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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28화 (28/117)

〈 28화 〉 뒷모습(4)

* * *

서브컬쳐에서 자주 우려먹는 어느 왕의 칭호.

[펜드래곤]

'용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거창한 이름은, 이 세계에도 어떤 검술의 이름으로써 남아 있었다.

몇 백년 전에 돌연히 나타난 천재 여검사가 창안했다는 게 검법.

[팬드래건 검법]

거창한 이름답게, 원작의 용사도 익히고 있던 검법이었다.

허나 원작의 장르가 로맨스였던 만큼… 검법과 같은 요소를 중점으로 다루지 않아서 그 이름만이 잠깐 언급되었었다.

덕분에 자세한 설정은 모르겠고, 천재 여검사가 사용했다는 비화만 기억난다.

'그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레베카의 입에서 잊고 있었던 네임드가 튀어나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혹시나 동명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확인차 물어봤다.

"어… 레베카? 소싯적에 칼 좀 썼어요? 그 왜 팬머시기 검법도 만들고?"

"그렇지? 흐음…? 왠지 놀란 모양이구나. 후후, 이래봬도 대륙에서 검으로 열손가락 안에 들었단다."

레베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쭉 폈다.

새삼스럽지만… 어쩐지 그녀가 웅장하고 커다란 존재로 보였다.

"…세상에."

최근따라 하는 짓이 영 미묘했던 드래곤이라 그저 돈 많고 얼빠진 누나로 여겼는데…

그런 레베카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니….

ㄴㅇㄱ 상상도 못한 레베카의 과거였다.

'…허술해 보여도 드래곤은 드래곤인가.'

레베카가 까면 깔수록 뭐가 나오는 양파같았다.

하기사… 천년의 짬이면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긴 하다.

나중에 레베카가 썰을 풀어버리면, 대하소설조차 가볍게 씹어먹는 분량일 것 같다.

'이게 꿀단지?"

최근에는 독자로써는 이야기에 굶주린 상태였는데…

생각해보니 웹소설을 대체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가 여기 있었다.

'…갑자기 군침도네.'

나는 애써 침을 삼키며, 살아있는 화석을 면밀히 관찰했다.

한때 천재 여검사였던 것은 제 손에 들린 목검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아쉽구나. 당시의 내 위상을 보았다면, 그 아이들도 나를 다시 봤을텐데…."

…어쩜 이렇게 한결 같으실까.

천년 제국의 역사에 이름까지 남긴 위인께서는… 과거의 권세로 꼬맹이들을 꼬실 망상이나 하고 있다.

'불세출 검사'와 '드래곤'이라는 그 이름값에 비해서 하는 짓이 좀스러워서 뭔가 허탈했다.

레베카의 이야기에 대한 기대치가 떡락했다.

덕분에 흥분했던 머릿속이 냉정해진다.

나는 검으로 시대의 풍류를 누렸던 드래곤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무언가 상황이 공교로웠다.

원작의 용사가 배웠던 검의 원본이 여기 있었다.

마치 준비된 것처럼….

'운명인가?'

마침 지금이 원작의 용사가 연옥에서 훈련을 빙자한 고문을 받던 시기였다.

허나, 이미 용사의 힘을 각성한 데이지에겐 그따위 시련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약 그녀가 지금부터 제대로 된 훈련을 받는다면… 원작의 그녀보다 훨씬 더 강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까지 해야할까.'

솔직히 마음이 동했지만… 언젠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거미줄 쏘는 피터가 말했다.

원래부터 과한 힘을 손에 넣었다가 고생하는 건 클리셰 중의 클리셰였다.

그러나,

'온실의 화초는 안돼.'

내 직감이 언젠가 데이지에게 시련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해댔다.

이 곳은 비합리성과 폭력이 만연한 세상이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품 안에 싸돌고, 보기 좋은 꽃으로 키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최약체인 내가 지켜주는 것은 한계가 분명했다.

