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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32화 (32/117)

〈 32화 〉 조짐(3)

* * *

레베카는 환자인 나를 배려해주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푹 쉬려무나. 너무 오랫동안 깨어 있지말고."

비록 잔소리를 듣긴 했기만, 내가 없는 동안 애들을 봐준 그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레베카, 고마워요."

"무얼. 아. 그리고…."

레베카는 문고리를 돌리려다가 말고, 문득 나를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띄웠다.

그 미소는 여인의 성숙함과 어린 아이의 장난기가 공존하는 것 같았다.

"후후, 아프면 언제든지 부르렴. 바람이라도 불어줄테니."

"……."

어느새 심야 모드로 전환한 레베카의 짖궂은 대사였다.

그 여유로운 태도가 오늘따라 너무 얄미웠다.

'졌다…!'

완벽한 패배감과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정말로 쥐구멍이든 어디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뱀이나 도마뱀이나….'

나는 분한 마음에 베개를 꽉 붙들었다.

"…저 죽는 꼴 보고 싶어요?"

"저런, 마침 얼굴도 터질 것 같구나."

"……!"

"이크, 까칠하기도 하지."

레베카는 내가 던진 베개를 솜씨 좋게 낚아채고 킥킥거리며 실소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싶은 심정을 알 것도 같다.

놀려대는 이 여자가 너무 얄밉고 괘씸했다.

덕분에 오늘 밤 잠은 다 잤다.

.

.

.

환자를 괴롭히는 못돼먹은 파충류를 쫓아내고.

방에 홀로 남겨진 나는 잠이 오지 않는 김에 도플에게 온 편지를 읽었다.

급하게 쓴 것처럼 떨려있는 글씨체라서 가독성이 떨어져서 한땀한땀 읽어야 했다.

'영감님이 급하셨나보네.'

마치 당근을 흔드는 듯한 필체와 틈틈이 달려있는 사족에 쓴웃음이 나왔다.

과로사를 호소하는 노인의 애환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노인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 편지에는 한 남자의 신상이 적혀있었다.

'뒤틀린 암트만'이라는 가명을 쓰는 가면의 노예상인.

'두들리 스펜서.'

나는 그 자의 행적을 활자로 훔쳐보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지 구상했다.

무거운 밤 중이라서 그런 건지… 우중충한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편지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콩..

방문 앞에서 아주 작은 소음이 들렸다. 조용한 밤중이라서 선명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내 방문과 충돌한 것처럼 보였다.

'뭐지? 생쥐인가?'

별 거 아니라는 생각에 넘어가려고 했으나…

끼익거리는 녹슨 경첩의 마찰과 함께 방문이 살짝 열렸다.

그 사이로 미세한 찬공기와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문 뒤편에 숨어 있다.

이런 밤중에 나를 찾아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레베카인가?'

그러나, 그녀치고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무척 수상쩍었다.

일단은 경계하고 지켜보았으나…

아닌 밤 중의 불청객은 떠나지도, 방 안으로 들어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어쩐지 내가 착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바람결에 문이 열린 걸지도 모르겠다.

"으, 귀찮아."

문이라는 자식이 제멋대로 열려서, 괜히 아픈 사람을 일어나게 만든다.

나는 방문을 닫고자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방문 앞까지 도착한 후, 문을 닫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깐 밖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네.'

내 방문 너머에는 을씨년스러운 칠흑만 남아있었다.

무심코 빨려들 것 같은 어둠을 바라보다가 급히 방문을 닫으려 했다.

'꺼림칙하게시리….'

그러나, 무언가가 문 틈에 틱하고 걸리는 감각이 들었다.

상당히 딱딱하고 작은 물체였다.

'일단 쥐는 아니겠네.'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그 녀석들만 아니면 된다.

나는 허리를 숙여서 그 정체를 확인한다.

"이게 뭐지?"

그것은 천이었다.

정확히는 천으로 감싸져있는,

"사탕?"

조금 깨진 동그란 알사탕이었다.

**

다음날 아침.

"…무리해서 걷지 말고 하루 정도 더 쉬거라. 덧나면 어쩌니."

어기적어기적 걷는 내 모습이 볼썽사나웠던 모양인지, 레베카가 내게 휴식을 권했다.

그러나, 단서가 생긴 마당에… 이런 하찮은 이유로 침대에 누워있을 수 없었다.

"예로부터 시간은 금이라고 했어요. 게다가 선생님이 숙제는 일찌감치…."

그런 내 고집을 레베카가 넌지시 타일렀다.

"어허, 지금의 그대는… 썩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구나. 오늘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확 재워버리기 전에,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결국 오늘 하루는 레베카가 혼자서 두들리 스펜서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쓸모 없는 건 나도 아는데….'

나도 알고 있었다.

나 같은 무지렁이가 레베카와 함께 가는 것보다, 그녀 혼자서 행동하는 것이 훨씬 더 자유로울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사기적인 능력이라면, 잠입이든 감시든 쉽사리 해낼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더 불안해.'

나는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물론 레베카가 실패하거나 다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한낱 노예상인이 드래곤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을테니.

'제발, 사고만 치지마라.'

결국, 내 불안의 원인은 다른 것이었다.

그 곳에 오지랖 넓은 드래곤을 막을 존재가 없으니ㅡ

고삐 풀린 레베카가 도플 로그가 알아내지 못한, 으슥한 곳까지 들여다보게 될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혼자 보내기 싫은건데….'

