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조짐(4)
* * *
위대한 늑대의 후손은 모두 타고난 사냥꾼이다.
비록 그녀는 아직 여물지 못한 늑대였지만,
어린 늑대에게도 본능적으로 사냥감을 쫓는 능력이 있었다.
새파란 사냥꾼은 공기의 흐름 속에서 사냥감의 냄새를 맡았다.
'킁킁, 이 젖비린내…!'
그것은 꼬르륵꼬륵 소리를 내며 달아난 쥐톨만한 포유류의 냄새였다.
그 하찮은 은신술에 비해서 도망치는 솜씨 하나만 일류인 녀석.
그러나,
'도망쳐도 놓치지 않아…!'
다리가 짧은 사냥감이 어줍잖게 도망친 곳 또한 늑대의 영역이었다.
적어도 이 원 안에서만큼은, 설령 드래곤이라도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당의 구석탱이에 덩그러니 놓인 왜소한 등짝이 눈에 밟혔다.
흙바닥 위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아주 무방비했다.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로 땅이나 파고 있는 작은 사냥감은,
마치 풀을 뜯어먹는데 정신이 팔린 토끼처럼 손쉬워 보였다.
'…물어보고 싶네.'
그 뒷태를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어째서인지 이가 근질근질거렸다.
그 작은 존재감이 묘한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단숨에.'
바람꽃은 살금살금 소리를 죽이고 사냥감의 등 뒤로 다가간다.
지근거리에 도착했음에도... 이 한심한 녀석은 아직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대로 콱.'
지금이야말로, 무지막지한 어린 괴물에게 북부의 예절을 가르쳐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건방진 꼬마에게 과연 누가 위에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때ㅡ
꼬르르르….
"힝… 피터… *훌쩍."
ㅡ어디선가 맥이 쭉 빠지는 볼품없는 이중창이 들려왔다.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리에,
"푸하."
긴장이 탁 풀려버린 바람꽃은 헛웃음을 뿜고 말았다.
"…힉?!"
그제서야 바람꽃의 존재를 눈치챈 데이지가 흠칫 놀라서 몸을 떨었다.
놀란 나머지 일어서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그대로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히끅, 어, 언제…"
데이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딸꾹질까지 해댔다.
그 모습이 마치 도토리 맞은 토끼처럼 벙쪄 보였다.
바람꽃은 촉촉히 적어있는 보라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흐응?"
"으."
데이지는 그 오묘한 시선을 깨닫고, 황급히 축축한 얼굴을 가렸다.
"보, 지마… 절루가!"'
"으이구."
바람꽃은 고개를 푹 숙인, 위화감이 느껴지는 붉은 뒤통수를 보며 혀를 찼다.
'흥, 이제와서 숨기면 뭐 해? 이미 전부 다 봐버렸는 걸.'
평소 같았으면, 건방진 땅콩이를 찌질이나 울보라고 놀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분 전에,
바람꽃의 이름을 멋대로 줄여부르는 남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야, 람아. 너가 얘 좀 달래주고 와. 배고프겠다.)
(응? 내가 왜?)
(왜기는… 서로 친구잖아. 친구가 힘들어 하면 도와줘야지.)
바람꽃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내가 언제부터 인간이랑 친구가 된 거지…?'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봐도…
그녀가 그 건방진 땅콩이랑 친구가 된 기억은 없었다…!
이 족제비의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착각할 뻔했다!
바람꽃은 속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빼애액 소리를 질렀다.
(뭐야! 걔가 왜 내 친구야?!)
당연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피터라는 이름의 뻔뻔한 족제비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그녀를 꾸짖었다.
(갈! 이게 의리도 없이…! 피카츄도 라이츄도,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같이 밥 먹고, 산에서 들에서 때리고 뒹굴었으면 우리는 모두 친구! 너… 설마 이 노래도 못 들어봤냐? 내 주위 사람들은 전부 다 아는 유명한 건데? 어휴, 누가 북부 깡촌 출신 아니랄까봐….)
무슨 노랫말이 어쩌고 저쩌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여서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의 말이 너무 빠르고 길어서, 뭐라고 하는 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차고 있는 피터라는 인족 남자는…
'얄, 얄미워.'
아빠가 말한 것처럼… 입이 번지르르하고, 태도가 유들유들한, 족제비 그 자체였다!
문득 아빠가 술주정 부릴 때면 달고 다니는 말이 떠올랐다.
[언제나 족제비를 조심해라. 네 어미도 한 때 체신머리 없이 그 씹새….]
어쨌거나ㅡ
'ㅡ우리 동네는 깡촌이 아니야….'
고향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바람꽃은, 그런 모욕을 듣고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아, 아냐. 알아, 나도 알아! 그거….)
일단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했다.
