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뒷모습(2)
* * *
나는 데이지와 바람꽃이 알뜰히 쌓아올린 잔반을 방까지 서빙 해주고,
그들에게 음식을 돌려주기 전에 약간 주의할 것을 일러 주려고 했다.
"침대 위에서 먹다가 흘리지 말고, 얌전히ㅡ"
"내 꺼!"
그러나 내가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한참 배고플 나이인 바람꽃이 내 손에 들린 그릇을 단박에 낚아채 갔다.
뒤도 안 돌아보고 침대 위에 올라가는 모습이 늑대가 아니라 날다람쥐 같았다.
자기 이름값 하려는 건지… 참으로 바람같은 솜씨다.
'얘도 누구처럼 지꺼 하나는 확실하게 챙기네….'
뭔가 허탈했지만, 빼앗긴 김에 데이지에게도 접시를 돌려주었다.
제 밥그릇을 보면서 손가락을 빨고 있는 애한테 잔소리하기도 그랬다.
"…고마워."
꾸벅하고 끄덕이는 꼬꼬마의 배꼽인사가 참 기특했다.
다행히도, 데이지는 누구와 다르게 피터의 노고를 알아주는 착실한 어린이였다.
얘 덕분에 손녀 재롱을 구경하는 할부지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나는 한결 훈훈해진 마음으로,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레베카에게 돌아가려고 했다.
"잠시만 여기서 놀고 있어요."
"피터!"
그 때 데이지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곧장 뒤돌아 보자, 앙증맞은 주먹에 쥐어진 포크가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거!"
"…?!"
나는 양념 묻은 포크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고, 그 상황이 신기해서 멀뚱히 쳐다봤다.
'이게 닿네?'
놀랍게도, 데이지가 내민 포크는 얼추 내 명치에 닿는 높이였다.
꼬꼬마라서 마냥 작다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으니 이 정도는 닿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짧은 시간 동안에, 이 아이도 조금이나마 성장한 걸지도 모르겠다.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아, 아~ 빨리~"
그런 내게 데이지가 바들바들 떨면서 재촉했다.
아무래도 까치발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어린애의 뜻밖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포크에 꽂혀 있던 것을 보고 그 행동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먹으라고요?"
"으응…."
우리 꼬맹이가 기특하게도 내게 팁이라도 주려는 모양이었다.
비록 팁은 먹다 남은 함박 스테이크였지만.
'풉.'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으으."
제 딴에는 나름대로 진지해 보여서 맞춰주기로 했다.
나는 짤막한 손을 뻗느라 고생하는 꼬마를 위해서 무릎을 구부려 주고, 그녀가 바라는 대로 입을 열었다.
"아."
"아~!"
제법 신난 목소리였다.
어린애다운 모습이라 보기 좋았지만…
힘조절 못하는 애한테 입천장을 찔리지 않게끔, 신중하게 고기만 받아먹었다.
냠.
나는 내가 만든 함박 스테이크를 곱씹었다.
언젠가 누가 남이 먹여주는 음식이 더 맛있다고 그러던데…
솔직한 내 감상으로 맛이 그게 그거였다.
오히려 식어버려서 그런지 썩 맛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싰어?"
"응, 맛있네."
"!!"
내 앞에서 활짝 피어나는 함박 미소를 보니,
어쩐지 맛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
애들을 방으로 돌려보내놓고, 1층으로 내려왔다.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여관 입구 쪽에서 레베카가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기절한 채로 바닥에 누워있는 꾀죄죄한 소년을 가리키며 물었다
"쟤는 괜찮아요?"
"썩 좋지 않구나. 그동안 그 자에게 험하게 다뤄진 것 같아."
다소 침중한 목소리였다.
'그 자?'
나는 아까 전의 대화에서 레베카가 언급한 이름을 떠올렸다.
머릿속으로 주워들은 단서를 조합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 도플인가 뭔가에게?"
레베카가 무거운 얼굴로 끄덕이며 말했다.
"삿된 기생충이지. 제 것이 아닌 육체에 중독된ㅡ"
"빙의, 그러니까 마법 같은 걸로 다른 사람이 애를 조종한 거네요?"
"ㅡ그, 그렇지…."
웹소설 10년차 독자의 날카로운 추측에, 레베카가 약간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곧 평정심을 되찾은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크흠. 빙의, 그 맥락은 같구나… 그런데 마법이 아닌 조잡한 주술에 불과하단다."
"……."
솔직히 마법과 주술의 차이가 뭔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 궁금증이나 풀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 잠자코 들었다.
