이라고!! 지, 지금이라도 나를 놓아주는 게 신상에…."
그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다.
자신을 건드리면 가문에서 복수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놓아주면 원하는 것을 없던 일로 해주겠다, 자신을 찾아올 호위가 소드 익스퍼트급의 실력자라는 등….
갖은 회유와 협박을 늘어놓았다.
자기 딴에는 끝까지 숨겨온 한 수 같지만, 내게 그의 비밀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역시 고위귀족이었나.'
나는 그의 신분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지리멸렬한 그의 말은 처음부터 구색이 맞지 않았다.
일개 남작에 불과한 사내가 수 십 명이 넘는 노예를 학살할 리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불능을 고친다는 좆같은 이유로.
"저 난폭한 짐승부터 내 눈앞에서 치우라고! 털 달린 미개한 잡종이 감히 누구한테 손찌검을…"
자신의 악취미를 무용담인 것처럼 내게 자랑하던 놈은,
오히려 목을 뻣뻣이 들고서 자신이 학대한 아이에게 모욕을 가했다.
그는 단 한번도 그녀에게 사죄하지 않았고, 죄책감을 갖지도 않았다.
"…누가 짐승인데…."
나는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바람꽃의 귀를 손으로 덮었다.
끔찍한 개소리 때문에 그녀의 복슬복슬한 귀가 썩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나는 후회가 들었다. 진작에 저 주둥이에 재갈을 물려놨어야 했다.
이 새끼한테 일말의 죄책감을 기대한 내가 병신이었다.
'그냥 맞아 죽도록 내버려둘 걸.'
한편으로,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의 역겨운 본성 덕분에 마음 속의 저울이 확 기울어졌으니.
나는 망설이지 않고 놈의 아가리에 신발을 물려주었다.
"아아악…!"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를 두고, 바람꽃에게 속삭였다.
"이걸론 한참 부족하지?"
"…세 명이 죽었어. 전부 친구였어…."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물기어린 시퍼런 눈동자는 여전히 울부짖는 원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의 개념일 것이다.
이에는 이로, 피에는 피로.
나는 같잖은 현대의 윤리나 상식으로 바람꽃을 말리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어떤 경우라도 살생은 옳지 않다는 말이 틀려 먹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간혹, 살아있는 것보다 죽어버리는 게 나은 사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해서 자식을 건드리는 말종이라던가….
'…씹새끼들.'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 복수를 약속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을 공감하기에… 오히려 작은 손에다가 식칼이라도 쥐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선 안된다.
나는 손톱이 파고든 작은 주먹을 펴주었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야."
"…싫어, 반드시, 찢어 죽일거야! …약속했어! 내, 내가 복수해주기로 했어…."
바람꽃은 자신을 말리는 손을 쳐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녀에겐 숙제가 있었다. 그것도 어린애가 지키기에는 빠듯해 보이는 숙제였다.
혼자 힘으로 벅찰 게 분명했다.
무작정 악을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애들이 풀지 못하는 숙제는 어른이 도와줘야하는 법이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이대로 끝내긴, 아쉽잖아? 말했지. 죽으면 끝이라고."
"……뭐?"
바람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 눈가를 쓸어주며 말을 이었다.
"자 생각해보자. 네 말대로, 저 새… 자가 죽는다고 치자. 그래서 그러면 쟤가 너나, 네 친구들한테 쥐똥만한 반성이라도 할 거 같아? 솔직히 말해봐. 아니지?"
"…응…."
"그럼 고작 저거 하나 치운다고 치자. 그러면 네 친구들의 원한이 풀릴 거 같아? 저 씹, …돼지의 한 마리가 그렇게 가치 있어?"
"……없어."
"그래서 그냥 죽이면 아깝지?"
"그, 그런가…?"
아이는 내 개소리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지, 어리둥절하며 고민하는 눈치였다.
"들어봤니? 죽음은 하나의 안식이라고. 이거 유명한 말이야."
"으응."
바람꽃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이제부턴 오, …아저씨가 하는 거 보고 배워. 나중에 써먹으라고."
나는 성공적으로 그녀의 동의를 얻어내고, 황망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던 두더지에게 다가갔다.
땅에 박혀서 머리만 내민 괴물을 처리하는 건 무척 손쉬운 일이다.
거기에 어떤 기술도 필요하지 않다. 어린애의 손으로도 가능할 정도다.
아마도 놈이 죽는다면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을 외로운 죽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너무 허무하고 자비로운 일이었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백작은 목숨도 여러갠가? 어디 시험해봐도 되냐?"
"사, 사혀주시어! 내하 자모해써!"
위세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내는 어눌한 말로 내게 빌었다.
그러나, 사죄의 대상이 여전히 잘못 되었기에 힘껏 걷어차 주었다.
"커헉…."
