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를 유괴하다!-31화 (31/117)

〈 31화 〉 조짐(2)

* * *

가련한 중생을 돌려보낸 뒤,

나는 주방으로 돌아가 10인분 같은 4인분의 샌드위치를 쌓아올렸다.

최근에 운동하더니… 급격하게 식탐이 늘어나 버린 애들 때문에 넉넉하게 만들어야 했다.

덕분에 나 혼자서는 손이 모자란 감이 있어서 놀고 있던 주변의 손을 빌렸다.

일일 도우미이자, 여관 주인 댁의 딸인 에이미가 내게 말했다.

"피터 씨… 정말로 이게 한끼야? 4명, 그것도 여자 셋이서?"

뭔가 경악한 표정이라서 살짝 무안했다.

그릇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샌드위치가 보통 양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 없는 여자들을 변호했다.

"응. 우리 애들이 한참 먹을 때라서."

"세상에… 난 하나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은데."

에이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그녀의 풍만한 체격을 봐선 내숭일 게 뻔하지만…

일단 나를 도와준 그녀에게 대충 립서비스를 해주었다.

"인정. 그렇게 보이네. 앞으로 잘 좀 먹어야겠어."

"헤헤, 그래애?"

에이미는 살짝 높은 콧소리를 내었다.

빈말이었지만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도와줘서 고마워. 아저씨랑 같이 먹어."

헤실헤실 웃는 에이미에게 그녀의 가족과 먹을 샌드위치를 따로 챙겨준다.

딱딱한 호밀빵이 아닌, 부드러운 흰 빵이 귀해서 그런 건지 에이미가 무척 기뻐했다.

"피터 씨는 정말 좋은 남편감인 것 같아!"

그 놈의 흰 빵이 뭐라고… 칭찬이 제법 후하다.

이런 빵 하나로 인기인이 될 줄 알았다면, 예전에 제빵을 배워둘 걸 그랬다.

아쉽게도 이 흰 빵은 레베카가 비축해둔 것이라서 겸손하게 대답했다.

"나도 잘 알고 있어."

"키킥, 그게 뭐야, 재수 없어!"

재수 없다고 말한 것치고는 에이미는 깔깔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별로 아프지 않고 애교있는 동작이었다.

'과연, 17살이라서 그런가?'

그 나이대의 리액션이 커서 광대짓하는 재미가 있다.

꼬맹이들이나 레베카에게서 느낄 수 없는 풋풋한 느낌이라서 조금 신선했다.

에이미는 깔깔 웃다가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손뼉을 쳤다.

"맞네, 맞아!"

혼자서 맞장구 치는 모습이, 아무래도 내가 물어봐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활달한 그녀와 어울려주는 건 달가운 일이지만… 그런 내게는 해야할 일이 있었다.

'밥 때가 지났는데….'

슬슬 그만 노닥거리고, 굶주린 어린 양들에게 새참을 내어야할 시간이었다.

주린 배를 붙들고 나만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러나, 이대로 훌쩍 떠나는 것도 나를 도와준 에이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5분만.'

조금만 더 그녀에게 어울려주기로 하자.

"뭐가?"

"피터 씨는 말이지.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거 같아."

'…아빠라?'

별로 와닿지도 않는 호칭이었다.

애초에 좋아하지 않는 단어였고.

일단은 칭찬인 것 같지만… 나도 모르게 말을 흐렸다.

"갑자기?"

"응. 갑자기."

요리하면서 부쩍 친해진 동생이 불쑥 다가왔다.

코 앞까지 다가온 에이미의 얼굴은 솜털마저 보였다.

그녀는 의외로 피부가 거친 듯했지만, 그럭저럭 이쁘장하게 생긴 편이었다.

"너무 가까운데."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감에, 뒷걸음질 쳤으나…

"어디가?"

어느새 내 팔뚝을 사로잡은 에이미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다.

팔을 옥죄이는 부드러움이 상상이상으로 능숙해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뭔가 예사롭지 않은 솜씨다.

"야야, 뭐, 뭐야?"

"에이, 다 아는 사람끼리."

에이미는 내 소심한 저항를 일축하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있지, 오늘…"

숨소리가 섞인 간드러진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놨다.

"나랑 같이…."

이대로 그녀의 말은 끝까지 듣게 된다면… 뭔가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뱀 앞에 놓인 개구리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런 개구리는 어떻게 되지?'

아마도 잡아ㅡ

[ㅡ터어! 어디써!]

"!?"

멍한 머릿속에, 어린 아이의 부르짖음이 들렸다.

"피터어!"

그 천둥과도 같은 울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힉!"

"꺄! 왜 그래?"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에이미부터 밀어내려고 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쩐지... 시간을 칼같이 지키던 그대가 늦더구나."

이미 늦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식은땀이 주르륵 새어나왔다.