레베카는 바닥에 다소곳하게 누워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래는 인간이 아닌, 미물에게 허락을 구해 육신을 빌리는 숲지기의 주술이란다. 정해진 것을 어거지로 변형한 만큼, 이치에 어긋난 불완전한 주술이지. 그런 조잡한 주술이기에 저 아이가 조금이라도 거부반응을 보였다면, 언제든 깨져버렸을 게다."
"잠깐… 그러면."
나는 레베카의 말에 담긴 미묘한 사실을 찾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남에게 자신의 몸을 맡긴다고?'
나로써는 그다지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이었기에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쟤가 진심으로 그 주술을 받아들인 거란 거예요?"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나머지는… 369초나 지각한 본체에게 물어보자꾸나."
'표면적? 본체?'
뭔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것 같지만,
지금은 교수님께 질의문답할 시간이 아니었다.
레베카의 말처럼 7분은 한참 전에 지난 시점이었다.
학, 하악, 훅, 흐으….
어디선가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안쓰러운 헐떡임이었다.
요란한 숨소리에 시선을 돌린다.
입구 쪽에서 데이지보다도 작은 체구의 인형이 허리를 굽혀가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비록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알 수 없었지만, 체격만 보면 일고여덟살짜리 어린애 같았다.
나는 잠깐 마실 나간 여관 주인을 대신해서 그에게 안부를 물어보았다.
"괜찮아요?"
"무, 흐으, 물, 좀 주소…."
"엥?"
어린 아이일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로브 속에서 잔뜩 갈라진 노인네의 음성이 들렸다.
곧 숨이 멎을 듯한 다급함이 느껴졌음에도, 선뜻 나설 수 도와줄 수 없었다.
그의 체격과 음성의 괴리감 때문에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묘한 확신을 가지고 레베카를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게 도플이란다."
"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위해서 레베카가 손수 도플의 로브를 치워버렸다.
무기력하게 로브를 빼앗긴 도플의 민낯은 충격적이었다.
"…노인?"
그는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백발이 서성한 노인이었다.
도플은 어린애가 아니라 엄청난 단신이었으며, 그 왜소한 몸집에 비해 커다란 맨발을 가지고 있었다.
유난히 털이 수북한 발과 왜소한 몸집이, 어느 명작 판타지 소설 속 종족을 생각나게 했다.
"호… 난쟁이?"
…저작권 때문에 함부로 부를 수는 없었지만.
"씨부럴."
늙은 난쟁이는 냉수도 받지 못하고, 억지로 로브를 빼앗겨서 잔뜩 화가 난 듯했다.
그는 나를 무시하고, 분개한 눈으로 레베카를 올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젊은 처자가 그 육갑 할망구랑 먼 사인지 깜깜한디… 니 여가 어데라고 쳐들어온 지 아나? 여서 누굴 건드린지 아냐고!"
"부랑자, 도플 로그. 늙더니 아둔해졌군. 지금 같잖은 떼나 쓰러 온 게냐? 그전에 해야할 말이 있을 것이다. 자연의 섭리가 그리도 두려웠던 게냐? 어린 아이의 신체를 탐할 정도로."
"염병."
잔뜩 심통난 난쟁이가 품에서 뼈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꺼내들며 말했다.
"그 할매가 니한테 머라 씨부린 건지 몰라도, 니들은 잠자는 그리핀 깃털을 뽑은 기다. 시벌, 어른이 존말로 할 때, 그 조가튼 인장이랑 머스마를 내놓지 않으면…."
'인장?'
도플이 허겁지겁 달려온 이유가 레베카에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이 반쯤 돌아간 것을 보아하니, 더이상 대화로 풀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싹다 불능으로 만들어뿌기 전에 끄지라."
늙은 난쟁이가 음산한 기운이 깃든 지팡이를 우리에게 들이밀었다.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꺼림칙함이 무척 두려웠으나…
"세월이 네 눈과 귀 뿐만 아니라, 판단력마저 앗아갔구나.."
드래곤이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튕기자,
딱!
선명한 소리와 함께, 뼈 지팡이의 음침한 기운이 흩어져버렸다.
"아어?"
"인장이 그리운 것 같으니, 어디 한번 실컷 느껴보거라."
레베카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윽고, 도플의 얼굴에 푸르딩딩한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올랐다.
"이, 이건, 끄우우에에엑!"
늙은 난쟁이는 비명을 지르며, 비보이처럼 바닥에서 허우적거렸다.
