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30화 (30/117)

〈 30화 〉 조짐(1)

* * *

사흘 전, 단단히 삐져버린 이불귀신을 젤라또로 달랜 날.

꼬꼬마는 반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꼭 쥐고서, 하나는 나보고 먹으라는 듯이 내밀었다.

요즘 얘가 내게 음식을 공양하는 데에 재미를 들린 듯했다.

"고마워요."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끈적한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막상 받아보니… 그저 녹은 것이 아니라 베어 문 흔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식탐있는 꼬맹이가 침을 발라둔 모양이다.

'…그래. 피터는 잔반도 잘 먹지.'

어차피 단 걸 좋아하지 않아서 양이 적은 편이 좋았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ㅡ

'…먹다 만 걸 넘겨?'

조금 괘씸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그 보복으로 칠칠 맞은 입가를 박박 닦아주자.

속수무책으로 입가의 비상식량을 뺏긴 데이지가 내게 물었다.

"어푸푸, 피터도, 검 좋아해?"

"검이요?"

꼬맹이는 내가 틈을 보이자, 재빨리 빨개진 입술을 숨기며 덧붙였다.

"응, 길쭉 반짝한 거."

아주 친절하게 검이란 게 무엇인지 알려주니 고마웠다.

'갑자기 웬 검?'

맥락을 모르겠지만… 애들이 통통 튀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러려니 했다.

물어봤다면 솔직하게 대답해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떠오르는 감상대로, 그저 그렇다고 말하려고 했다.

"별ㄹ…."

대답하려는 찰나에, 어디선가 간절한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니… 왠지 죽상인 레베카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기분 좋게 산책 나갔던 것치고는 그녀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어휴.'

조금 성가셨지만 일단 반응해주기로 했다.

무시하기에는 후환이 두려웠다.

'왜 이래요? 이러다가 뒤통수 뚫리겠어요.'

'…뚫리기 싫으면 대답을 신중히 하려무나.'

레베카는 음침한 눈빛으로 협박을 가했다.

아주 막 던지는 모습이 기가 막히고 보기 좋았다.

문득 데이지가 내게 검을 언급한데는 어떠한 인과과정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낮에 레베카와 나누었던 교육 방침이 떠오른다.

이게 무슨 일인지 그 사이즈가 짐작이 되었다.

산책 중에, 성급한 드래곤이 우리 꼬꼬마에게 바람을 불어넣은 모양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매몰차게 거절당한 것 같지만.

'하여튼 성급하기는….'

데이지의 검술 스승이 된다는 게 그리도 마음에 들었을까.

레베카의 행동력은 존중하지만… 대책이 없는 부분에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별? 별로야?"

아이스크림 묻은 손가락을 빨고 있는 데이지를 봐서는… 희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듯했다.

아니, 오히려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내 반응을 살핀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다.

어쩌면 내가 쏟아낸 이야기 때문에 흥미를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내 동화에는 심심찮게 소드마스터가 등장했으니까.

'이걸 어쩌지.'

솔직히 마냥 달갑지 않았다.

아무래도 검술이란 건 어린애가 배우기에 적절하다고 말할 수 없는 기술이니까.

그럼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되었든…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괜히 나서서 긍정적인 반응이나 부정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말실수하면 잡아먹히겠네.'

옆에서 선생되실 분이 눈치를 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했다.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라는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그 날 밤.

이들에게 어린 검사가 모험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사이다에 찌든 동화가 아닌, 고난과 낭만이 공존하는 정통 판타지였다.

.

.

.

그 다음날 아침.

어린 아이는 난생 처음으로 검을 들었다.

운명이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으로.

**

수도에 도착한 지 어언 일주일이 되었다.

즉, 도플에게서 중간 보고를 받은 뒤로부터 사흘이 지난 셈이다.

사흘간, 나는 여자들끼리 어울려 노는 시간 때문에 자주 혼자가 되었다.

어쩌다보니 꽃들 사이에서 소외되었지만… 솔직히 외롭지는 않고, 그저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하마터면 나도 그 플라워 파이트에 낄 뻔했기에.