그 아이에겐 스스로를 빼앗기지 않을 힘이 필요하다.

'그래도 너무 이르지 않나…? 아니지, 이런 건 어릴 때부터….'

나는 보호와 보험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더이상은 내 소관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당사자에게 물어보자.'

우리 꼬꼬마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것 같아서 걱정이지만….

일단 그녀의 예비 선생님과 상담하기로 했다. 레베카가 내켜하지 않으면 다음을 기약하자.

"레베카, 혹시 이런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

.

.

나는 데이지의 교육방침에 대해서 레베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고민을 들은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에게 검이라? 과연, 필연이구나. 그들의 아이라면 더 없는 재능이겠지. 능히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게다. 후후, 이것 참 기대되는 구나."

"역시 그렇겠죠?"

나는 긍정적인 레베카의 반응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들었다.

반면에, 그녀는 내 제안에 흥미를 느낀 듯했다.

데이지의 혈족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전업 검사로서 호승심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레베카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목검을 꾹 쥐며 말했다.

"게다가 내가 그 아이의 선생이라니…! 더할 나위가 없구나! 반드시 하겠다…!"

…어쩌면 데이지와 친해질 건덕지가 생겨서 좋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김칫국을 사발째로 들이키는 레베카를 보며 쓴웃음 지었다.

'아직 확정은 아닌데….'

데이지가 싫다고 거절하면 없던 일로 할 생각이었으나…

애정이 고픈 드래곤의 헛된 꿈을 깨우기 미안해서 내버려두었다.

나는 마냥 안쓰러운 눈으로 레베카를 쳐다보는데…

왜인지 그녀 또한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지? 왜 그런 눈으로 보시지?

"그나저나… 괜찮겠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

영문 모를 동정을 받아버렸다.

레베카의 우려가 너무 뜬금없어서 곧바로 물어봤다.

"뭐가요?"

"그 아이는 현재로선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지. 거기에 그대를 '너무' 잘 따르는."

"옳으신 말씀. 살면서 데이지만큼 착하고 귀여운 애는 본 적이 없긴 해요. 걔는 하늘에서 날개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요?"

"……주접이 심하구나. 성가시니 일단 들으렴."

주접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반박하고 싶었지만, 레베카가 살짝 질린 표정이라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입에 지퍼를 잠그자, 그녀가 한숨을 푹 쉬면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무척 강해질 게다. 아마 반신에 근접할 정도로. 그 때는 그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

"오, 귀여운데 강하기까지 하면… 그건 이미 신이 아닐까요?"

­딱!

"아악!"

"적당히 하렴."

쓰바, 무슨 딱콩이 뇌를 울리냐.

눈앞에 보이는 별이 무려 두 개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두고, 레베카는 혀를 쯧 찼다.

"그대와 그 아이가 어떤 관계인지 잘 모르겠으나… 앞으로는 주의해야할 게다. 그 아이는 그대에게 병적인 면이 있다."

"에이, 그 정도는…."

"글쎄? 부디 그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의존이 줄어들길 바라마. 혹시나 그대가 푼젤이처럼 탑에 갇혀지내면 무척 슬플게다."

"그게 뭐예요… 무섭잖아요."

내가 데이지 때문에 라푼젤처럼 갇혀지낸다고?

그 착한 애가 나한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레베카 때문에 괜한 불안감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데이지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긴 했다.

하필이면 심리치료가 발달되지 않는 세계이니, 그녀의 문제가 어떻게 해야할 지는 깜깜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말 잘 듣고 여린 아이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어떻게 변화할 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역시 레베카의 우려대로, 조금 주의해야했다.

'…검을 가르치면서… 윤리부터 알려줘야겠어….'

언젠가 찾아올 사춘기가 두렵다.

**

레베카와 함께 데이지의 교육 방침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오늘도 어김없이 하인리히가 찾아왔다.

"피터 형!"

"오, 하인. 어서오고"

비쩍 마른 소년은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시장 변두리에서 잡초나 팔고 있을 때랑 완전 딴판이다.