그의 전신에 돋아난 혈관이 팝핀추듯이 징그럽게 꿈틀거린다.
뭐랄까… 레베카의 말처럼, 정말로 밥맛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아악, 진, 진짜, 주인… 님이… 사, 사혀, 그만, 저, 주거요… 하, 하란 대로 하, 할테니깟…!"
고통스럽게 굴러다니던 늙은 난쟁이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몰골로 애원했다.
레베카는 바닥을 뒹굴어서 더러워진 노인을 보며 혀를 찼다.
"쯧, 노쇠하니 이 정도도 못 버티는구나. 28년이라, 세월이 야속하긴 해."
그녀는 그리 말하며 괴로워하는 도플의 머리를 지그시 밟았다.
그러자, 삽시간에 노인의 얼굴이 평화가 찾아왔다.
"가, 감사합니다…."
왜소한 노인은 미녀에게 밟힌 채로 꺼이꺼이 울면서 절을 했다.
그 모습만 놓고 보면…
웬 젊은 여자가 불쌍한 노인을 학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맙소사.'
외면하고 싶은 광경에 눈을 돌리고 있는데…
레베카가 도플을 밟고 있는 채로 내게 말했다.
"그대여, 이제 대화할 준비가 갖춰진 것 같구나."
"아. 네…."
그녀의 흐트러짐 없는 무심한 표정이 새롭게 다가왔다.
뭐라고 해야할까…
그 모습은, 엄마가 학창 시절에 껌 좀 씹었다는 과거의 편린을 엿본 느낌이었다.
.
.
.
"지는 주인님은 뒤,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데이… 다시 뵙게 돼서, 흑흑…."
레베카에게 노인 공격을 받은 '도플'이라는 난쟁이는 그녀의 옛부하인 것 같았다.
'어쩐지.'
위대한 드래곤께서 질이 나쁘다는 '해와 달'이라는 길드의 속사정을 왜 그리 잘 알고 있나 했다.
레베카가 유희를 즐기면서 만들어둔 인연인 건지, 아니면…
'…해츨링 때문일까?'
새삼스럽게 레베카의 삶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전날 밤, 그녀의 충고처럼 내가 너무 질문을 아꼈다는 게 와닿았다.
'웹소설 대신에 들을 게 생겼네.'
드래곤의 긴 수명을 생각하면, 레베카의 일대기는 내가 본 그 어떤 장편소설보다도 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허이고, 허이고…."
한편, 도플은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들고 있었다.
그것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입을 놀린 그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헌데, 그 모습은 당췌… 머시랍니까? 회춘? 머 존거 잡순 건 아닐테고… 설마, 마녀라도ㅡ"
도플은 레베카를 노파의 모습으로 기억하는지, 그녀의 진짜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벌을 받으면서도 못내 궁금한 지 능청스럽게 물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네게 묻는 걸 허락한 적이 없다. 도플, 네 놈은 혓바닥이 두 개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레베카는 늙은 난쟁이의 호기심을 싸늘한 목소리로 끊어버렸다.
"……."
그녀의 날선 경고에, 도플은 금세 쭈글쭈글해졌다.
이 난쟁이에게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거 같은데…
제 능력을 제대로 선 보이지 못하고 전락한 모습이라서 조금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레베카는 조금도 동정심을 비추지 않았다.
그저 경멸 어린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내가 네 놈을 살려놓은 것은 지난 날의 정 때문이 아니다. 아직 네 쓸모가 남았기 때문이지.누누이 말했지 않느냐. 도둑질이든 뭐든 허락하지만, 아이들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도플은 눈알을 빙빙 굴리며
"…으, 그게, 아시잖슴니꺼. 지 마법은 저 머스마가 하겠다꼬…."
"그만! 누가 네게 기회를 주었더냐? 하수구에서 생쥐들과 숨어살던 네 놈을 거둔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아지매요."
"내가 너를 안다. 그러니 뻔한 일이지. 굶주린 아이에게 빵을 건네며 하는 부탁이 허락을 구하는 것이더냐?"
"……."
도플은 착잡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늙은 난쟁이가 드래곤이 정해놨던 선을 제대로 넘어버린 것 같았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만일 맡긴 일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참작해주겠다. 성가시니 다른 것들에겐 알리지 말거라."
"…알겠습니데이.
레베카는 고개를 푹 숙인 난쟁이를 보며 조용히 한숨 쉬더니 내게 눈짓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나서라는 의미 같았다.
'아니, 이러고 넘기시면….'
