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수도에서 생긴 일(2)
* * *
두 아이의 신경전은 바람꽃의 TKO로 끝이 났다.
닥터(피터) 입장에서 더이상의 승부는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시했어…."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패배한 데이지는 쓰라린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값진 교훈을.
교훈의 대가로 눈가가 붉어진 아이는 곤란했던 자신을 외면한 남자의 옷자락을 꼭 쥐며 웅얼거렸다.
"너무해."
인생의 쓴맛을 느낀 데이지가 뾰로퉁하게 입술을 내민다.
순간, 나는 그 오동통한 입술은 검지와 엄지로 집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삐진 애한테 그랬다가 더 미움을 받을 지 몰라서 얌전히 연행되기로 했다.
귀엽다고 자꾸 놀렸다가 애 성격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랬구나, 속상했구나. 내가 나빴네."
"하지마…."
나는 데이지를 적당히 다독여주고, 공범인 레베카에게 눈짓했다.
때마침 저녁 시간이었다. 어머니들이 충치를 뽑은 애들한테 돈까스를 사주는 것처럼, 삐진 꼬마를 달래는 데 맛난 음식만한 게 없다.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처럼 수도에 왔으니 고기라도 썰어보자꾸나."
"……!"
"……!"
레베카가의 말에 두 꼬마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고기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자매처럼 똑닮아 있었다.
그러고보니 얘네 둘 다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편식쟁이였다.
'이 사람들은 고기만 음식인 줄 안다니까.'
나는 언젠가 이들에게도 야채의 대단함을 알려주리라 결심했다.
우리는 밥 사주는 드래곤의 뒤를 졸졸 따라서 나선다.
이 세계에 오고나서 처음으로 남이 해준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제법 기대가 된다.
인생 첫 중세 판타지의 요리여서 조금 설렜다.
'잠깐, 처음이 맞나…?'
"그대여, 왠지 눈빛이 불손하구나…."
"기분 탓입니다."
뭐… 레베카의 음식은 밥이 아니었으니 예외로 치자.
**
미식가를 자칭하는 레베카가 고른 식당은 활기가 넘쳤다.
제법 연식이 느껴지는 목조 건물은 손님들이 북적거려서 맛집처럼 보인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나와 레베카는 비어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각자 애들을 끼고 앉았다.
조금 불편했지만 이 곳에는 어린이를 위한 높은 의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 꼬꼬마는 기분이 좋은 듯이 다리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밥 먹을 생각에 무척 신난 모습이다.
데이지는 호기심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주변의 소음 때문에,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피터, 스테이크 마싰어?"
"스테이크는 진리죠."
"진리…?"
어려운 단어였던지 아이가 언제나처럼 되묻는다.
"언제나 옳다는 소리예요. 이를테면… 팬케이크가 맛있다는 것처럼."
"아! 그게 진리!"
데이지는 찰떡같이 이해했다는 듯이 무릎을 탁쳤다.
근데 그거 내 무릎인데…?
낯선 환경이 신기한 아이는 상기한 얼굴로 여러가지를 조곤조곤 물어보았다.
저기 시끄러운 사람들이 마시는 나무통이 뭔지, 맛있는 음식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테이블 위에서 옷 벗고 춤추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등….
"그것도 몰라? 저런 건 주정뱅이라고 하는거야. 그것보다도 저어기…"
거기에 또다른 꼬맹이인 바람꽃까지 끼어드니 조금 더 혼란스러워 졌다.
특히 애들의 질문은 가끔 영문을 알 수 없을 때가 많았기에, 레베카까지 합세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주변의 분위기에 물드는 것처럼 떠들어대자, 시간은 금방 지나서 음식이 나왔다.
레베카가 선택한 맛집은 내 기준으로도 제법 괜찮았고, 두 꼬마들도 만족스럽게 흡입했다.
그 조그만 몸집에 산더미 같은 음식이 어디까지 들어가는 지… 애들의 먹성이 진짜 판타지 같았다.
그래도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키킥, 다 묻었어."
"으이?"
꼬맹이처럼 소스를 묻힌 입가를 닦아주니, 데이지가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이는 점이 돌보기 편했다.
얼추 식사를 끝마쳤다고 생각하며, 다른 의미로 얌전한 아이와 레베카를 보았다.
"맛있니? 부족하면 더 시켜줄까?"
끄덕끄덕.
뭔가 빨강색과 파란색이 사이좋게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고향이 생각난다.
'아! 완전 태극기….'
여기 검은색까지 있으니, 추가로 흰색만 있으면 조합이 완벽할 텐데….
그런 점에서 약간 아쉬움이 들었다.
…이런 시덥잖은 생각은 집어치우고.
