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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34화 (34/117)

〈 34화 〉 조짐(5)

* * *

까칠한 댕댕이가 투덜거리며 방을 나서자,

방 안에는 내 숨소리만 남았다.

정말 오래간만에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비어 있는 내 옆자리를 보았다.

언제나 내 곁에 있던 온기가 없었다. 뭔가 허전하고 조바심이 났다.

'차갑네.'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났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척 낯설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혜은이가 알면 놀라겠어.'

집에서 웹소설을 읽는, 혼자라는 시간을 즐겼던 현대의 나와는 거리가 먼 감상이었다.

오랜만에 혼자서 편히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붕 뜨는 것이 쉬어도 쉬는게 아닐 것 같았다.

'걱정되네….'

나는 나도 모르게 방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방문이 열리고, 나를 찾아올 그들을 기다리게 된다.

그게 참 낯간지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끼도 아니고."

외로워서 죽을 지경은 아니었다.

그저 이 외롭다는 감정이 낯설어서 좀이 쑤셨다.

'큰일이네.'

혼자서도 잘 놀던 내가 어느틈에 이만큼 변해버렸다.

나는 내가 그녀들을 바꾸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고보니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은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이다.

이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될까.

아니면ㅡ

­똑똑.

때 아닌 노크 소리로 인해, 상념에서 깨어났다.

'누구지?'

이 여관에 손님은 우리 밖에 없었지만, 우리 애들은 아니었다.

씩씩한 걔네들은 노크할 시간에 호쾌하게 문을 열고 닫는 편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레베카도 아니다.

그녀 또한 좀스럽게 노크하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다.

정체 모를 방문객이라도 내버려둘 순 없으니 대꾸했다.

"누구세요?"

살짝 문이 열리더니,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방 안을 살펴보는 듯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얍삽해보였다.

그녀는 방 안에 나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색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피터씨, 안녕? 무사해서 다행이다."

여관 집 딸 에이미였다.

그녀에게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쫄았다.

허나, 에이미의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를 보고 애써 경계심을 풀었다.

대충 그녀의 방문의 목적을 알 것 같았다.

"웃기시네. 나 버리고 혼자서 도망친 거 다 알아."

"도망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 살 사람은 살아야지. 그래도 이렇게 와줬으니까 용서해줘?"

에이미는 바구니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애교있게 손바닥을 비비적거렸다.

그녀 나름대로 사과하러 온 성의가 느껴졌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했나.'

따지고 보면 에이미에게 딱히 이렇다 할 죄는 없다.

애당초 사고는 우리 쪽 여자들이 쳤다….

그럼에도 괜히 에이미에게 푸념하고 싶었다.

어쨌든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그녀였으니.

"어휴, 너 때메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내 깊은 한숨에, 에이미는 벌떡 일어나 퍼덕거렸다.

"난 억울해! 피터 씨가 애 딸린 줄 몰랐단 말이야! 이건 피터 씨가 나빴어. 임자 있다고 진작에 말했어야지."

'이게 말이면 단 줄 아나…?'

…얘가 발랑까진 것도 모자라서, 감히 팔팔한 20대 청년을 유부남으로 만들고 있다.

민망했던 나는 과일 바구니에서 꺼낸 포도알로 그녀의 이마를 저격했다.

"헛소리하지마."

"악, 본성이 난폭하네… 흑흑, 하마터면 이런 남자한테 속을 뻔했어."

본성을 드러낸 에이미는 상대하기 피곤한 타입이었다.

얼척 없는 우는 시늉이 가증스러웠다.

그녀와는 고작 몇마디 나눴을 뿐인데… 벌써부터 진이 다 빠진다.

급피곤해진 나는 성가신 방문객을 쫓아내기로 했다.

"볼일 끝났으면 나가세요."

"엑? 재미없게. 어제랑 태도가 너무 다른데? 이제 볼일 다 본 여자란 거지?"

"혼난다."

"에잉! 포도알 내려놓으시고. 피터 씨도, 심심하잖아? 나랑 이야기나 하자~ 응?"

에이미는 내 손을 두손으로 꾹 쥐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아무래도 그녀의 목적은 단순히 병문안만은 아닌 것 같았다.

시덥잖은 주제일 거라는 예감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 귀찮은데."

그러나, 잔뜩 달아오른 십대는 말릴 수 없었다.

"어허,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털어놔. 이야기해주면 내가 좋은 거 줄게, 응? 자자, 그 미인이랑은 무슨 사이야? 그 여자가 분명 귀족이지, 그치? 내 말이 맞을 거야! 나 눈치가 빠른 여자거든."