이미 바람꽃을 주워온 전적이 있는 레베카였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천년 묵은 트러블 메이커에게 오늘 하루 같이 쉬자고 권해보았으나…

"그대가 시간은 금이라고 했잖니? "

드래곤이라는 족속은 한 번 들은 것을 잊지 않는다.

게다가, 고집과 의욕이 올팡지게 강한 레베카였기에… 한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던 나는 그녀에게 몇번이고 신신당부했다.

"제발, 제발. 제가 없으니까. 반드시 지켜만 보세요."

"거참, 오늘따라 잔소리가 심하구나. 내가 누군지 알지 않니?"

"그걸 아니까 그렇죠! 됐어요, 자, 약속. 어기면 앞으로 풀죽만 먹을 줄 알아요."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레베카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녀는 이게 나와 데이지가 약속을 나누는 제스쳐 임을 알고 있었다.

"참 유난이구나.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내가 어린 아이도 아니고."

레베카는 투덜거리면서도 새끼손가락을 걸어준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거기서 무엇을 보더라도 아무것도 하지마세요."

"후우, 알았다 알았어…! 눈 뜬 장님이 되어 줄테니, 이제 좀 안심하렴. 덕분에 귀머거리까지 될 지경인데 적당히 하지 않겠니?"

내 말의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지 모르는지… 레베카는 시들시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가에 아기를 보내는 기분이야….'

나는 다른 의미로 혼자 내버려두기 걱정되는 누나가 부디 사고치지 않기를 빈다.

'전개가 바뀌어선 안돼….'

이번만큼은 시나리오가 예정대로 가야한다.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설령 눈 뜬 장님이 될 지라도.

**

레베카를 떠나보내고….

나는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었다.

'넌 누구냐….'

아침부터 느껴지는 적나라한 시선은 내가 어디를 가든지 따라왔다.

시종일관 나를 지켜보는 그 강렬한 시선은, 마치 암살자의 그것처럼 호심탐탐 기회를 엿보는 듯했다.

그러나, 감시자는 은밀함을 표방하는 암살자와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어설프게 모습을 드러내고 다닌다는 점에서 무척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서 내 신경을 갉아먹는다는 점에서, 그녀는 신개념 암살자라고 할 수 있겠다.

'…신경쓰여서 미치겠네.'

그런 내 곁을 지키고 있던 어린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쟤 왜 저래? 아침부터."

"글쎄…."

나는 레베라를 대신해서 나를 돌봐주고 있는 그녀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흐응. 땅콩이 이상해."

바람꽃은 내게 물을 떠다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다.

'우리 애가 이상해졌긴 했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설픈 감시자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

내가 시선을 주자, 데이지는 허둥지둥 천둥소리에 놀란 다람쥐처럼 부리나케 모습을 숨긴다.

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눈을 빼꼼 내밀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길다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서 그 위치가 훤히 보인다.

'요놈아, 다 보여….'

나는 하루 종일 반복되는 기묘한 숨박꼭질에,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던 바람꽃이 내 귀에 속닥거렸다.

"저기, 쟤 바보야? 설마 저게 숨은 거야?"

"글쎄다……."

우리 애가 그 정도로 바보라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여러모로 골치 아팠던 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로 했다.

'뭐, 애가 귀여우면 됐지….'

애가 조금 멍청해도 건강하고 착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것도 애가 곁에 있어야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작정하고 도망치는 데이지를 잡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덕분에 애한테 아침도 못 먹였으며, 머리도 못 땋아주었고, 옷조차 갈아입혀주지 못했다.

나는 먹이를 줘도 경계하는 야생다람쥐를 같은 데이지를 한숨을 쉬었다.

'사고친 건 아는 것 같다람쥐썬더….'

아무래도 어제의 헤프닝 때문에, 오늘 아침부터 데이지가 나를 피해다닌 듯했다.

죄 지은 서툰 아이가 나를 어떻게 해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저렇게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는 것도, 내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내버려두려니 안쓰럽고, 그렇다고 달래주자니….'

어떻게 행동해야하나 고민하는 중,

­꼬르륵.

어디선가 선명한 배꼽시계가 울렸다.

일부러 바람꽃을 들여다보자, 그녀가 거세게 발끈했다.

무척 억울하다는 듯이 얼굴이 새빨갛다.

"뭐야, 나 아니야! 아니거든!"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반응이 재밌어서 그냥 봤다.

나는 처음부터 굶주린 배꼽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아침부터 쫄쫄 굶어서 배고플 만도 하다.

'슬슬 달래야할까….'

하루종일 굶을 기세인 애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눈치싸움을 내 손으로 끝낼 수도 없다.

'스스로 반성해야지.'

애를 오냐오냐 키워서 제2의 망나니를 생산하는 비극은 있어서는 안된다.

이제 그런 슬픈 일은 두 번 겪고 싶지 않다.

게다가… 데이지는 스스로의 힘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깨달아야 한다.

훗날, 그녀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바람꽃이라는 튼튼한 수인족과 달리 보통의 아이들은 연약하다.

만약 데이지가 스스로의 힘을 주체하지 못한다면...언젠가 큰 사고로 번질 게 분명했다.

'차라리 잘됐어.'

이번 일을 계기로 데이지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생에 설탕만 주어진다면, 그걸로는 충치밖에 만들지 못한다.

역시 살아가는 데는 소금이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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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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