'옷이 날개라더니.'

무려 7남매를 돌본다는 소년가장의 얼굴이 활짝 펴서 보기 좋았다.

그런 하인리히의 얼굴은 누군가와 똑닮아 있었다.

나는 그의 형제를 떠올리며 안부를 물었다.

"얼굴 좋네. 이제 걔는 좀 괜찮아?"

하인리히, 내가 농담삼아 하인이라고 부르는 소년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어제 깨어났어요! 죽도 먹였어요. 정말 고마워요… 피터 형…."

"왜 이래. 난 한 거 없다니까."

"아뇨! 저희 집 망나니를 구해주셨잖아요. 거기다가 치료비도 받아 주셨고요."

망나니… 소년가장에게는 7남매 외에도, 어느날 집을 나간 형이 있었다.

그 장남은 3일 전에 빈사상태로 집에 돌아 왔다는데…

'그러게, 왠지 낯이 익더라고.'

이게 무슨 인연인지, 그 장남이 도플에게 빙의당한 거지소년이었다.

여기도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우리 주인님이 한 거라니까."

어쨌든 나는 하인리히의 말을 정정했다.

어디까지나 하인리히의 형을 해방시킨 것은 레베카였다.

골병 든 장남에 대한 보상을 도플에게 요구한 것도 그녀였고.

내가 그들에게 해준 건 쥐뿔만 했기에 눈 먼 감사를 받기엔 민망한 감이 있었다.

나는 레베카를 가리켰다.

"자, 섭섭하실라 어서 인사드려."

"아, 그, 그그…."

레베카를 알아차린 소년은 수줍은 듯이 몸 둘 바를 몰라했다.

미인이 어려운 듯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딱 중학생 같았다.

레베카는 그 모습조차 귀여운 지 피식 웃으며 손사래쳤다.

"그래. 다행이구나. 문제가 있으면 말하렴."

" 네, 네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예, 예."

레베카의 친절한 목소리에 하인리히는 여신을 영접한 것처럼 절을 했다.

나는 동네 형처럼 대하더니… 레베카랑은 대우가 너무 다르지 않냐?

약간 심기불편한 나는 하인리히의 말을 끊고 용건을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야? 납품일은 내일이잖아?"

"아, 맞다. 그 꼰대가 이거 전해드리랬어요."

"도플이?"

하인리히는 품에서 둘둘 말린 양피지를 꺼냈다.

아무래도 오늘 그의 임무는 도플이 보내온 연락책이었나보다.

나는 양피지를 받아들고 쭉 펼쳤다.

내 어깨에서 배까지 닿는 양피지에는 꼬부랑 글씨가 새겨져있었다.

양피지에 새겨진 글은 한글이 아니었다.

그러나 피터가 까막눈이 아니었던 건지, 아니면 나름의 특전인지…

나는 문자를 이해하고 읽을 수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어쨌든 이 나이에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양피지에 새겨진 정보를 훑어보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중간 보고였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히 괜찮은 정보였다.

꼬장꼬장한 노인네라서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유능하네."

그 늙은 난쟁이가 생각보다 능력있었다.

솔직히 벌써 유의미한 정보를 물고 온 것이 놀라웠다.

이 도시의 인구가 어떨지 몰라도, 현대의 전상망도 없는 구시대에서 고작 3일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어째 꼬부랑 필체에서 3일 동안 갈려나간 도플의 애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인리히가 가져온 밀서에는 총 213명하고도 31명의 인적사항이 적혀있었다.

북부에 다녀온 상인과, 수인족으로 전문으로 하는 노예상인들.

'제법 많네.'

여기서 간추리기만 하면… 비로소 연옥으로 향하는 첫 단추를 끼운 느낌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목표에 다가선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지만,

동시에 약간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역시 그 애한테 알려줘야하나….'

괜한 약속을 해버렸다.

역시애들을 돌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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