진저리를 떨며 나는 제법 본격적이던 레베카의 검술 교실을 떠올렸다.

'그 누나가… 어린애를 굴릴 줄이야….'

푼수로 생각한 이의 새로운 모습이 무척 오싹했다.

그녀의 엄한 눈빛을 뇌리에서 애써 지우며,

점심 시간 전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러 카운터로 향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갈수록 때깔 좋아지는 머슴이 나타났다.

"피터 형!"

"어, 하인, 어서오고. 고생이 많네."

풀내음이 짙게 나는 하인리히가 양손에 포대기를 들고서 나타났다.

자주봐서 지겨운 녀석은 심드렁한 나를 보며 농담을 건넸다.

"오늘도 한가해 보이네요? 형은 일 안해요?"

"응, 안해. 부럽냐?"

"아뇨! 몹쓸 어른 같아서 그건 좀 그래요. 전 일하는 게 좋거든요."

부쩍 친해진 하인리히는 말문이 트이니 입담이 예사롭지 않았다.

"얼씨구? 이게 고용주한테 까부네."

고용주 무서운 줄 모르는 소년을 갈구려다가 참는다.

지금은 얘나 괴롭히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조급했던 내가 포대를 내려두는 소년에게 용건을 말했다.

"너 같은 참새가 돈 많은 백수의 위대함을 어찌 알겠니. 그나저나, 오늘은 없어?"

"없어요! 그래도 재촉하니깐, 그 노인네가 조만간이래요. 아, 참고로… 그 난쟁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뜻은 아니에요."

"무서운 새끼…."

하인리히가 도플을 질색하고 있다는 건 둘째치고…

결론은 오늘도 그의 손에는 풀떼기만 가득하다는 뜻이었다.

'좀 늦는 거 같은데.'

고작 일주일에만에 유의미한 정보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양심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3일만에 정보를 물고 왔던 도플이기에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일은 다름 아닌 시간과의 싸움이다.

다른 건 몰라도 노예상 만큼은 하루라도 빨리 찾아야했다.

'…얼마나 남았으려나.'

비록 내가 이 세계의 줄거리를 알고 있다지만… 날짜와 같은 세세한 일정까지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큰 틀만 대략적으로 짐작할 뿐이다.

A­14는 원작의 용사가 연옥에 들이밀어진 후, 한 달 뒤에 들어온다는 묘사가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나…

이 세계에 변수가 있는 만큼, A­14를 데리고 있는 노예상이 언제 행동할 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나태한 피고용자의 의욕을 고취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노인을 혹사시키는 것 같아서 양심이 찔렸지만…

여러모로 죄가 많은 양반이니 갈려나가도 되겠지.

"도플한테 전해줘. 우리 쥔님이 실망이 크다고."

"반드시 전할게요! 감사합니다!"

니가 왜 고마워? 나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소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매일 성실하게 내 심부름을 해주는 하인리히가 기특했다.

"이왕 온 거 점심 먹고 갈래? 곧 애들 수업 끝날 시간이거든."

"저, 저야 좋죠! 혹시… 그, 그 분도 계시나요?"

수줍은 듯이 뺨을 붉히는 소년의 모습은 무척…

'징그러워….'

내가 남자라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남중생의 풋풋함은 눈꼽만큼도 귀엽지 않았다.

여지껏 성실하게 심부름하는 그에게 어느정도 사심이 있었음이 깨달았다.

'뭐, 이해는 한다만.'

나조차 매일같이 레베카를 보고 있음에도 놀라는 마당에.

그 폭력에 가까운 미를 사춘기 소년이 버틸 수 있을 리 없겠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레베카는 여러모로 적절한 기준이 아니었다.

어쩌면, 단순히 동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친한 형으로서, 하인리히의 눈이 끝도 없이 높아지는 것을 방지해주고 싶었다.

"아, 생각해보니까. 오늘 4인분 밖에 없네."

"엑, 그럴 수가…."

"깜빡했다. 미안해. 대신 나중에 밥 한끼 살게. 조심해서 가~"

"…예에."