허나, 피터가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말을 끊고서, 끝도 없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근데 그걸 아는 녀석이! 그리고, 심심하면 북부의 늑대니, 고귀하니, 뭐니 뻗대면서... 감히 친구를 버려? 어! 너 람이는 개인주의야!?)
(어, 어어?)
.
.
.
[복창합니다. 고귀한 늑대는,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
'짜증.'
바람꽃은 뇌리에 박힌 목소리에진저리를 쳤다.
덕분에 말이 많은 남자가 했던 부탁을 떠올린다.그리고, 그가 한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나랑 얘가 친구….'
언젠가 주정뱅이가 자주 하던 말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딸아, 가슴에 새겨둬라. 결국 인생에서 남는 건 친구 밖에 없단다. 급할 때 돈을 빌려야할 곳은 가족이 아닌… 친구니까.]
냄새나고, 무심한 아빠였지만... 그래도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는 마을 최고의 사냥꾼이니까!
'응, 알았어.'
두 남자의 조언을 받아들인 바람꽃은 주저앉은 데이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이 밥팅아. 더러워지잖아."
"……."
그러나, 데이지는 바람꽃이 기껏 내민 손을 외면하고, 자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손이 뻘쭘했던, 바람꽃은 콧잔등을 찌푸렸다.
'뭐야? 내가 기껏 도와주려고 했는데.'
솔직히 그동안 조금은 친해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은 살짝 충격이었다.
돌멩이만도 못한 섭섭한 취급에, 바람꽃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랑 땅콩이는 친구라며…!'
그 야비한 거짓말쟁이가….
족제비는 역시 입만 살았다.
'왠지 짜증나….'
두 번이나 자기가 먼저 말을 걸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고한 북부의 늑대는 남에게 매달리지 않는 법이다.
'싫다는데. 나도 몰라.'
잔뜩 빈정이 상한 바람꽃은 그대로 떠나려고 했다.
힝, 피터….
허나, 미련하고 좀스러운 웅얼거림 때문에 짜증이 왈칵 올라왔다.
'이럴 거면서 왜 피해 다닌거야?'
바람꽃은 땅을 파고 있는 데이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만큼은 알겠다.
이런 걸 보고 있다가는…
속이 답답해서 열불이 날 것이다!
"씨이, 일어나!"
참다 못한 바람꽃은 씩씩거리면서 데이지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
바람꽃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데이지는 당황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고 저항하려고 했다.
"냅두…."
"이 밥팅아!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이러면 달라져? 그 족제비는 괜찮다니까! 너도 봤잖아."
바람꽃의 기백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기가 죽은 데이지는 입을 우물우물거렸다.
"…피, 피터는, 족제비가 아니야…."
"흥, 아니 족제비야. 울아빠가 말했거든."
"아, 아냐…! 피터는 피터…."
"시끄러, 무조건 내 말이 맞아. 울보 모지리 바부팅 땅콩이가 뭘 알아."
"…이익."
말싸움으로는 필패.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데이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이 말 따위와 비교도 안되게 강력하다는 것을.
이 힘만 있으면… 얄미운 털뭉치 같은 것도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데이지는 주먹을 풀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진짜 싫어."
바람꽃은 풀이 잔뜩 죽은 데이지를 흘겨보더니,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사과하러 가지 그래. 잘못했으면."
"미, 미움 받으면 어떡해?"
"이러고 있는 게 더 미움 받지 않을까?"
"?!"
데이지는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굳어버렸다.
이내 어쩔 줄 몰라서 머리를 감싸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어떡해어떡해어떡해……."
'뭐, 뭐야. 얘 왜 이래?'
바람꽃은 심상찮은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머리라도 쥐어 뜯을 기세다.
"야, 야! 하지마!"
당황한 바람꽃이 애써 데이지를 붙들었지만…
그 무식한 힘에 부쳐서 도통 말릴 수가 없었다.
'이, 미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막 나가려는 땅콩의 관심을 돌릴 주제가 필요했다.
영민한 바람꽃은 곧장 그럴듯한 키워드를 찾아냈다.
"땅, 땅콩! 이러고 있으면. 또 '그 뱀같은 여자'가 족제비한테 접근할 걸?!"
"…??"
"피터 말이야!"
"...흡!"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데이지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상태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바람꽃은 이때다 싶어서, 데이지의 머리를 고쳐준 뒤,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감싸쥐며 소리쳤다.
"지금 빨리 가야해! 그 무서운 분도 외출하셨단 말이야. 우리라도 붙어 있어야지!"
"어, 어… 응!"
바람꽃은 다행히도 잠자코 따라오는 꼬마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기만한 남자를 떠올렸다.
'이럴 거라고 말 안했어...!'
얘, 이상하잖아!!
'각오해, 족제비.'
자신을 고생시킨 값을 치루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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