"야, 아파. 됐으니까 좀 놓고 말해."

여관 집 딸내미는 왕성한 호기심 못지않게 팔 힘도 강했다.

"피터 씨야말로 말 좀 해봐! 머야머야? 응? 밀회? 불장난? 아니면…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도피!? 그럼! 설마, 그 두 애들은… 꺄!"

"……미친년."

어째 하는 짓이 묘하더니… 머리가 꽃동산에 있던 모양이다.

이딴 진부한 시나리오에 맞장구 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십대 청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마법의 단어를 내뱉었다.

"…너네 아버지한테 말씀 드리기 전에 가라."

"엑. 잠깐, 그건 비겁."

"너 때문에 방을 뺀다는 말을 들으시면…"

"아악! 갈게, 간다고!"

에이미는 발작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비록 그녀는 여기 나이로 성년이지만, 아직까지 부모님의 그늘 밑에 있었다.

덕분에 '너네 아빠한테 고자질한다'리는 대사가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부리나케 떠날 채비를 하던 에이미가 토라진 얼굴로 내게 뭔가를 던졌다.

"이 좀생이. 말해주면 이거 다 주려고 했는데…."

어딘가 낯이 익은 알사탕이었다.

'아마도 어젯밤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알사탕의 출처였다.

내 예상한 범인이 아닌, 의외의 인물의 소행이었기에 조금 황당했다.

"너, 어젯밤에 여기 왔었어?"

"엥? 아니? 밤에 여길 어떻게 와? 그러다가 아빠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자신의 어깨를 감싸쥐고 부르르 떨었다.

진저리치는 모습이 사탕을 투기한 범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얘가 아니라면… 그러면 어젯밤에는 누가ㅡ'

잠시 잊고 있었던 사탕의 출처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생각에 잠길 틈이 없었다.

"근데, 잠깐만… 피터 씨? 설마, 나를 그런 여자로 본 거야? 너무해… 흥, 피터 씨 때문에 기분 상했으니까. 책임져."

이 또라이….

에이미는 짐짓 씩씩거리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자리에 앉았다.

팔짱까지 낀 모습이 이대로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병먹금할 걸.'

괜히 입을 열어서 건수를 잡혀버렸다.

"아, 빨리! 해줘해줘!"'

어린애도 아닌, 혼기가 꽉 찬 여자는 바닥이라도 뒹굴 기세였다.

그대로 내버려두자니… 에이미가 너무 시끄러웠다.

적당히 둘려대고, 에이미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후… 알겠어. 원하는 대로 해줄게. 대신 이번 뿐이야."

"응! 한 번이면 충분해. 난 질척대는 여자가 아니거든."

그러나, 그 때.

­덜컥.

방문이 열렸다.

노크를 모르는 반가운 인기척이었다.

살짝 놀란 나는 반쯤 열린 문틈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틈 사이로 반짝거리는 두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하나는 보라색인데다가, 나머지 하나가 코발트색이어서 눈에 잘 띄었다.

아무래도 틱틱거리는 댕댕이가 도망친 고양이를 잘 데려온 모양이었다.

위 아래로 끔뻑거리는 눈이 보이니 안심이 되었지만…

'저기서 뭐하는 거지?'

좀처럼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게 무척 신경쓰였다.

어째서인지 아침의 감시자가 두 명으로 늘어나 버린 것 같았다.

에이미 또한 그들을 눈치챘는지 내 귀에 속삭였다.

"피터 씨네 애들이네? 왜 저기서 뭐해?"

"나도 몰라."

영문을 몰랐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어설픈 감시자들을 바라봤다.

두 꼬맹이들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 바빴다.

딱히 작은 목소리도 아니라서 그들의 대화는 환하게 들렸다.

"어떡해… 진짜로 있어…!"

"봐봐, 내가 말했잖아!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어?"

"응. 털뭉치 대단해."

"야!!"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잠깐 사이에 친해진 모양이다.

바람꽃이 틱틱거리던 것에 비해서 데이지를 잘 달래준 것 같다.

'잘 됐네.'

비로소 두 소녀가 진정한 친구가 된 것 같아서 흐뭇ㅡ

"에휴, 어쨌든 이제 알겠지? 족제비는 냅두면 안된다니까."

"…응! 이제 알았어…."

ㅡ하다고 하기에는…

두 아이가 대화가 좀 미묘했다.

**

데이지와 바람꽃은 신속하게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뭔데? 왤케 당당해?'

아장아장 걷는 폼새에 비해서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낯선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애들인지라, 그들은 에이미를 향해서 전투 의지를 드러냈다.