레베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이 많았지만… 세세한 건 나중에 물어보자.
오늘부로 누가 떠먹여주는 밥에 위대함을 깨달았기에, 지금은 차려놓은 것을 얌전히 받아먹기로 했다.
어쨌든 부려 먹기 좋은 전문가들이 생겼으니, 써먹는 게 우선이었다.
"안녕하세요, 노인장. 도플이라고 하셨죠? 그리 반갑지는 않으시겠지만, 어쨌든 반갑습니다. 전 빌보드 배긴스라고 합니다. 흔쾌히 의뢰를 들어주신다니 정말로 감사하네요."
"허, 이건 또 먼 염병할 기생오ㄹ… 아, 알겄따… 알겠으니까… 건수나 씨부리라…."
뒤에서 드래곤이 째려보기라도 한 건지, 도플이 고분고분해졌다.
'전나 편하네?'
나는 어쩐지 드래곤을 등에 업고 있는 절대적인 갑이 된 기분이었다.
덕분에 뒷세계 사람과 마주해야한다는 부담감을 덜었다.
'해와 달'이라는 길드가 어떤 집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때 드래곤이 그들의 수장이었다고 생각하니, 밑바닥이라도 뭔가 비범하게 느껴졌다.
'그럭저럭 신뢰성을 갖추었고, 거기에다가 무료라니…!'
미스릴 광산 같은 거라도 선점해둔다면…!
뽑아 먹을 게 많은 나로선 군침 돌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 한번 두둑하게 뽑아볼까?'
.
.
그 날.
나는 울그락불그락한 난쟁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릴 때까지 입을 털었다.
"제발! 제발 좀 고마해라! 너무 많다안카나! 이 새끼가 늙은이를 얼마나 혹사시키려고 이 지랄이고."
"어허, 고객은 신입니다. 불경기에 일거리 많으면 좋잖아요."
"지랄, 돈도 안 되는 병신 쉐… 아, 아닙니데이… 신이죠, 암요…."
물론 자질구레한 의뢰는 후순위였고, 숱한 의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최근 북부에 다녀온 노예 상인에 대한 신상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언젠가 마주칠 원작 남주들의 행방이었다.
**
거의 2주 간 숲과 황야를 떠돌아다녔다.
성인 남자와 10살배기 아이의 행동반경을 모두 뒤져보았다.
[…없군.]
그럼에도 그 비슷한 무리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하늘로 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만하게 들릴 지 모르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분명 끈기있고 유능한 추적자였다.
우둔하리만큼 목표를 쫓는 그에게서 벗어난 사냥감은 여지껏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쫓기로 마음 먹는다면, 시체라도 발견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그 예외가 생길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마력을 집중했다.
스스로를 천부적인 추적자로 만들어준 능력을 사용한다.
마력을 모아서, 건틀렛에 감아둔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언령을 담는다.
{길 잃은 구도자를 인도하소서.}
본래대로라면 그의 간절한 기도는 그를 목적지로 안내해줬을 것이다.
푸시시…
그러나, 그의 마력에 반발해서 끊어지는 머리카락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난감하군.]
이 검은 머리카락이야말로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단서였다.
유감스럽게도, 저주받은 머리카락이기에 여신께서 내려준 능력이 먹히지 않았다.
'하다못해 옷자락이라도 있었으면, 그걸로 쫓았을 것을…'
그러한 시도는 저주받은 아이를 두려워한 화전민들 때문에 물 건너 가버렸다.
설마 옷 한벌도 입히지 않았다니…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 역겨운 화전민들을 좀 더 살려두고, 계시의 아이를 훔친 남자에 대해서라도 자세히 물어봤어야했다.
…이건 여신의 축복만 믿고, 안일하게 행동한 대가였다.
"후우."
그는 답답한 마음에 가면을 벗고, 무거운 한숨을 쉰다.
결국 그의 실수였고, 이제는 마지막 단서마저 허무하게 잃어버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대로 임무를 포기하고, 본교로 돌아가고 싶었다.
2주 동안 불철주야 돌아다닌 탓에…
그도, 애마인 하인커스도 마모되어 지칠대로 지쳤다.
최근 들어서 잦은 임무 탓에 침대에 누운 것이 1년 전 쯤 일인 것 같았다.
그에게는 정말로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계시, 계시, 계시의 아이를 찾아라)
이대로 단념하기에는 머릿속에서 지엄한 분의 말씀이 수백번도 더 메아리쳤다.
