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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24화 (24/117)

〈 24화 〉 수도에서 생긴 일(3) ­일부수정

* * *

한참동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던 레베카가 말했다.

"위로하는 솜씨가 썩 좋지 않구나."

그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말했다.

"이럴 때는… 그 아이를 대하듯이 다독여 주었어야지."

나를 골리려는 게 분명한 태도와 대사였다.

장난기 섞인 허튼 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보아하니, 레베카가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도발이 선뜻 대응하기 어려웠다.

"…뭐래요."

민망했던 나는 어깨를 튕김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순간, 머리가 띄워진 레베카가 혀를 쯧 차면서 내게 불만을 표했다.

"평소에는 잘만 떠들더니, 은근히 쑥맥이란 말이지."

그녀는 자신의 뒤통수로 내 어깨를 콩콩 두드렸다.

리듬감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항의가 내게 반성을 촉구했다.

나는 그 간지러운 감촉과 음해를 견딜 수 없었기에 입을 달싹였다.

"또 그러시네. 나참, 뭐가 쑥맥이예요. 그냥 할 말이 없던 거 뿐이거든요? 자, 봐요."

"크큭, 알았다. 알았어."

내가 발끈해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긁자, 레베카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내게 더 해보라는 듯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웃어넘기려는 레베카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그녀가 떼쓰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잠자코 머리를 빗어주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미끄러지듯 쉽게 새어나가던 데이지의 가느다란 머리결과 느낌이 달랐다.

약간 굽이치는 풍성한 머리결은 손가락을 붙잡듯이 감겨왔다.

레베카는 음미하듯이 눈을 감고서 흥얼거렸다.

"흠흠, 나쁘지 않구나. 누군가가 머리를 만져주는 것도."

"처음이예요?"

"아니… 그저 오랜만이구나."

그리 말하는 레베카는 어딘가 그리워 보였다.

"……."

"흠."

궁색했던 내가 잠깐 입을 다물자, 레베카는 나를 향해 고개를 젖혔다.

주변이 어두웠음에도, 선명하게 빛나는 홍옥은 나를 똑바로 비추었다.

얼떨떨해 하는 나를 눈에 담으며, 레베카는 자뭇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피터, 그대는 이따금 우리를 헤아리는 것처럼 침묵하는구나. 그건 그대의 장점이지만… 동시에 문제점이란다."

배움이 느린 아이를 가르치는 듯한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레베카는 내 가슴을 검지손가락으로 콕 누르며 새기듯이 말했다.

"기억 해두거라. 여자는 이해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다. 비록 알고 있어도 물어봐 주어야 하고, 숨기지 않고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그걸 몰라주고 섭섭하게 대접하니, 그 아이도 자꾸 불안해 하는 거 아니겠니? 때론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란다."

어째서인지 우울해하는 레베카를 위로하러 왔다가, 도리어 훈계를 듣고 말았다.

뭔가 불합리 했지만…

한편으로는 찔리는 것이 있었기에 속으로 뜨끔했다.

(…피터는 왜 안 물어봐? …내 이름.)

문득 어느 아이의 이름을 알게된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 아이는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 남자에게 실망을 표현했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딴에 배려라고 제시한 침묵이, 무관심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면, 그랬던 그 날 이후로… 내가 그녀들에 대해서 무언가 물어본 적 있었던가?

"……아."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멍청하게도, 알고 있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쯧."

내가 고개 숙이자, 레베카는 창가에서 일어나 내 앞에 마주섰다.

나보다 한뼘 정도 작았던 그녀는 뒷꿈치를 살짝 들고서, 내 얼굴을 향해 길다란 손을 뻗는다.

그러고는, 내가 그녀에게 그랬듯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면서 말했다.

"그대에게도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한동안은 넘어가주지만…. 나도, 그 아이에게도 한계가 있단다. 너무 애태웠다간 나중에 각오해야할 게다."

나는 웃음기 섞인 레베카의 경고를 들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레베카와 데이지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했다.

'언젠가 떠나리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걸까….'

내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던 데이지가, 사실은 어물쩡한 내 태도를 눈치채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여러모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후우, 이래 가지고 누가 누굴 위로하겠다고….'

나는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고,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는 여인을 보았다.

뭐가 그리도 만족스러운지, 어깨가 잔뜩 올라간 레베카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이게 그 찐따같던 호구룡이 맞나?'

어린애한테 소박이나 맞고 죽상이던 드래곤은 없었다.

그 대신에, 연상미를 뿜뿜 발산하는 천년 묵은 누님이 계셨다.

