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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29화 (29/117)

〈 29화 〉 뒷모습(5)

* * *

우리 일행은 저녁 식사를 마치면 다같이 방에 모여서 휴식을 취했다

하루종일 방안에 갇혀있는 것은 지겨운 일이었기에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었다.

물론, 그것도 지겨워지면... 내 주도 하에 넷이서 현대식 승부를 벌이곤 했다.

"모두 주목!"

나는 촛불 주위에 둘러앉은 이들을 보며 최대한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종목은 5개의 목숨을 걸고, 서로를 저격하는 어둠의 게임입니다. 단단히 각오하세요."

"""꿀꺽."""

나는 여자들이 잔뜩 굳은 얼굴로 손가락을 펼치는 것을 확인한다.

준비를 마친,길거나 앙증맞은 손가락을 보며…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 저주의 말을 토해냈다.

"시작! 나보다 키 작은 사람 접어요!"

"아! 치사해! 그러면 너 빼고 다 죽잖아!"

바람꽃은 손가락을 하나 접으면서 항의했다.

허나,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 그녀의 어설픈 항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 진리를 일찍 깨달은 데이지는 불평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나! 나보다… 크, 큰 사람 접어."

"땅콩이까지!"

순식간에 목숨 두 개를 잃어버린 바람꽃은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자신이 살려면 누군가를 떨어뜨려야했다. 고로회심의 한 수를 던진다.

"씨, 나보다 늙은 사람 접어!"

"…너무 하는구나. 이러면 목숨이 두 개 뿐이잖니…."

단번에 빈사 상태가 되어버린 레베카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얼씨구.'

...이 사람들. 표정만 보면 진짜 목숨을 걸고 게임하는 줄 알겠다.

'잘들 노네.'

나는 평균연령이 약 340세인 그녀들을 보며 흐뭇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비록 내가 창작한 게임은 아니지만, 어쨌든 유저들의 반응이 좋으니 만족스러웠다.

하기야… 이 세계에 놀거리가 적은 만큼, 내가 전파한 술자리 게임은 흥행할 수 밖에 없었다.

"땅콩아! 목표는 누구~? 아, 참고로. 나는 아직 목숨 세 개나 남았어."

"…세 개? 쳇."

"…!"

가끔씩….

열 살짜리한테 참 좋은 것을 가르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결과적으로 애들이 잘 놀면 그만이지 않을까.

한편, 표적이 되어버린 레베카는 살고자 발버둥을 쳤다.

"나보다 어린 자들은 접…."

허나, 나는 자비심 없는 척살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 또한 드래곤 슬레이어였다.

"네, 레베카 접어요."

"잠, 잠깐…!"

평균 연령을 혼자서 높인 범인의 HP는 단 한 대!

초빈사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모른다.

그녀에게도 희망이…

"응, 빨간 아줌마 접어."

…없었다.

"왜 나만…."

승부욕이 강한 레베카는 몹시 억울하다는 듯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에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본래 드래곤은 다굴로 해치우는 게 고증이었다.

"…원통하다."

현실에선 최강의 생명체였으나…

방구석에서는 최약체인 레베카는 오늘도 패배했다.

.

.

.

패배자인 레베카는 벌칙으로 간식을 사와야했다.

덕분에 잠깐 흐름이 끊기겠지만… 어차피 해야할 일이 있었기에 쉬는 시간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나는 내친김에 데이지도 패배자와 함께 딸려보내기로 했다.

이 시간만 되면 꼬꼬마가 툴툴거려서 곤란했으니까.

"데이지도 레베카를 도와주세요."

"…으."

데이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누가봐도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 그러지 말고. 잠깐 바람을 쐬러 가자꾸나. 너무 집안에만 있으면 해롭단다."

약간 쓰라린 표정이었지만, 레베카는 굴하지 않고 낯가리는 꼬꼬마를 설득한다.

허나… 우리 집 고양이는 산책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몰라… 그냥 여기 있으면, 안돼?"

데이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으며 레베카를 밀어냈다.