나는 레베카에게 내일 있을 일정을 말했다.
떠들썩한 곳이라서 대화를 나누기 적절하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것이라도 정해 두고 싶었다.
"레베카, 내일은 정보 길드를 우선적으로 찾아봐요."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바람꽃의 귀를 덮으며 말했다.
"그 상인을 찾아야한다고 했었지."
"네. 그 자가 핵심이예요."
원작을 알고 있다지만, 나는 연옥의 정확한 위치나 내부 구조를 모르고 있었다.
활자로 엿보았던 세계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에, 내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꾀고 있다기엔 한없이 모자랐다.
그런 점에서, 그 자가 필요하다.
바람꽃과 같은 북부의 수인족을 판매하는 노예상인.
'뒤틀린 암트만.'
그 놈이 우리를 연옥으로 안내해줄 길잡이였고, 동시에 열쇠지기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시점이 한정된 소설에서 비중이 없는 인간의 동선까지 일일이 적혀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수도에 숨어있는 놈을 찾기 위해선 어느정도 수작업이 필요했다.
내 계획을 이해한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위한 정보길드구나."
"네, 저희 대신에 그 자를 찾을 사람이 필요해요."
나와 레베카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기에는 전문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어린애를 둘이나 데리고 있는 만큼, 우리는 신상털이에 썩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원래 사람 찾는 데는 전문가가 나서는 게 맞았다.
"그 문제는 내가 아는 곳이 있으니 쉽게 해결할 수 있겠구나. 그나저나…."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레베카는 묘한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은근한 눈빛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본다.
홍옥같은 눈동자에는 어린 아이 같은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레베카는 기름이 묻어서 반짝거리는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대는 참 신기하구나. 알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도… 어쩜 이렇게 가지각색일까?"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붉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갈라졌다.
나는 이럴 때의 레베카를 마주볼 자신이 없었기에, 눈을 돌리며 그저 머리를 긁적였다.
나와 그녀는 맹약에 의해 서로가 진심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말해주지 않는 한 서로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레베카가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나를 배려해서 넘어가 주었지만...
결국 호기심 많은 그녀였기에, 편중되어 있는 내 지식의 출처나 툭 튀어나온 내 정체가 궁금할만도 했다.
'소설로 봤다고 말해도 믿어주겠지….'
레베카는 내 이해자였다.
이 세계에서 오직 그녀만이 내 말이 온전한 진실이라는 것을 알아줄 것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무거운 미래를 유일한 이해자인 레베카에게 털어놓고, 그 무거운 짐을 덜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ㅡ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심정이 복잡한 레베카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줄 수 없었다.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고, 재촉하는 은근한 붉은빛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비밀이 많은 사람은, 왠지 매력적이지 않아요?'
"흥… 갈수록 가증스럽구나."
레베카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젓고, 다시 바람꽃을 돌보는 데 관심을 돌렸다.
그녀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무척 평온해보였다.
**
"…하아슘…."
"배부러…."
배불리 먹인 아이들은 여관까지 돌아오는 길 내내 꾸벅꾸벅 졸았다.
비몽사몽한 애들은 씻기고, 방에 데려다 놓으니 알아서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나는 이층 침대에는 오르지도 못하고, 대자로 뻗어버린 애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긴. 짧은 다리로 하루종일 돌아다니면 피곤할만도 하지.
"후, 이제 좀 쉬겠네…."
잠든 애들을 보고 있으려니, 드디어 하루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지나 바람꽃이 비교적 얌전한 애들이라고 해도… 하루종일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은 역시 진이 빠진다.
역시 어린애는 자고 있을 때가 제일 귀여운 법이다.
한편, 애들이 골아 떨어진 덕분에 오늘 들려주려고 했던 'TS미녀와 야수'는 물 건너가게 되었다.
'…뭔가 좀 아쉽네.'
매일밤마다 조교된 탓인지, 야심차게 준비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는 게 어째 아쉬웠다.
그 김에, 나는 방을 나와 영혼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복도로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은은한 장미향을 데리고 왔다.
고개를 돌려, 복도 끝 창가를 보았다.
창백한 달빛에 반사된 먼지가 환하게 나풀거린다.
그 곳에 본연의 붉음과 광원이 섞여서 반짝거리는 여인이 있었다.
꺼질 것처럼, 때때로 피어오를 것처럼… 불꽃을 닮은 그녀는 창가에 걸텨 앉아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순간,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광경에 숨이 막혔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처연해보여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늘도 달을 보고 있었구나.'
밤이면 달을 보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레베카는 하현으로 치우친 달무리를 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
그녀는 말을 걸면 그대로 깨질 것처럼 보였다.