눈치 빠른 에이미는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분위기를 읽고서 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녀는 능청스러운 미소와 함께 뇌물부터 건넸다.

"안녕, 얘들아? 와아, 너희들 너무 귀엽다! 얘, 사탕 먹을래? 이거 무지 비싸고 달콤한데."

나름대로 괜찮은 전략이었다.

아마 보통의 애들이었다면 알록달록한 알사탕에 홀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애는 사탕 따위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싫어."

땅에 떨어진 것은 잘 먹어도, 남이 주는 건 잘 안 먹는다.

그야말로 길고양이급의 경계심을 가진 데이지였다.

단호하게 거절당한 에이미는 사탕이 든 유리병을 챙기려고 했다.

"아하하, 단 거 싫어하는구나. 알았…."

그 때, 가정교육을 잘 받은 댕댕이가 넌지시 말했다.

"잠깐. 여자, 좋은 말로 할 때 그 유리병 내려놓지? 난 궁금해."

데이지와 달리 바람꽃은 사탕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챙길 것은 챙기는 모습이 어린애치고는 참 알뜰한 것 같다.

'어디서 저런 말투를 배운 건지….'

북부란 대체… 거기가 어떤 곳일까 궁금해진다.

"그, 그렇니? "

뭔 일진에게 빼앗기듯이, 에이미는 순순히 사탕을 내려놓았다.

아마도 나라는 부상자를 만들어낸 데이지 때문에, 애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운 듯했다.

바람꽃은 은글슬쩍 유리병을 챙기며 데이지에게 물었다.

"땅콩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손 봐줄 거야?"

바람꽃의 건들거리는 말에,

데이지가 동그란 눈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요리조리 들여다봤다.

"…?? 손을 왜 봐?"

"아오."

그 모습을 본 댕댕이가 답답하다듯이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은근히 보는 재미가 있다.

한편, 애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에이미가 슬금슬금 방문으로 향했다.

레베카가 말한 것처럼, 어느샌가 발을 뺀 모습이었다.

"아, 맞다! 울 아빠가 염소 산책 시키라고 했지~!"

에이미는 지리멸렬한 변명을 남기고, 호다닥 달아나버렸다.

그야말로 완벽한 도주 경로였다.

'약삭 빠르기는'

데이지나 바람꽃은 넋을 놓고 방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정신을 차린 애들은,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혼자서 도망친 에이미 때문에 나만 곤란해졌다.

불만으로 빵빵하게 부푼 볼따구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서로 챙기고 친해지라고 붙여줬던 탓인지…

왠지 모르게 닮아있는 두 아이의 표정은 조금 난감하게 다가왔다.

그래, 분위기가 겁나 싸하다.

'뭐가 문제야 say something….'

얘들이 왜 이러는 지 이유를 모르겠다.

한동안 내버려뒀던 탓일까? 아니면 에이미라는 낯선 존재에 대한 거부 반응일까?

'혹시… 배고파서 그런가?'

그럴 싸한 이유다.

배고프면 짜증나는 법이지.

게다가 지금은 점심시간이었다.

'으이구.'

나는 작은 쪽을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먼치킨 같은 쬐그만 게 위협해봐야 별로 무섭지도 않다.

'그러게, 아침은 챙겨 먹었어야지.'

도망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어서 밥이나 챙겨먹이고, 달래줘야ㅡ

'…잠깐만.'

생각해보니… 전제가 잘못됐다.

어째서 내가 달래줘야 하지? 그전에 받아야할 게 있는데….

나는 샐쭉한 보라색 눈동자와 탐욕스러운 볼따구를 쳐다봤다.

마치 욕망의 항아리처럼 빵빵하고 못난 얼굴이었다.

그새 성자가 나타나서, 그녀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라도 한 걸까?

아침의 기 죽은 죄인은 어디가고… 애국열사처럼 당당해보였다.

'야, 너 사과하러 온 거 아니니?'

어째 입장이 거꾸로 된 것 같아서 어이가 없었다.

'이게 맨날 예쁘다, 착하다고 해주니까….'

슬슬 피터가 보자기나 가마니 쯤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실시간으로 사회가 무너지고 있었다!

현대의 재앙을 답습할 수 없다.

죄악심 없는 괴물로 자라게 둘 순 없다.

이 빵빵한 볼따구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바로 잡지 않으면….'

나는 곧바로 노란 싹을 짓밟기로 했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가끔은 마음을 독하게 먹을 필요가 있다.

"어허."

나는 양손으로 부푼 볼을 감싸쥐고 지그시 눌렀다.

이윽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축쳐진 찹쌀떡이 내 손아귀에 있었다.

"…???"