(네 죽음보다 임,무, 임무, 임무를 우선시하라)
(그, 그그게 네게 내정된 여, 여신의 뜻, 뜻이다)
(모든 것은 여신을 위하여)
그것은 언제나 그를 다독여주는 존귀한 목소리였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고쳐쓰고 조용히 기도했다.
[…여신을 위하여.]
그에게 임무 실패란 여신의 믿음에 대한 배신이었고, 참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그 신념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피로에 찌든 머리를 짜내어 생각한다.
갈구하다보면 언제나 해답은 나오기 마련이었다.
잔뜩 지친 미성으로 그가 되내었다.
[…화전민.]
그는 계시의 아이를 데리고 온 화전민의 마을을 떠올리고, 피로한 몸을 이끌었다.
**
'해와 달'의 도플 로그에게 의뢰를 맡기고.
그가 정보를 모을 동안에,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며칠 정도는 여관에 틀어박혀서 뒹굴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있을 때 봐두어야지.'
언젠가 불타오를 수도부터 관광해두는 것이 현명한 선택처럼 생각되었다.
더군다나 내게 이렇다 할 전문적인 기술이나 특출난 능력이 없는 만큼, 이 세계의 시장조사는 필수 사항이었다.
특히나 이 세계에 체류하면서, 평생 레베카에게 빌붙어 살 수 없는 노릇이다.
한동안 여기서 먹고 살려면 이런 거라도 알아둬야한다.
고로 나는 시장조사를 할 겸 레베카와 애들과 함께 거리를 나섰다.
누가 관광의 주체는 먹거리를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 입각한 나는 레베카의 돈으로 애들에게 심부름을 시켜서 이것저것 사먹어 보았다.
"뎃지, 염통꼬치로 출격! "
"…또?"
"람, 수상한 도마뱀꼬치로 출격!"
"엑! 싫어!"
솔직히 말해서… 길거리 음식들은 도저히 맛있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향신료가 없는게 태반이고, 소금 간이라도 되어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이 세계의 미개한 식문화를 마주하고, 여기서 음식 장사라도 하면 굶어죽을 일은 없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으나…
"요즘 수량이 줄어서 후추는 주머니당 금화 1닢하고 은화 4닢입니다. 소금 2말에 동화 3닢, 설탕은 동화 12닢이고요."
"허…."
까무잡잡한 잡상인의 말이 내게 현실을 깨워주었다.
이 세계는 내 예상보다 물가가 더럽게 비쌌다.
특히나 향신료가 존나게…
지금껏 알아본 바로는 자유민의 하루 식비가 약 동화 3닢 정도였다.
그런 동화 12개가 모여서 은화가 되고, 그런 은화 20개가 모여서 금화가 된다.
따라서 내 방식대로 향신료를 퍼붓어가면서 요리한다면…
한끼에 서민의 96일치 식사가 되는 돈지랄이 되는 셈이었다.
'…미친?'
그딴 식으로 장사했다간 금방 파산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서야 길거리 음식이 더럽게 맛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이세계 푸드트럭에 대한 꿈은 일찌감치 접어버렸다.
생각해보니 신선한 식재료를 공급받고, 보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애당초 판타지 세계에 와서 요리나 하기엔 아깝잖아.'
나는 애써 합리화하며, 가격을 후려치려는 상인에게서 달아났다.
"웩, 이것도 맛 없어…."
"…이거 아줌마가 먹을래?"
"고, 고맙구나."
문득, 한참 먹을 나이인 데이지를 보며 약간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내가 얘를 먹여살릴 길이 뭐가 남았을까?
역시 판타지 세계라면,
모험가가 되는 길이 왕도 중의 왕도겠지만….
(레베카, 저 마법사하면 대성하지 않을까요?)
(아니, 꿈도 꾸지마렴.)
(그, 그럼 검사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려무나.)
현명한 드래곤이 말씀대로 이제와서 마법을 배우거나, 검을 휘두르는 건 무리였다.
비록 피터가 현대의 나보다는 어렸지만, 그도 엄연히 20대였다. 어지간한 재능이 아니고선, 시작하기엔 너무나 늦은 나이였다.
…애시당초 마을사람인 피터에게 그쪽의 재능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린애를 인신매매하지 말고, 밭이나 잘 일궜으면 다행일 것이다.
'망할 촌놈 같으니라고.'
그래서 선택한 게 장사였거늘…
그마저도 중세 판타지의 미개함에 좌절되게 생겼다.
차라리 이게 현대물이었다면.
복권을 사거나, 주식 투자 같은 걸로 쉽게 벌었을텐데….