어린애한테 2번 연속으로 지게 생긴 드래곤이 울상을 지었다.

'저런.'

그 짠한 모습을 보다못한 내가 레베카에게 손 신호를 보냈다.

곧장 눈치챈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데이지를 꼬득였다.

"젤, 젤라또를 잔뜩 사주마…!"

처절한 레베카의 외침에 데이지에게 닿는다.

꼬꼬마는 난생 처음듣는 이름에 호기심을 품고 고개를 갸우뚱 했다.

"…제라, 또? 그게 머야?"

"천상의 달콤함과 부드러움, 거기에 차가움까지! 보자, 대본에는… 먹어보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는 궁극의 디저트라고 하더구나."

"……!"

참고로 천상유수 같은 레베카의 과장은, 내가 도플에게서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써준 대본이었다.

식도락을 위해서 유명한 디저트 가게를 섭렵해둔 보람이 있다.

"…제, 라토…!"

주도면밀함 덕분에, 심드렁하던 데이지의 눈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미지의 디저트라니...!

이제단맛을 알아버린 어린애가 버티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끝났군.'

이미 답을 내놓았을 데이지를 뒤로 하고, 성장한 레베카가 기특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제법인데요?'

'훗, 그대 덕분이지.'

언제나 내게 배움을 갈구하더니… 오늘에서야 성공적으로 데이지를 꼬신 듯했다.

물론 레베카가 한 것은 대본을 외운 게 전부였지만.

어쨌든 미끼는 잘 먹혔다.

고민을 마친 데이지가 사뭇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번만 가볼래."

"그래…!"

비록 승부에선 졌지만... 어쨌든 레베카가 행복해보였다.

가진 것에 비해서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

.

.

레베카와 데이지가 젤라또를 사러 나가고.

나는 예민한 댕댕이와 단 둘이 남게 되었다.

'계획대로군.'

처음부터 바람꽃에게 볼 일이 있던 나는붕대와 약재를 가져온 후,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준비를 마쳤으니, 거칠것도 없이 바람꽃의 웃옷을 잡고서 말했다.

"자, 만세."

"…잠깐만!"

그러나, 바람꽃이 자기 웃옷을 꾹 쥐고서 주춤했다.

"왜?"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이, 이상해… 이제 그쪽 말고, 그냥 그분이 해주면."

"레베카를 믿느니, 데이지를 믿지 그러냐."

"윽. 그치만… 우리 아빠도 아닌데…."

"뭘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부끄러우면 눈 감고 있어."

"하지만..."

"거참, 금방 끝내 줄게. 괜찮으니까, 자, 만세."

거듭된 압박에 바람꽃이 포기한 듯 만세를 하며 웅얼거렸다.

"……안 괜찮은데."

나는 그녀의 웃옷을 고이 접고, 등에 드리워진 푸른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았다.

드러난 작은 등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다.

물론 등 뿐만 아니라 전신에도.

그걸 일일이 풀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붕대를 절개했다.

이윽고 붕대를 걷어낸 맨몸을 살펴보며, 그럭저럭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덧나진 않겠네.'

아직 붉은 기가 남아있었지만, 고름따위는 생기지 않은 모습이었다.

레베카가 준비한 약초의 효과인지, 수인의 재생력 덕분인지… 어쨌든 이대로라면 흉터가 남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아물어 가는 겉의 상처와 달리, 보이지 않는 상처가 아직 이 아이에게 새겨져 있었다.

데이지와 티격태격하는 바람꽃의 모습은 밝아보였지만…그녀는 나 이외의 남자들에게 하악질을 하곤했다.

'트라우마겠지.'

그 날의 고통이 아직까지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말해줘야 할까.'

낮에 찾아온 정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에게했던 약속도….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전날의 복수가 흐지부지하게 매듭 지어졌을 때는…그녀가 내게 불평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역시 설득해야하나.'

