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뒷모습(1)
* * *
레베카가 소개한 정보 길드는 내가 기대하던 것과 달랐지만…
저세상 수용소를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개방이나 하오문으로 빗대어 생각하니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긴… 거지나 기녀들로 구성된 정보 단체도 있는데.'
오히려 밑바닥에 있는 인생이기에,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럴싸한 가정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레베카의 선택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만나보면 그 실체를 알게 되겠지.
마음을 내려놓고, 레베카에게 물었다.
"그래서 걔네들 이름은 뭐예요?"
"해와 달."
해와 달?
전래동화가 생각나는 이름이었다.
동시에 도둑 길드라는 속성과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었기에 흥미가 생겼다.
내가 생각하던 도둑의 이미지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만큼이나 길드 이름도 그림자나, 어둠의 다크니스 같은 음침한 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 감상을 레베카에게 전해주자,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대놓고 뒤가 구리다고 자랑하는 것 같구나. 원래 속이 시커먼 자들은 겉으로는 밝은 척하는 법이란다."
"그것도 참신한 견해네요."
레베카는 쓴웃음 짓는 내게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뒤가 없는 약자인 만큼 수단을 가리지 않는단다. 이따가 마주치거든 외견에 속지말거라."
그녀의 충고를 머릿속에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있긴 한가보네.'
아직 레베카와 '해와 달'이라는 길드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 있었지만,
일단은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의무를 다할 시간이 되었다.
"잘 마셨어요."
나는 식어버린 차를 한번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금 있으면 늦잠 자는 잠꾸러기들이 일어나서 밥 달라고 보챌 시간이었다.
복잡한 고민을 잠깐 잊고, 머릿속으로 아침 겸 점심 메뉴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그걸 만들어볼까.'
문득 꼬맹이들이 보면 기절할 메뉴가 뇌리에 떠올랐다.
깜짝 놀랄 애들의 얼굴을 상상하자, 입가가 저절로 승천했다.
'손이 많이 간다는 게 흠이지만 한 번쯤은….'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말거라…."
레베카는 실실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소심하게 항의했다.
"아!"
나는 데이지에게 똥손이라고 구박받던 드래곤의 존재가 유난히 반가웠다.
이번 요리가 힘이 필요한 만큼은 그녀도 쓸만한 보조였다.
게다가…
지난 밤의 원한을, 고작 차 한잔으로 떼우기에는 모자람이 있지 않은가?
'…너 잘 걸렸다.'
나는 밥 때가 되면 목소리가 작아지던 레베카를 도구로 삼기로 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나는 멀뚱히 서있는 그녀에게 다짜고짜 권유했다.
"레베카도 앞치마 메요."
"…??"
"전부터 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드릴게요."
"!!"
레베카는 휘둥그레 눈을 뜨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항상 내게 거절당하던 그녀였기에, 이번 권유가 마냥 기쁜 모양이다.
나는 달뜬 기색으로 총총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뒤에서 싸늘하게 웃어주었다.
'과연… 후회하지나 않을까.'
저를 도와줘요, 고든….
이번 기회에 지난 밤의 수모를 톡톡히 갚아주리라.
**
아점을 준비하기 위해서 여관의 주인장에게 말해 주방을 빌렸다.
전날, 레베카가 플렉스한 덕분인지 주인은 흔쾌히 주방을 빌려주었다.
내가 할 준비를 마무리 하고, 여러모로 서툰 레베카를 가르치면서 작업을 이어나갔다.
나는 그 과정에서 레베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그대여…."
레베카는 울상을 지으며 주절주절 웅얼거렸다.
"촉, 촉감이 이상하다. 미끄럽고, 물컹하고, 끈적해…. 이런 걸 맨손으로 만지라니…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쓰읍. 손에 힘이 빠졌어요. 평소에는 꽉꽉 잘 주무르면서 왜 자꾸 힘을 빼요. 더 세게 쥐어봐요."
"힝… 대체 이걸 어떻게 먹는다는 거니… 내 눈에는 울긋불긋한 것이 징그럽게만 보이는데…."
"어허! 먹을 거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라니까. 듣는 얘가 섭섭하겠네. 입 열지 말고, 열심히 주무르기나 해요."
레베카의 문제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교정하고, 가르쳐야할 게 산더미처럼 많아서… 솔직히 단념하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그녀는 힘조절을 못하는 것 외에도.
기본적으로 감각이 너무 민감했고, 징그러운 것을 무척 꺼려했다.
'…이러니 음식이 될 리가 있나.'
요리는 의외로 비위가 강해야 능숙하게 할 수 있다.
특히나 지금처럼 고기 요리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 점에서 레베카는 열등생이나 다름없었다.
"흐으… 흐… 이상한 냄새가 손에 배였다… 더이상은 싫어…."
나 또한 그녀가 이 정도도 제대로 못 만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상상 이상의 서툴음이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울상인 레베카의 모습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것저것 갈구지 않아도, 알아서 고통스러워 해주니 무척 만족스럽다.
'누가 누구보고 어리다고?'