항상 듣기 좋던 목소리가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그대의 감정이 들쑥날쑥해서 혹시나 하고 와봤더니…."

"그, 들어봐요. 그게요."

"그렇구나. 우리 식사는 잊고, 따로 시식 중이었어… 허허."

"……."

그녀로부터 싸늘한 감정이 다이렉트로 전해져서 너무 두려웠다.

"기분 나쁜 냄새."

그 옆에서 북부에서 불어오는 설풍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부쩍 변덕스러워진 녀석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침에는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지금은 저기압인 듯했다.

"역시 족제비였어."

어제부로 너구리로 승격되었더니… 다시 족제비로 원상복구되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굶주린 여자들이 밥 때를 놓친 죄인을 단체로 잡으러 온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상황에….

'억울해!'

따지고 보면 내가 찔릴 게 하나도 없었지만, 왠지 내가 해명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타개할 수ㅡ

'잠깐만….'

나머지 하나는?

이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나를 찾던 이가 있었다.

가끔씩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움직이는 총알같은 아이.

"…떨어져!"

아니나 다를까.

아직 한 발 남았다…!

어디선가 도도도 달려오는 불길한 영압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땀에 폭 젖은 어린애였다.

'오늘도 열심히 운동했구나.'

그 아이는 무척 작고 여리게 보였으나…

그 실상은 출력이 덤프트럭 수준인 세발자전거였다.

만약 여기서 내가 피해 버린다면,

여관집 딸내미가 이세계로 전생할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애가 전과자라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호자로서 그런 불의의 사고는 막아야만 했다.

'충돌사고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그나마 데이지가 키가 작아서 다행이다.

재수없이 명치를 맞고 기절할 일은 없을테니까.

**

문득.

눈을 떠보니,

창문도 없는 방 안에 놓여있었다.

'여긴 어디지?'

처음 와보는 곳이다.

일단 주변을 둘러본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뿌옇다.

방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거무튀튀한 철창과 낡은 침대 뿐이었다.

그 중 관심이 가는 것은 침대였다.

'웬 침대?'

멍하니 두둥실 뜨는 몸으로 침대로 다가간다.

그 침대 주변에서 생활감이 느껴진다.

그 위로 색색거리는 숨결이 들린다.

'계세요?'

침대 위에 부푼 이불이 작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이불 안에 무언가 있음이 분명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 이불을 꼭 들추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내가 이 곳에 있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지?'

대체 누가 이런 감옥 같은 장소에서 지내고 있는 걸까?

혹여나 잠을 깨울까봐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춘다.

허나, 몸은 무척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게다가 움직일수록 점점 몽롱해졌다.

'졸려….'

그러나, 이대로 잠들면 후회할 것 같아서 억지로 버텼다.

어떻게든 이불을 걷어냈으나… 한계에 가까웠다.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침대 위를 확인한다.

'대체.'

아주 잠깐이지만, 눈이 번쩍 뜨이는 감각이 들었다.

그만큼 기이한 색감이었다.

'넌 누구니?'

새하얀 여자아이였다.

똬리를 튼 것처럼 몸을 말고 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명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분명 여기 있음에도, 곧 사라질 것처럼 덧없어 보였다.

분명히 처음보는 하얀 소녀.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서 묘한 기시감이 느꼈다.

'어디서 봤지?'

혹시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희뿌연 머릿속은 점점 더 번져간다.

이제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자고 있는 애를 깨우는 게 미안하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제발, 일어나….'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파르르 떨리는 하얀 눈썹이 보였다.

그 속에 담긴 붉은 눈동자와,

­아… 빠?

가냘픈 목소리가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 듯 했다.

***

"으으으……."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도 모르게 곡소리가 나왔다.

'아이고 골이야.'

자다가 깨어났다고 하기에는 개운함이 전혀 없었다.

마치 수면 마취를 하고 깨어난 듯한 무거운 피로감이 느껴졌다.

나는 기분 나쁜 수마에서 헤어나오려고 용을 썼다.

다행히도 희뿌연 머리는 금방 맑아졌다.

한결 나아진 머릿속에 희미한 상념이 스쳐지나갔다.

'…뭐더라. 뭔가 애 딸리는 꿈을 꾼 것 같은데….'

그 꿈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꿈이라는 게 떠올리려고 하면 기억이 나지 않는 법이다.

'찜찜해.'

한참을 생각해봤음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마치 그 부분에만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게다가 지금은 개꿈일지도 모를 꿈에 집착할 때가 아니었다.

눈 앞에 닥친 현실부터 해결해야 했다.

나는 내가 누워 있는 슬픈 이유를 상기한다.

그건 너무나도 끔찍한 상실감과 고통이었다.

바짝 마른 입으로 근처에 있는 이를 애타게 불렀다.

"…베카. 레베카…."

