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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27화 (27/117)

〈 27화 〉 뒷모습(3)

* * *

저녁메뉴를 잘못 골라서 3명의 여자들에게 심한 갈굼을 받던 중.

"호, 고갱님! 기다리셨죠! 싹다 긁어모았어요!!"

골목에서 상기된 목소리가 들렸다.

잡초팔이 소년이 자기 몸만한 포대자루를 어깨에 이고 있었다.

그의 손이나 포대에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을 보아서, 물건이 상당히 싱싱한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소년 뿐이 아니었다. 골목에서 떠들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형, 저 사람이 그 호구야?"

"키히, 호꾸! 호꾸야!"

웬 올망졸망한 애들이 그를 뒤따라 골목에서 우르르 빠져나온다.

7명이나 되는, 거기에 데이지보다 어려보이는 애들까지도 저마다 풀떼기를 안고 있었다.

"이상해. 왜 이걸 산데? 우리집 마당에 널렸잖아."

"왠지 저 사람 사기꾼 같은데… 그러면 어떡해? 이제 우리 먹을 게 없는데…."

"쉿. 금화 3닢짜리라고 입조심해."

다 들린다 요놈들아.

애들 딴에는 소곤소곤 떠든다고 생각해도, 그들의 높은 목소리는 훤하게 들렸다.

'호구에, 사기꾼이라?'

다소 불손한 재잘거림 때문에 살짝 어이가 없었다.

얘네들한테 사실 구라였다고 인생의 쓴맛을 알려주면… 표정이 어떻게 바뀔 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못 들은 걸로 하고 넘어가주기로 했다.

…일곱이나 되는 고사리 손에 묻은 흙이나, 헤지고 낡은 옷을 보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많이도 가져왔네. 고생 했겠다. 자, 받아."

나는 돈으로 혼내준다는 조기의 목적을 떠올리고 금화를 튕겨주었다.

"으앗! 감, 감사합니다!"

"왁! 진짜야? 깨물어봐, 어서!"

아이들은 금화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마냥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와, 형! 오늘은 빵 먹어도 되겠다~"

"안돼, 아껴야지. 대신 귀리죽 할 거야."

"에에…."

비쩍 마른 어린애들이 하는 말이었다.

가장 강대한 국가의 수도에도 가난은 존재했다.

물론 가난은 현대에서도 존재했다.

허나… 그걸 직접 마주하니 기분이 심숭샘숭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일이 호의를 베풀었다간 끝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애들에게 호의적인 레베카조차도 잠자코 있었다.

'그래도 빵 정도는 먹었으면 하는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그럭저럭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허나, 지금은 빈털털이였기에 물주에게 말했다.

"레베카, 잠깐 귀 좀 빌려주세요."

"민망하구나. 애들이 보고 있잖니?"

"…헛소리 말고요."

어찌저찌 내 귓속말을 들은 레베카가 살포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여비에 이자를 붙여놓으마."

"아주 알뜰하시네요."

"아무렴. 돈이 없으면 몸으로 떼워야 할게다."

"거기다 얄짤 없으시네…."

만약 녹색 코인이 떡락하는 날엔 인생까지 저당 잡힐 지도…?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든다.

성공을 확신하지만, 역시 투자란 무서운 법이다.

어쨌든 성공적으로 돈을 꾸었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나는 재잘거리는 무리들에게 말을 건넸다.

"애들아!"

"네?"

"돈 필요하지 않니?"

"그, 그렇죠…?"

맞이로 보이는 잡초를 팔던 소년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어째 나를 보는 눈빛에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나쁜 아조씨 아닌데….'

괜히 입 아프게 설득하기는 귀찮았다.

효율적으로 설득하는 법을 알고 있던 나는 금화를 꺼내들며 말했다.

"그럼, 나랑 좋은 일 해보지 않을래?"

"……!"

어째서지…

경계심이 늘어나버렸다.

**

시장에서 볼일을 마치고, 도시 탐방에 나섰다.

마침 우리에겐 천년 묵은 가이드가 있어서 그럭저럭 괜찮은 관광이 되리라 생각했다.

"저건 역대 왕들의 동상이란다. 원래는 119개였으나… 26년 전 현 황제가 왕위를 찬탈한 후, 죄다 부수어 남은 게 4개 뿐이지."

"헤에…."

"저기 보이는 참수대에 전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걸렸단다. 무수한 백성들이 모여 돌을 던졌지. 나름대로 선정을 펼친 왕이었는데… 패배자의 말로는 어쩔 수 없는 법이더구나."

"…그, 그렇군요."

"이 폐허는 203년 전에 황실로 시집 온 이웃나라 왕녀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별궁과 함께 타버리고 남은 흔적이란다. 뭐,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사실 그 왕녀는 무죄였단다. 그녀는 당시에 심각한 가뭄에 대한 원성을 잠재우기 희생양이었지."

"……."

"이 다음에는… 교단의 신성한 종이라도 구경하러 가보겠니? 무려 성녀와 성자를 산 채로 녹여서 만든…"

천년의 짬에서 나온 가이드는 무척 자극적이었고, 솔직히 말해서 흥미롭긴 했다.

그러나…

"…피터, 이제 집에 가면 안돼…?"

"인간… 너무 무서워…."

두 어린이의 감상은 지극히 처참했다.

데이지와 바람꽃은 각자 내 바지 자락을 붙잡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너희들도? 나도….'

나는 애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원흉은…

"피곤한 거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짓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 비인간적인 미모가 유난히 유감스러웠다.

'미쳤습니까 용가리?'