속으로 한심한 레베카를 맘껏 비웃고, 이 즐거움도 슬슬 마무리 지어야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나는 주방 밖에서 우리를 훔쳐 보고 있는 복슬복슬한 꼬리를 가르키며 그녀를 다그쳤다.
"좀 더 노력해서, 손 좀 움직여봐요. 쟤도 레베카만 기다리고 있잖아요."
"으윽."
애들이 기다린다는 말에, 레베카는 애써 손가락을 조물딱 거렸다.
나는 레베카가 마무리를 짓는 동안, 관전자에게 중요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야. 람. 이리와 봐."
"…!!"
내가 바람꽃을 부르자, 그녀의 꼬리털이 삐죽 섰다.
왠지 모르겠지만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설마… 제딴에는 그게 숨어 있었다는 건가?
"풉."
얘도 하는 짓이 제법 우스웠다.
내게 발각된 바람꽃이 쭈삣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낄낄 웃어주자, 그녀가 분한듯이 새빨간 얼굴로 툴툴거렸다.
"아, 씨… 뭔데. 깜짝 놀랐잖아."
"ㅋ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이거… 중요한 거니까, 거짓말 하지말고 제대로 대답해야해. 알았지?"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임시 보호자로서 그녀를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할 것이 있었다.
"뭐, 갑자기 왜…? 으. 알았어, …요."
바람꽃은 조금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너… 양파 먹어도 괜찮아?"
**
다행히도 일반적인 강아지들과 다른 지 바람꽃은 양파나 마늘을 즐겨먹는다고 했다.
특히나 양파수프를 좋아한다나? 양파로 할 수 있는 요리가 무궁무진해서 천만다행인 소식이었다.
마음에 걸렸던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제 꺼릴 것이 없었다.
간을 한 다진 고기와 볶은 양파, 마늘 등을 치대어 둥글게 빚은 반죽을 중불에 노릇하게 굽는다.
뚜껑을 닫고, 약불로 속까지 골고루 익히고, 가니쉬용 양파와 버섯을 살짝 구워서 접시에 담았다.
보기 좋게 위치를 조절하고, 그 위에 레베카의 와인과 꿀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다.
"후후…."
완성된 모양새와 냄새는 제법 그럴 듯했다.
한정된 재료로 이 정도면 선방한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아."
나름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내 옆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
레베카는 감회가 새로운 지, 먹음직스러운 함박 스테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질색하며 주물렀던 다진 고기가 이렇게 변신해버린 게 놀라운 모양이다.
그녀는 감격스러운 듯이 탄성을 내었다.
"아아, 볼수록 아름답구나. 이게 내 진정한 요리…."
엄밀히 말하자면 거들었을 뿐이지만…
그런 잔인한 말로 상처주기에는, 그녀가 너무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이럴 때야말로 모른 척 넘어가주는 게 강호의 도리도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레베카를 실컷 괴롭혔으니, 이 정도는 착각은 봐주기로 했다.
'고통받은 만큼, 행복해야지.'
이제 주린 배를 부여잡고,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두 꼬맹이들을 맞이하면 된다.
처음부터 애들을 겨냥한 메뉴이기에, 이걸 보고 애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무척 궁금했다.
'퍄, 뒤졌다. 꼬맹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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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걸러서 시들시들한 데이지와 바람꽃을 식당으로 불렀다.
배고파서 서러울 꼬마들을 위해서, 괜히 뜸들이지 않는다.
'가면을 벗어주세요…!'
나는 음식 덮개 대신에 가려놓은 천을 훽 치웠다.
이 순간은 언제나 설렌다.
"……!!!"
"와……."
비록 요리왕 비룡처럼 접시에서 화려한 무지개빛이 뿜어져 나오진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반응이 들려왔다.
데이지와 바람꽃은 머리털 나고 처음보는 비쥬얼을 목도하자, 같은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쌍둥이처럼 포크를 꼭 쥐고, 입을 헤벌레 벌리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애들의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하기야… 위대한 드래곤의 고통을 승화하여 탄생시킨 음식이다. 이 정도 리액션은 당연히 나와줘야지.
레베카는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을 보며, 희희낙락 틈새 어필을 했다.
"내, 내가 만들었단다! 대단하지 않니?"
오늘따라 주책이신 걸 보니 그만큼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
"거짓말… 왜…."
레베카의 입방정에, 데이지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목격한 것처럼 포크를 떨어뜨렸다.
…뭔가 기대가 싹 가신 표정이다.
나는 황급히 죽은 눈인 데이지에게 먹기 좋게 자른 햄버그를 내밀었다.
가끔씩 애들은 악의 없이 사람을 후벼파는 말을 하니 주의해야했다.
"아~"
"…흑."
데이지는 눈 앞의 먹음직스러운 함박 스테이크를 보고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리애가 주는 음식을 마다하는 애가 아닌데…'
이것도 레베카의 업보였다.
새삼스럽게 데이지가 그녀의 솜씨를 얼마나 불신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레베카의 실력을 아직 모르는 바람꽃은 별 다른 꺼리낌 없이 포크를 움직였다.
입 안에 넣고, 연신 오물거리다가 눈을 번쩍 뜬다.