"울어도 보고, 빌어도 된다. 근데.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을거야. 오늘은 작별인사하러 왔거든."
"사, 혀져…."
"야, 누가 죽인대? 웃어, 임마. 정말로 우린 이제 떠날 거거든. 이건 작별 선물이고."
나는 피투성이인 그의 코앞에 레베카에게 받았던 당과를 늘여놓았다.
꿀과 설탕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주 달콤한 디저트였다.
꿀꺽.
그는 피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과자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설탕이 묻은 손을 털면서 그에게 말했다.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가 있어."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동화 속 남매처럼, 우리는 입구까지 과자를 줄줄이 늘여두면서 갈거야."
"…그헤 무흐 으미요…?"
"멍청하긴. 생각해 봐. 인위적인 과자의 행렬를 보면, 그 누구라도 찾아와 주지 않겠어?"
"아…."
마갈린 비우터는 꺼져가는 눈을 반짝였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한 남자는 내 말에 희망을 느낀 듯했다.
"고하소… 고하어…."
그는 기어이 질질 짜면서 내게 감사를 표했다.
나는 추한 남자의 눈물이 보기 싫었다.
곧바로 등을 돌려서 바람꽃을 챙겼다.
"…저기."
그녀는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쉿."
"……."
나는 데이지보다 한 뼘정도 키가 큰 바람꽃을 안아들고,
그녀에게는 과자를 흩뿌리는 임무를 맡겼다.
아이는 시키는 대로 묵묵히 과자를 뜯고 바닥에 뿌렸다.
"잘하는데?"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그녀의 솜씨를 칭찬했다.
과자 부스러기는 눈에 잘 띄는 행렬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람꽃은 내 칭찬이 무색하게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없어지잖아."
그녀는 발 밑의 개미들을 가리켰다.
과연, 어린애가 멍청한 남자보다 훨씬 더 현명했다.
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이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그래서 의미가 있지. 저 남자는 오래 살거야. 희망이 있으면, 사람은 버티는 법이거든."
"…이상해. 그게 뭐가 고통이야? 죽는 것보다 괴로워?"
"응, 괴로워. 때때로 희망이… 인간에게 가장 잔인한 거야. 올 리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만큼 끔찍한 것도 없거든."
"알 것 같은데, 모르겠어…."
바람꽃은 어지러운 듯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알쏭달쏭한 얼굴인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하긴 개소리긴 해.'
솔직히 말해서…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어린애를 상대로 어려운 말로 넘어가는 것만큼, 간편한 게 없었기에 늘어놓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바람꽃이 복수하기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손에 피가 묻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우리와 함께하게 된 아이가, 언젠가 홀가분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떠한 선택을 내리는 건, 좀 더 어른이 된 그녀의 몫이다.
똘똘해보이는 그녀가 어른이 되면… 그 때는 내 개소리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아님 말고.
**
나와 바람꽃은 저세상 두더지를 혼내준 것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
비밀을 공유해버린 탓인지 그녀와 조금 더 친해진 기분이었다.
이로써 나는 강아지귀 미소녀와 비밀친구가 되었다…!
"풉, 이제 아저씨랑 비밀친구네."
"…기분 나쁜데."
위험하고 병신같은 드립이 떠올라서 말했더니, 어린이의 날카로운 눈빛이 유난히 따가웠다.
그 경멸 어린 눈이 어째 뉘집 사는 여동생과 똑닮았다.
그것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얘한테는 자꾸 헛소리하게 되네….
"그대여!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게냐!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지 알긴 아니!"
야영지로 돌아오자마자, 낭랑한 질책이 나를 반겨주었다.
나를 반겨주는 레베카의 얼굴은 왠지 죽상이었다.
뭐가 그리도 슬프신지… 항상 자신만만하게 올라가 있던 눈가가 축 쳐져있었다.
그녀는 개뼈다귀가 냉장고 밑에 들어간 누렁이처럼 구슬퍼 보였다.
'설마.'
나는 뭔가 예상이 되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세상에 최강의 생명체인 드래곤의 기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흐으으, 피터! 아줌마가…!"
"아."
아니나 다를까.
작달만한 꼬맹이가 못된 아줌마를 탓하며 총총 뛰어오고 있었다.
한바탕한 데이지의 얼굴은 무척 촉촉해보였다.
나도 시급히 그녀를 달래주려다가, 문득 내 팔이 만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 터…?"
데이지 또한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뛰어오다가 말고 굳어버렸다.
그녀는 흔들리는 자색 눈동자로 나와 내게 들려있는 바람꽃을 번갈아 보았다.
"……왜?"
왜냐고 물어도….
데이지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내게 물었다.
촉촉하게 흐려지는 눈이 무척 난감했다.
어쩌지…
왠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서 땅콩 때러간 누렁이의 슬픔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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