귀가 밝은 그녀는 금세 나를 찾아왔다.

"깨어났구나...! 정말 다행이야…."

"…목 말라."

"그래, 목부터 축이렴."

레베카는 어딘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손수 내 입을 적셔주었다.

메마른 입을 적시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고마워요."

"별거 아니니 괜찮단다.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무척 자상한 목소리라서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느낌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뭐야. 왜 이래.'

기절하기 직전의 날이 선 태도를 생각하니… 어쩔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설마, 몇 년 동안 혼수 상태였다거나….'

웹소설에 찌든 뇌가 기묘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막장 전개에 대한 불안감이 들었다.

"저… 막 1년 만에 눈뜬 거 아니죠?"

"…?? 반나절 정도 잠들었단다."

레베카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시간 도약 따위의 어이없는 전개는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게 레베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 몸은 좀 어떠니. 그, 특히나… 그 아래. 괜, 괜찮니?"

그녀가 말하는 '아래'.

곧장 그 의미를 이해하고 수치스러워 죽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그녀가 당시의 내 상실감을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건 격노한 드래곤조차 동정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나는 피토하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반신에… 감각이, 있어요…."

"뭣…! 감각이 있다니! 그거 큰일… ??"

레베카는 인지부조화에 걸린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내게 속은 것을 깨닫고, 미간을 찡그리며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 화상이!!"

"아악!"

레베카는 머리통을 감싸쥐는 나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멀쩡한 모양이구나. 참으로 다행이다. 하마터면 대가 끊길 뻔 했단다."

가뜩이나 수치스러운데….

이 여자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을 자꾸 인지시킨다.

그걸 이성과의 대화 주제로 쓰고 싶지 않아서 말문을 돌렸다.

"…그건 됐어요. 그나저나 애들은요?"

"밤이라서 일단 재워두었단다. 후우… 그대가 거품 물었을 때는 난리도 아니었단다. 특히나 작은 아이가."

아무래도 주제를 잘못 골랐는지, 지뢰를 밟아버린 듯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충격적인 소식에 한탄이 새어나왔다.

"아이고…."

이 일 때문에 데이지에게 새로운 트라우마가 생길까봐 겁이 난다.

불투명해진 미래에 머리를 감싸쥐는 나를 보며 레베카가 혀를 찼다.

"쯧, 그러게 미련하게 받아주고 그러니."

"…누가 밑으로 올 지 알았어요? 그것만 아니면 괜찮았어요."

그 때 데이지가 발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을 상정하지 못했다.

하필 내 급소와 충돌할 줄도 몰랐고….

레베카는 내 초라한 변명을 듣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심기가 불편해지신 듯했다.

"괜찮기는. 그 삿된 계집을 챙기느라 그랬잖니. 그대가 피했으면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래요. 그러면 다칠텐데."

"그게 어때서? 남의 것을 넘봤으면 대가를 치루어야하는 법이다!"

드물게 씩씩거리는 레베카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역린을 건드린 것 같다.

"쯧, 그 때 잡아서 혼쭐을 냈어야 했는데… 그 뱀 같은 계집이 혼란을 틈 타 잘도 빠져나가더구나. 관상부터가 요망한 년이었다."

"저, 그런게 아니라."

"시끄럽구나. 이번 일에 대해서 그대에게도 실망이 크다. 그런 작부같은 계집에게 홀려가지고…."

"……."

할 말은 많았으나, 잔뜩 열 받은 그녀 앞에서 괜히 입을 놀리는 건 손해였다.

이럴 때는 입 닥치고 있는 게 상책이다.

"……."

"…답답하구나, 답답해."

레베카는 한참동안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입을 꾹 다문 나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번은 그대가 환자라서 넘어가주마. 허나, 두 번은 없으니 앞으로는 처신을 잘하려무나."

그녀의 잔소리를 묵묵히 들었으나… 아직도 내가 뭘 잘못했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죄가 없지 않나?'

그러나, 그럼에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뜩이나 민망한 곳이 아픈 상황에, 여기서 부조리한 잔소리까지 들으려니 너무 서러웠다.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엄마 보고 싶다….'

애써 미루어 놓았던 자괴감이 찾아와서 우울했다.

죽상인 나를 가만히 보더니, 레베카가 품 안에서 편지를 꺼내들며 말했다.

"남자는 실수하기 마련이니 너무 기 죽지 마렴."

"이건?"

"밤중에 도플이 그대를 찾아왔더구나. 이건 그 때 받아둔 거란다. 무슨 용무인지 몰라도 내게 살려달라고 빌기에…."

"아아."

나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물건과 마주하자, 순간 고통과 수치심마저 잊어버렸다.

'해냈구나, 영감님!'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불행 뒤에 복이 온다더니...

이로써 늦지 않게 움직일 수 있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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