"…? …!!!"
그 모습은 마치…
"어때?"
"미, 미미, 친!"
미미?
바람꽃은 평가할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접시에 코를 박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술 점수가 9점인 절묘한 수직낙하였다.
"…??"
데이지는 쉴 새 없이 흡입하는 바람꽃을 보며, 상식이 뒤집힌 것처럼 혼란스러워 보였다.
"마시써?"
"……."
바람꽃은 대꾸하지 않고, 아직까지 그대로인 데이지의 함박 스테이크를 호심탐탐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가만히 있으면 빼앗겨…!'
그 탐욕스러운 눈빛에 위기감을 느낀 데이지가 다급하게 행동에 나섰다.
"피터, 아아!"
드디어 쇄국정책을 포기한 조그만한 입은 혁명을 받아 들였다.
"……???"
데이지는 레베카와 함박스테이크를 번갈아보며 동그란 눈을 껌뻑거렸다.
어째 인지부조화에 걸린 병아리처럼 당황스러워 보였다.
나는 이러다가 얘가 체할 것 같아서 진실을 알려주었다.
"나도 같이 만들었어. 좀 편하게 먹어요."
"하와아!"
드디어 해답을 얻은 데이지는 바람꽃과 마찬가지로 접시에 코를 박았다.
마찬가지로 예술점수 9점이었다.
나는 애들이 잘 먹는 것을 확인하고, 함박 스테이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레베카에게 말했다.
"레베카도 좀 먹어봐요. 이러다가 다 식겠어요."
"너무하는구나!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먹을 수 있겠니? 이 예쁜 아이를…."
허…
'…가지가지한다.'
나는 이제 성가셨기에, 레베카를 외면하고 잠자코 밥이나 먹기로 했다.
더 늦으면 내가 만들어놓고 맛도 못보게 될 것 같았다.
***
한참 식사를 하던 중.
불청객이 찾아왔다.
"아이고, 벌써 식사 중이그만. 점시미라도 얻어 묵을려고 했드만."
그는 사투리를 무척 심했다.
피터가 되어버린 내 귀에는, 그의 말투가 경상도 지방 사투리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어떨 지 모르겠다.
그의 말은 연륜이 느껴져서 상당히 구수했다.
그러나… 그 연륜을 무색하게 만드는 목소리 때문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어, 이쁘장한 얼라들도 있구마. 야들아 반갑데이."
나는 두 세월이 맞물리지 않는 듯한 괴상함을 찾아서 고개를 돌렸다.
'어린애?'
삐쩍 마른 남자애가 있었다.
그는 무척 꼬질꼬질했고, 수 십차례 기운 흔적이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 가득한 검댕이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몸집이나 키를 보아서… 잘 쳐봐야 중학생 정도였다.
식당 입구 쪽에는 이 남자애 밖에 없었다.
설마, 얘가 말을 건 걸까?
"아따, 뭐 마시는거 묵는다고 답도 없구로. 이라마 내 섭섭하다카이."
'맞네….'
그가 말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기괴했다.
거지꼴인 어린 소년에게 알 수 없는 세월의 향기가 느껴졌다.
무척 개성적인 소년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는데…
"쯧."
레베카가 혀를 차더니,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여전히 질 떨어지는 수작이군."
오랜만에 듣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말한 손님이 이 소년인 듯했다.
레베카는 손을 휘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 다가갔다.
거지소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레베카를 눈에 담고서 눈을 크게 떴다.
"허미… 왐마, 이 누님 와 이리 이쁜디. 왐마…."
"쯧."
레베카는 떡진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눈을 맞추었다.
"노망이 들어 잊은 모양이구나. 내가 누누이 어린 아이들은 건드리지 말라 했거늘."
"…너 뭐꼬?"
"지금 당장 본체로 튀어오거라. 영혼을 도륙내버리기 전에."
소년은 레베카와 눈을 마주치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어으, 잠, 시만… 누, 눈나 왜, 왜 이러세여?"
"이제와서 수작 부리기엔 너무 늦지 않았니? 뭐, 어차피 들통 났겠지만."
"수, 수작이라뇨… 전 그저 심부름을…."
"도플, 여전히 혀가 길구나. 됐다. 444초 주마. 제 시간에 오지 않으면 각인을 찾아가겠다."
"아…… 좆뎃데이."
레베카에게 붙잡혔던 소년은 구수한 육두문자와 함께 눈을 뒤집고 기절해버렸다.
나와 애들은 영문도 모른 채, 레베카와 기절한 소년을 보며 단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본체? 도플?'
레베카는 미어캣 같은 우리를 쑥 둘러보며 말했다.
"입맛을 버리기 전에 나머지는 2층에 가져가서 먹으렴."
"…알써."
"네에."
레베카가 한바탕카리스마를 뿜어낸 탓인지, 데이지와 바람꽃이 군말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 와중에 접시에다가 구깃구깃 음식을 쌓아 올리고, 짧은 다리로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넘어지면 대참사겠네.'
레베카에게 자세한 사정을 듣기 전에 쟤네들부터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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