하인리히은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지만 내게 불평을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돌아서는 모습이 장차 크게 될 것 같았다.

소년의 모습은 마치 어린 날의 나… 같은 지는 모르겠고….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야.'

어쨌든 전부 잘 되라고 하는 소리였다.

**

세금 또는 영주를 피해서 도망친 주민들이 만든 산마을.

주민이 100명 넘지 않고, 이름조차 없는 마을은 때 아닌 공포에 잠겨 있었다.

그 공포를 불러일으킨 순백의 수도사는 차디찬 미성으로 말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대상을 납치하고, 주민들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짐작가는 게 있는가.]

수도사는 가면 너머로 정렬한 이들의 면면을 관찰한다.

"그, 그런 일이… 돈을 들고 나른 줄 알았더니… 차리리 그랬으면…."

마을에서 가장 늙은이가 허탈하다는 듯이 한숨을 쉰다. 체념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아악! 누구야, 누가 우리 애 아빠를…!"

남편을 잃은 뚱뚱한 여인이 악바리를 쓴다. 허나 그리 슬퍼보이지 않았고 그저 분해보였다.

"어, 어떡해 엄마… 그럼 우리 오빠도…."

창백할 정도로 피부가 새하얀 소녀가 중얼거린다. 절름발이인지 이따금 다리를 절었다.

"썅, 그 망할 망나니가 그런 게 아니오? 이봐요, 촌주!"

오른손이 없는 중년의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한때 대장장이였음을 알려주었다.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고 있어!"

얼굴이 울그락붉그락해진 땅딸맞은 사내가 말한다. 이 자의 목소리가 가장 크고, 그나마 위치가 높아보였다.

수도사는 촌주라는 자에게 답을 얻기로 했다.

그는 점점 불어나는 소란을 새하얀 검으로 잠재웠다.

[그만. 입은 하나로 족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빼어든 검신을 보며 침묵에 잠겼다.

그들은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있는 8구의 주검을 상기했다.

이곳에 그들의 운명을 뒤따르고 싶은 이는 없었다.

수도사는 조용해진 이들 가운데서 촌주라고 불리는 땅딸보를 가리켰다.

[여기 촌주라고 했나? 그대의 식구 덕에 피차 고생이 많군.]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건 억울한…."

[변명하지 말라. 그대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글은 쓸 줄 알겠지?]

"예, 예에! 압니다요, 압니다!"

[지금 당장 상행에 나간 이들과 예정된 아이에 대한 것을 빠짐없이 적어와라. 오후까지만 기다리겠다. 만약 도망치거나 늦는다면 참하겠다.]

"아악!"

수도사의 경고에 촌주는 짧은 다리로 부리나케 뛰었다.

해가 지기까지 3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뛰쳐나간 땅딸보와 달리 마을주민들은 얼어붙은 것처럼 서있었다.

수도사는 잔뜩 굳어있는 이들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무척이나 피곤한 그는 이들 전부를 함구시킬 의지와 기력이 없었다.

'흩어지면 귀찮아 지겠군.'

한 두명이라도 빠져나가면 임무에도 없는 추적에 나서야할 것이다.

그건 보람도 없는 귀찮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저번처럼 실수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함부로 베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중첩된 피로에 머리가 무거웠으나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었다.

'예비를 둬야겠어.'

연약하고 도망도 칠 수 없는 자. 동시에 적당히 생존력도 갖추어야한다.

수도사는 주민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골랐다.

[그대의 집으로 안내해라. 그곳에서 기다리지.]

"저, 저요?"

[두 말하지 않는다.]

"흑, 알겠어요… 갈게요… 제발, 죽이지 마세요."

소녀는 울먹이며 앞장을 섰다.

마음이 급한 모양인지, 절뚝거리다가 이따금 넘어졌다.

수도사는 발을 절면서 나아가는 작은 체구를 보며 생각했다.

흔하디 흔한 갈색 머리카락에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묘하게 낯이 익군.'

그러나, 무거운 머리로 그 이상을 떠올릴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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