비로소 이 드래곤이 애들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체 감성이 어떻게 되먹은 건지…

어린애들이 있는데 처형장, 무덤가, 리얼 에밀래종 같은 곳만 골라서 안내해주고 난리다.

'드래곤이 선정한 잔혹 명소….'

너무 밀도 높은 곳만 골라서 다니니 나도 기가 쭉 빨리는 기분이었다.

이제와서 레베카에게 따질 기력이 없어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여관으로 돌아가죠…."

"그러니? 아직 둘러볼 게 많은데… 어쩔 수 없지. 다음을 기약하자꾸나."

레베카는 가이드에 재미가 들린 듯이 약간 아쉬워했다.

"……."

진저리가 난 나는 속으로 대꾸한다.

'응, 다음은 없어.'

꿈도, 낭만도 없는 가이드 따위는 손절이다.

**

그로부터 3일이 지났다.

레베카의 끔찍한 가이드에 시달린 나와 두 꼬마는 더이상 관광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로인해 여관 안에 틀어박힌 덕분인지, 별다른 사건사고에 휘말리는 일은 없었다.

'아니지…'

…사건이 있긴 있었다.

본래 혼자서는 얌전한 데이지였지만…

바람꽃이라는 또래아이를 만나서 시너지를 일으켜 버렸다.

(흐으으, 피터어어, 쟤가, 털뭉치가 물었어…!)

(아니야! 땅콩이가 먼저 쳤어! 이거 봐, 여기 멍들었다!)'

이따금 데이지와 바람꽃이 기싸움을 벌이고,

(다투던 아이들이… 나 따위는 빠져있으라고 하더구나… 마치 성가시다는 듯이… 그저 사이좋게 지내라고 일렀을 뿐인데… 미움이라도 받은 걸까…?)

중간에서 등 터져버린 드래곤을 달래주는 등이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더니….'

뭐… 그것과는 다른 의미였지만.

어쨌든 하루하루가 소란스러워서 아주 보기 좋았다.

원래부터 애들이란 존재가 무척 활달한 편이지만…

두 꼬마는 태생이 남달라서 그런지 그 정도가 심했다.

어쩌면 하루종일 여관에만 갇혀 있으니, 폭발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싸워대는 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날마다 멘탈이 깨지기 바쁜 레베카도 항상 죽상이었다.

멘탈이 바스라진 드래곤과 티격태격거리는 애들을 위해서라도 특단의 방책이 필요했다.

'…운동이라도 가르쳐야하나.'

진이 빠지도록 굴리면 덜 싸우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태권도라도 알려주고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배운 적이 없었다.

내가 해본 운동이 헬스 밖에 없으니 알려줄 게 영 마땅치 않다.

'뭘 가르쳐야하나 잘 가르쳤다고 소문날까?'

고민하면서 돌아다니다가,

마침 여관 입구에 비치된 목검이 눈에 들어왔다.

'검술….'

마치 운명처럼 이거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고개를 가로 저었다.

험한 세계인 만큼 호신술을 알고 있는게 좋을 거 같지만, 차라리 모르고 있으면 나서지 않는 법이다.

애들이 어설프게 싸우는 법을 알고 있으면… 언젠가 스스로 위험에 빠질 것 같았다.

제대로 검을 익힌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인재가 내 주변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PT체조나 알려줘버릴까….'

8번 정도면 기운 넘치는 애들도 골아떨어질 거 같긴 하다.

"목검인가, 제법 그리운 물건이구나."

다소 극단적인 생각을 하던 중,

낭랑하지만 촉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어느새 다가온 레베카는 축쳐진 어깨로 목검을 쥐었다.

"오, 검 좀 쓰시나요?"

"치기 어린 시절에. 그 때 조금 다뤄 보았단다."

그녀가 어린 시절이면 대체 얼마나….

­!!

"그대여, 어째 눈빛이 불손하구나. 어디 한 번 경험해 보겠니?"

눈을 깜빡였더니, 갑자기 눈앞에 목검이 들이밀어져 있었다.

'대체 어느 틈에?'

조금도 반응하지 못한 나는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앞으로 처신을 잘하렴."

아무래도 레베카는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애들한테 얻어맞고 애꿎은 피터한테 화풀이지….

'내가 동네북이지….'

억울한 나를 두고, 레베카는 약간 들뜬 기색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써봤는데도 착착 감기는구나."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휘두르는 소리만 들렸다.

이 못된 용가리가 언젠가 유희를 즐기면서 검이라도 배운 모양이다

그런 검술로 나같은 약자나 괴롭히다니, 이 치졸한ㅡ

'잠깐만….'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레베카가 보여줬던 황금패가 생각났다.

또한 성문을 넘으면서 경비병들이 보여준 예의바른 태도가 떠올랐다.

'그거 보고 문지기들이 뭐라고 했던 거 같은데.'

걔네들이 뭐라고 말했더라?

생각해봐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물 만난 것처럼 검을 휘두르는 레베카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레베카… 그 황금패, 가문명이 뭐라고 하셨죠?"

"음? 뭐라고 했니?"

"가문명이요. 그 나름 유서깊은 가문이 어쩌고요."

"아아, 팬드래건이란다. 한 때는 모르는 이가 없었거늘…요즘은 무예를 익힌 이들 외에 몰라주니 조금 섭섭하더구나. 세월이 야속하지."

'팬드래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이윽고 대충 훑고 넘겼던 글귀가 생각났다.

[제국의 정통 검술, 팬드래건 검법.]

'왜 그게 여기서 나와….'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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