"후후, 이제보니 그대도 아직 어리구나."

연륜이 넘쳐나는 드래곤의 말씀이 모두 옳았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레베카의 언행에 왠지 모를 반발심이 들었다.

'애들한테는 힘도 못 쓰는 주제에….'

나는 이게 그녀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푼수 같은 드래곤에게 애 취급을 받고, 그대로 물러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아직 남아있는 술기운과 창백한 달빛이 나에게 만용와 광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면."

충동에 의해서, 내 머리를 쓰다듬는 여인의 손을 낚아챈다.

레베카의 가느다란 손목을 움켜 쥐고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저를, 알려 드릴까요? 과연 제가 어린애인지, 아닌지."

"호오."

내 회심에 일격에도, 레베카는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살포시 미소를 띄웠다.

"자, 뭐든 해보렴."

급기야 레베카가 눈을 감아버리니, 도리어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은은한 달빛 속에서 양팔을 살짝 벌린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뭐, 뭐든?'

나는 비현실적인 미를 코앞에 두고, 온갖 상념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낚인 거 같은데.'

이대로 일을 벌였다가는,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앞에 놓인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미끼였다.

게다가, 그녀에게서 싫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모르겠다.'

결국에 과부하된 뇌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술 때문이다, 달빛에 취했다, 미모에 홀렸다… 내가 지닌 변명거리는 많았다.

그렇게 구차하게 결심을 다지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내가 다가간다.

점점.

점점 더 가까워지는 숨결에서,

나와 같은 달콤한 술내음이 물씬 풍겼다.

아마도… 이제 곧 끝도 없이 짙어지리라.

시간이 멈추고,

생각은 사라지며,

귓가에 요동치는 맥박소리만 들렸다.

제발.

나는 내 것이라기엔 너무 부끄러운 심장소리가 어디에도 들리지 않기를 빌었다.

이제 한점.

단 한 점만 채우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ㅡ

ㅡ삐거덕…!

"……!!"

뜬금없이 벌컥 열린 문 때문에,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풀벌레도 숨죽인 적막 속에 기름칠 되지 않은 경첩의 마찰음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애써 진정하고, 흐릿한 복도를 노려봤다.

방문이 열린 위치가 어째 낯익었다.

…애당초 손님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었던 허름한 여관이다.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닫을 만한 존재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따라와."

"잠만 먼 마리라도…."

착란이 온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어린애 특유의 높은 목소리는 복도 끝까지 닿았다.

'…아이고.'

나는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는 것에 탄식하며,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왠지 숨어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텅 비어있는 복도는 달빛마저 밝았기에 마땅히 숨을 곳이 없었다.

"아…! 피터어!!"

"아 씨, 좀 놔 봐."

얘한테 레이더라도 달렸는지… 순식간에 나를 찾아버렸다.

나는 내 곁으로 뽀로로 뛰어오는 두 꼬마들이 눈물나게 반가워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특히나 작은 쪽은 무지하게 울상인 얼굴이라서 더욱 불안했다.

"크흠, 흥이 깨졌구나. 급해보이는데 어서 가려무나."

공범이었던 레베카는 헛기침을 하면서, 그녀답지 않게 애들을 내게 떠넘겼다.

더군다나, 어느 틈에 빠져나간 건지 몰라도…

이미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가관이었다.

나는 그 기행의 의미를 짐작하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맙소사…

이 여자가 이제와서 나를 버리려고 한다…!

'망할.'

그런 레베카가 가증스러웠지만, 같이 자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체포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기다려야 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데이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여기서 머해? 왜 여기써?"

'아직 아무것도 안했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데이지는 레베카를 보지 못한 듯했다.

한편, 코가 좋았던 바람꽃은 뭔가 눈치챈 듯이 데이지의 팔을 당겼다.

"아…! 야, 그냥 가자. 어른들 바뻐."

'이제 안 바뻐… 근데, 그걸 니가 어캐 알아?'

바람꽃의 묘한 배려가 쪽팔리고 황당했다.

"잠, 잠깐만. 힉!"

바람꽃에게 끌려가던 데이지는 갑자기 풀썩 주저 앉더니 다리를 베베 꼬았다.

데이지가 새빨개진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피, 피터… 나 화, 장실…."

"엑, 잠깐만. 설마 너…."

바람꽃은 부르르 떠는 데이지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로 기겁했다.

'얘는 왜 잡혀왔대?'

애들이 친해질 기미가 보이는 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인데…

그 타이밍이 여러모로 좋지 못했다.