여동생을 생각나게 하는 아이라서 그런 지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상념 속에, 바람꽃의 손이 닿지 않는 곳곳에 약을 발라주고 다시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 외의 부위는… 바람꽃이 꽥꽥 비명을 지르며 기겁하는 통에, 알아서 처치하도록 냅두었다.

덕분에 실시간으로 움찔거리는 강아지귀를 실컷 관찰했다.

"…그쪽 때문에 시집 못 가."

애써 붕대를 새로 갈아주었더니…

배은망덕한 댕댕이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나를 노려본다.

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의 발언이 우스웠다.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웃기시네. 그래도 시집 잘만 갈 거 뻔히 알거든?"

"씨… 놈팡이, 파락호, 기둥서방, 소아성애…"

…얘가 단어 선택이 왜 이래?

특히나 뭔가 예리한 게 있는 것 같아서 다급히 말했다.

"그만, 멈춰…! 너, 너 그게 뭔지는 알고 말하냐?"

"아니? 아빠가 말했어. 전부 씹어먹을 놈들이래"

갑자기 바람꽃의 학부모와 면담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님…

애 앞에선 냉수도 마시지 말라는 말은 못 들으셨나요?

왠지 모르게 현기증이 나서 팔뚝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데…

"…괜찮아?"

근처에서 축쳐진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이불에서 나온 바람꽃이 귀를 축 늘어뜨린 채로 곁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복슬복슬한 강아지귀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꾸했다.

"뭐가?"

"팔…."

그녀는 작게 말하며, 붕대가 감겨있는 내 팔뚝을 살짝 쥐었다.

조금 떨리고 있는 손끝이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의외로 소심하다니까.'

뉘집 누렁이의 주둥이와 비교하면… 바람꽃의 깨물기는 부상 취급도 못된다.

네 쪼그만 입으로 물어서 다쳐봐야 치와와 수준이라고.

"괜찮다니까. 침 바르면 낫는 정도야."

"흐, 아픈 거잖아…."

"안 아파."

"거짓말… 아빠도 그랬어. 침 바르면 낫는다면서… 나중에 손가락 잘랐어."

아버님… 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기가 막힌 가정교육 덕분인지, 바람꽃은 어린 나이에도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는 의심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매번 괜찮다고 말해도 내 말을 믿어주질 않는다.

뭐, 실제로 우리한 통증이 남아있긴 했지만.

'좋지 않은데.'

이걸로 두 번째 겪는 일이었다. 경험상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바람꽃은 깽값을 치른답시고, 몸으로 떼운다면서 오늘 하루는 화장실까지 따라올 것이다.

'그때는 진짜 식겁했었는데….'

나는 껌딱지를 두 개나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물며 그 껌딱지들의 불화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바람꽃이 사는 동네의 좌우명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면….

"냠."

"엑?"

이왕 깨물어보는 거 신경쓰이는 강아지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똑같이 팔뚝을 깨무는 걸로 넘어가주기로 했다.

침이라도 묻을까봐 걱정해서 아주 살짝 물었으나, 그럼에도 잇자국이 조금 남아있었다.

"이걸로 쌤쌤이. 이제 없던 일이다?"

"??"

내 완벽한 되갚음을 보며, 바람꽃은 뭔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이불을 뒤집어쓰더니 내게서 등을 돌렸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영문을 몰랐던 나는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풍성한 꼬리를 흔들며 물었다.

"람아?화났어? 설마 아팠니?"

"마, 만지지마… 이족제비야. 저리가!"

바람꽃은 소리를 빼액 지르더니 꼬리를 빼돌렸다.

달팽이처럼 아주 꽁꽁 숨어버렸다.

…이해가 안되네.

'내가 왜 족제비야?'

역시애들은 종잡을 수 없다.

혼자 놀기 심심했던 내가 이불 위에 갈고리를 찍어댔으나... 댕댕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가 뭔지 몰라도 제대로 삐친 거 같다.

경험상 이럴 때는 건드리면 괜히 불씨가 커지는 법이다.

'밥 때 되면 알아서 나오겠지.'

어느 세계나 10대 여자아이는참으로 복잡한 생물체란 생각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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