짓눌린 빵떡처럼 못생긴 얼굴.

당황스러운 듯이 눈은 동그랗고, 손은 어쩔 줄 몰라한다.

이럴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이제 도망칠 수 없어.'

나는 벌로써 찹쌀떡 같은 볼을 쭉쭉 늘리고 문질렀다.

촉감이 매끈하고, 상당히 잘 늘어나서 만지는 재미가 있다.

이 재미난 걸 이제 알았다니. 인생의 절반…

"피히으어?"

아, 맞다.

나는 얼떨떨해 보이는 보라색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복창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 짓고 도망쳐서 죄송합니다. 버릇없이 굴었습니다. 저는 강호의 도리도리를 모르는 못난입니다."

"에에브에?"

"왜긴, 잘못했으면 반성을 해야지. 비겁하게 도망이나 치고. 게다가, 뭘 잘했다고 당당해요? 예에?"

데이지는 내게 볼따구를 붙잡힌 채로 눈알만 대굴대굴 굴렸다.

죄의식이 깨어난 것 같았다.

"…지소하미다아…."

그래, 반성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뭐라고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벌 받으면 쓸쓸해 할 그녀를 위해서 기회를 주었다.

"어디서 나쁜 걸 배워서 와 가지고. 자, 좋은 말로 할 때 불어요. 숨김 없이 말하면 봐줄 지도?"

"에흐."

어디서 바람이 불었는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우정 테스트를 하는 이유는… 한 때 용사였던 것의 의리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고고한 용사의 후예라면 동료를 반드시ㅡ

"…터후치…."

"악! 땅콩, 너!"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참으로 얄팍한 우정이다.

"람이, 너는 손들고 서 있어. 이게 어딜 도망가고 있어. 풀죽 맛 좀 볼래?"

"싫어!"

결국 데이지와 바람꽃은 한나절 동안 나란히 벌을 서야했다.

**

저녁 무렵.

인성 교육을 끝내고, 지친 애들을 방에서 쉬게 두었다.

지금 쯤이면 자기들끼리 우정을 돈독히 다지고 있을 것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이게 더욱 친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대충 저녁 준비를 마치고.

나는 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입구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곧 다가오는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존재감에 심장이 뛰었다.

이윽고.

푸르스름한 저녁 공기 속에 석양이 어지러이 피어났다.

순간적으로 어둠이 자리를 비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선명한 붉음이 반갑기 그지 없었다.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역시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랐다.

나는 손을 흔들어 가며 고생했을 그녀의 귀환을 반겼다.

"레베카! 어서와요!"

"후후, 안에서 기다리지."

레베카는 요란을 떠는 나를 보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유달리 밤이 되면 차분해지는 그녀라서 그런지… 뭔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왜 이러지?'

영문을 모른 채로 나는 레베카를 훔쳐봤다.

흐릿한 조명 아래에 우두커니 선 그녀는 신비로웠며 무척 고요했다.

멍하니 보게 될 뿐…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겨울을 바라보는 가을바람에, 내 숨소리만 들려서 적막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

문득, 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레베카의 시선을 깨달았다.

뭔가 반짝거리는 우수에 찬 눈망울이었다.

어딘가 그리움마저 느껴지는 익숙한 눈이다.

­두근, 두근.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 감각은 불편했고, 단순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건 그녀의 것이다. 고요함 속에 들끓는 격류였다.

나를 향해서 토로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흥분인지, 희열인지, 아니면…

복잡하게 얽혀있는 감정은 콕 집어서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다.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레, 레베카…."

"…피터."

흐릿한 붉은색이 물기를 머금어 반짝거렸다.

그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조명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

그녀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속눈썹도, 살짝 벌어진 입술도 너무 가까웠다.

'위험한데.'

시간이 길어지고, 곧 멈추는 듯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리는 심장이 아팠다.

그게 너무 괴롭고 애달파서,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서 버텼다.

"후우…."

심호흡한 뒤.

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레베카를 담았다.

언뜻 태연해 보였으나, 그녀 또한 나와 같이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답을 구한다. 이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레베카. 솔직히 말해요. 뭐라고 하든... 전 괜찮으니깐."

"…."

레베카가 수줍게 고개만 끄덕였다.

당찬 그녀답지 않는 소심한 태도에…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묻는다.

"……뭔가 저질렀어요…?"

"아."

그런 내 말에ㅡ

"후후…."

레베카가 멎쩍은 듯이 웃었다.

그 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윽고 나는 깨닫는다.

레베카의 우수에 찬 눈망울은….

우리집 댕댕이가 집안 장판을 모조리 뜯어냈을 때와 판박이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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