그건 내게도, 바람꽃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만이나 아쉬움을 토로할 시간이 없었다.

꼼지락거리는 데이지를 보아하니, 그녀에게 한계가 왔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대로라면… 로판 여주인공의 인생에 잊혀지지 않을 누런역사가 갱신될 것이다.

나는 이대로 데이지가 수치사하게 나둘 수 없었다.

가뜩이나 소심한 애가 축축한 불명예까지 얻어버리면,

얘가 한동안 이불 안으로 틀어박힐 지도 모른다.

"꺄! 나, 나."

"안돼, 내일의 너를 위해서 참아!"

나는 곧 터질 물폭탄을 옆구리에 끼고서 빛처럼 달렸다.

수도에서의 첫날 밤이었다.

**

수도에서 맞이한 첫번째 아침.

지난밤의 소동으로 단체로 늦게 잠들어버린 탓에,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

"흐아함."

그럼에도 오랜만에 늘어지게 자버렸다는 만족스러운 충족감이 들었다.

대충 기지개까지 틀어가며 뻐근함을 즐긴다.

그 후, 내 이불 위에 마구잡이로 퍼져있는 머리카락을 한데 모으고, 습관처럼 머리를 땋았다.

어차피 수도에 있으면 가발을 쓰게 될 것이지만, 아침마다 만지는 맛이 있어서 빼놓으면 섭섭했다.

나는 데이지의 머리를 가지고 놀면서 옆침대를 확인한다.

아침잠이 없는 배신자는 언제나처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런 노인네 같은 레베카 대신에 침대를 채운 아이를 보았다.

'특이하게 자네.'

바람꽃은 자신의 꼬리를 품에 끌어안은 채로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복실복실한 푸른색 털공처럼 보이기도 해서, 데이지가 바람꽃을 왜 털뭉치라고 부르는 지 알 것 같았다.

'애기랑 털뭉치라….'

나는 피식 웃으며 데이지의 머리를 마무리하고, 슬슬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대로 누워있고 싶었지만, 언제까지고 이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려면… 그에 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애들은 좀 더 자게 두고 방을 나선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딛고 1층으로 내려간다.

내려가자마자 보이는 화사한 미모의 여인이 나를 눈치채고 반겨주었다.

"잘 잤니?"

지난 밤의 어색함을 떠올리게 하는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나를 배신했던 가증스러움이 먼저 생각났다.

"퍽이나요."

내가 받아주지 않고 퉁명스레 대꾸하자, 미모의 배신자는 킥킥 웃으면서 내게 따뜻한 차를 건네어 사죄를 표했다.

레베카가 내민 차는 차라고 하기에는 향도, 맛도 영 밍밍했지만… 그녀의 음식보다는 훨씬 나았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가 차를 홀짝이자, 레베카는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는 곳에 연락 보내놨단다. 조만간 사람이 찾아올 것이니 여기서 기다리자꾸나."

아침형이던 그녀는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발 빠르게 움직인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빨라도 너무 빨랐기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아는 정보 길드가 있다더니….'

나는 레베카가 알고 있다던 정보 길드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기에 궁금증이 일었다.

"아침부터 고생하셨어요. 그나저나 거긴 어떤 곳인가요?"

레베카는 내 물음에 곧장 말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도둑 놈들의 소굴이구나."

"…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부랑자, 주정뱅이, 작부, 약쟁이, 도박중독자 같은 사회의 찌그러기들이 나름대로 살아보겠다고 만든 곳이란다."

레베카의 소개문은 사회부적응자로 구성된 어벤져스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듯했다.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서 확인차 물어봤다.

"어… 그러니까 직업 재활 치료소 같은 곳이예요?"

"음,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구나. 걔네들의 목표는 갱생이 아니라 제국을 좀 먹는 것이니."

레베카는 자기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나는 저세상 힐링캠프가 아닌 정보길드를 원했기에 상당히 난감했다.

"그거 정말로 괜찮은 애들 맞아요? 답이 없어 보이는데요…."

"어허, 편견은 좋지 않단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 않았니? 뭐… 걔네들이 인간성은 되먹지 못했지만, 이 분야에서는 나름 쓸만한 녀석들이란다."

말 같지도 않은 쓴소리를 하는 레베카의 모습은 지난 밤의 편린이 조금도 보이지 않아서 멍청해보였다.

'아니, 하나도 제대로 된 직업이 없잖아요….'

부랑아나 주정뱅이를 직업이라고 일컫는 얼빠진 드래곤이 아는 곳은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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