아무래도 투자는 중세 판타지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요소였다.
다만… 내게도 투자 비슷한 걸로 돈을 벌 방법이 있었다.
나는 시장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이윽고, 구석탱이에서 웃옷을 돗자리 삼아서 자질구레한 약초를 팔고 있는 남자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나는 그 꾀죄죄한 소년이 팔고 있는 시들시들한 풀떼기를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녹색 코인…!'
한 1~2년 쯤 묵히면 떡상하는 풀떼기.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잡초에 불과하지만… 훗날, 그 가치가 금보다 뛸 것이다.
'타인의 고통으로 돈을 벌고 싶진 않았지만….'
어차피 아무도 안 사지 않는 풀떼기를 헐값에 사재기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까.
어쩌면 내가 사두는 일이야말로, 고통 받는 이들을 돕는 일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좋아, 산다.'
여기에 내 전재산인 금화 3닢을 털기로 했다.
나는 멍 때리고 있는 헐벗은 소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헤이, 이거 전부 줘."
"예?"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내게 잡초를 파는 것이 양심에 걸리는 지 우물거리며 말했다.
"어, 이거, 맛 없는데…."
짜식, 그건 나도 알아.
끽해봐야 중딩인 어린 놈이 살아보겠다고 잡초를 파면서… 어디서 괜한 양심이나 챙기고 앉아있다.
이런 못된 녀석은 돈으로 혼내줘야한다.
"금화 3닢만큼."
"???"
"싹다 가져와."
"!!!"
어딘가 낯익은 심마니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 기, 기다리!"
그러고는 외마디를 남기고 골목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아무래도 이 잡초의 비축분이 잔뜩 있나보다.
안정 코인을 샀다는 흐뭇한 마음으로 중딩이 기다리는데,
"오지랖인 거니?"
애들을 데리고 이쪽으로 온 레베카가 내게 물었다.
나는 약간 우스운 마음으로 대꾸했다.
"오지랖이요? 어디가요?"
"쓸모없는 잡초잖니. 동화 1닢도 아까운."
레베카의 눈에는 내 행동이 자선사업 쯤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역시 드래곤이라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나보다.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여주었다.
"글쎄요. 혹시 알아요? '2년' 뒤에 달라질 지."
"흠, '2년'이라?"
레베카는 미묘한 어감을 눈치챈 듯이 눈을 반짝였다.
무언가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그녀가 이 풀떼기에 관심을 가져줘서 잘됐다.
안 그래도 부탁할 게 있었는데… 알아서 찾아와주니 참 편하다.
"그나저나 2년이면 다 썩어버릴 텐데?"
고맙게도,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듣고 싶었던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레베에몽이 있잖아요."
"……?"
"아공간은 안 썩는다면서요."
"갈수록 염치가 없어지는구나…."
레베카는 고개를 절레 저으면서도, 내게 아공간을 맡겼다.
뜻밖의 수확에 놀랐던 내가 허리를 꾸벅였다.
"고맙습니다!"
"주는 게 아니라 잠깐 빌려주는 거란다. 만약, 2년 뒤에도 아무 일도 없으면… 그 때 대여비를 받으마."
쩝, 좋다가 말았네.
허나, 결과적으로 내가 대여비를 낼 일이 없기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무상으로 아공간을 빌릴 수 있었으니 운이 좋은 셈이다.
실실 웃는 내게 레베카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니?"
"아, 그건 스포일러라 말해드릴 수 없네요."
"또 묘한 단어를…."
"스포이러?"
양손을 빈꼬치로 무장한 데이지가 고개를 갸우뚱헀다.
입에 묻은 기름 때문에 입술이 반질반질했다.
나는 꼬꼬마의 흉기를 수거해가며 어설프게 웃는다.
마냥 웃어 넘길 수 없는, 무거운 문장이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ㅡ대륙에 존재하는 삼분지 일이 재와 먼지가 되었다.
그 전개대로라면,너무 많은 사람들이 증발할 것이다.
"피터, 이거 맛있는 거야?"
"땅콩아, 풀데기가 맛있겠니? 딱봐도 잡초잖아."
"일단 잡초가 맞단다."
내 근심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훗날 수억명을 살릴 풀데기를 박하게 대했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인가?'
재잘거리는 그녀들을 보고 있으니, 어째 고민을 하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여러분의 성원에 호응하여 오늘 저녁은 풀죽입니다."
"""??""""
미래의 일은 미래의 내게 맡기자.
아직 닥치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느라,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건 손해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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