서툴렀던 나는 그저 곁에 서서 묵묵히 잔을 채워주었다.
술잔에 담긴 와인은 그녀처럼 영롱한 붉은색이었다.
이따금 내게 주어진 술은 알싸하면서 달콤했지만… 쓴맛이 짙게 났다.
나와 그녀에게서 풍기는 단내를 맡으며, 달을 보았다.
흐릿한 하현달은 점점 기울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차오를 것이다.
'한달하고 스물.'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은, 천년을 견딘 이에게 억겁과도 같이 느껴질 것이다.
나는 서툰 말재주로 내게 기대오는 근심을 달래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저 침묵하며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준다.
그것만이 못난 남자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
"으으…."
아이의 달콤한 잠을 깨운 것은, 아랫배에 찌르르 울리는 위험한 알람이었다.
그녀는 졸음에 취해 비몽사몽했지만, 이윽고 자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뇌리에 떠올랐다.
"윽."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마법처럼 위기가 찾아왔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다리를 꼬았다.
"…시이."
그녀는 잠을 깨고 일어나야한다는 울적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귀찮았다.
그냥 참고 이대로 잠들어 버리면…
너 애기야?
문득 자신을 '애기'라고 놀리던 얄미운 털뭉치가 생각났다.
동시에,
(윽, 오줌싸개.)
실수하면 애기를 넘어서는 축축한 불명예를 얻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됏…!'
데이지는 가뜩이나 자기보다 어린 '애기'한테 그런 소리까지 들을 순 없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창피했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깨어나 버린 그녀의 의식은 금세 또렷해진다.
데이지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모든 것을 흐릿하게 덮어버리는 어둠은 그녀에게 친숙한 것이었다. 어둠은 항상 그녀의 곁에 있었으니깐.
그러나… 데이지는 그런 어둠이 오늘따라 조금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방문 구석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 유독 음산해보였다.
왠지 침대 아래로 내려가면 어둠 속에 숨은 누군가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다.
'나올 거 같은데….'
데이지는 여러가지 의미로 나올 것 같은 상황에 부르르 떨었다.
"피, 피터…?"
그녀는 도움을 구하듯이 자신의 주변을 꾹꾹 누르며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더듬어봐도 옆자리는 텅비어 있었다.
'어떡해…!!'
그녀의 작은 머리에 온갖 불안과 걱정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낮에 본 저택… 비명소리… 사라진 피터… 어둠 속에 숨은 귀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서운 망상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대한 사안은 따로 있었다.
'화장실…….'
아이는 몸집이 작았던 만큼 금방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그녀는 선택해야했다.
현재의 두려움과 미래의 수치, 둘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
'…가야해.'
인고의 시간은 짧았다.
데이지는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또 다른 두려움이 그녀에게 용기를 부여했다.
'가야해…!'
머릿속의 경종이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고 일러주었다.
행동하지 않으면 후회한다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이는 방문 앞에 서서 멈칫했다.
"…혼자선 안돼."
데이지는 자신이 지금보다 어렸을 때 들은 경고를 떠올렸다.
(…밤에 안 자고, 혼자 다니는 나쁜 어린애는… 귀이신이 잡아갈거야~!)
그립고도 장난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다.
데이지는 귀신이 싫었다.
또 다시 잡혀가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지 않고, 언제까지 함께 있고 싶었다.
따라서, 그녀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과 귀를 집중해서 주위를 살펴본다.
때마침 근처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자신보다 '아주 조금' 큰 인형이 누워있었다.
'털뭉치…!'
데이지는 반가움에 그 볼을 찰싹 두드렸다.
"아, 야… 아파!"
작지만 매운 손바닥에 바람꽃이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뺨을 부여잡은 채로, 동그랗게 뜬 바람꽃의 눈은 어둠 속에서 빛이 났다.
데이지는 그 눈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어리둥절해 보이는 털뭉치에게 말했다.
"얘."
"…머야. 도라써?"
아직 잠에서 취한 털뭉치의 혀는 꼬부라져 있었다.
데이지는 심기불편해 보이는 털뭉치에게 자기 할 말을 전했다.
"일어나. 가야해."
"…으응? 무스닐이써?"
데이지는 누군가에게 설득보다 행동이 빠르다는 것을 배웠다.
똑똑했던 그녀는 눈 비비며 하품하는 털뭉치의 잠옷을 잡고 당겼다.
"따라와."
"어어, 아아니… 잠마, 먼 마리라도…."
바람꽃은 문답무용으로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힘에,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야했다.
손쉽게 조력자를 얻은 데이지는 기세를 몰아서 방문을 열었다.
그 후, 털뭉치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손을 꼭 쥐고 복도로 나선다.
데이지의 첫 모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