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지키지 못한 약속(1)
* *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포시 웃고 있는 레베카를 노려봤다.
"……."
죄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예쁜 척하며 눈망울을 반짝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가증스러웠다.
천년 묵은 용이 부리는 주책에 헛웃음만 나왔다.
'하하, 요 장난꾸러기.'
그녀의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어설픈 미소 뒤에 감춰진, 칵테일처럼 뒤섞인 감정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흥분, 죄책감, 그리고 일말의 분노….
그 외에도 섞여있지만, 언젠가 한 번 겪어본 감정의 스펙트럼이었다.
망할, 어쩐지 익숙하다고 했다.
'애도 아니고.'
이는… 그녀가 사고를 쳤을 때의 심리와 똑닮아 있었다!
문득 레베카가 앞뒤 가리지 않고, 버터인지 마가린인지 하는 귀족을 들이박았을 때가 생각났다.
그 때의 아찔함을 생각하니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린다.
무척 성가신 예감이 든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
내 한숨 소리를 듣자, 레베카가 움찔했다.
그 모습이 왠지 벌 받고 있는 꼬맹이들과 겹쳐 보였다.
허나, 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욱 한심해 보였다.
더군다나 이 분은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어르신이지 않은가….
천살 연상인 누님께선 점점 가늘어져가는 내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
레베카는 눈을 내리깔고 우물쭈물 말했다.
"아, 아직 아무말도 안했는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변명하는 모습이 데이지만도 못해보였다.
이게 위대한 파충류라니….
날이 갈수록 사기를 당한 기분이 든다.
'아니, 믿은 내 잘못이지.'
애당초 레베카를 혼자 보낸 것은 내 실수였다.
이미 한번 댕댕이를 주워온 전적이 있는 만큼 주의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달달 볶고 싶지만.
'일단 넘어가자.'
레베카를 갈구는 건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판단해 보자.
일단 사태파악부터 나섰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화 안 낼테니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나는 아이를 달랬듯이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그러자,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레베카가 대뜸 입을 열었다.
"일단… 나는 죄가 없단다."
'죄가 없는 사람은 그딴 말 안해!'
그녀의 댕소리에, 울컥했지만 일단 참았다.
나는 평온한 얼굴을 가장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요, 물론 그러시겠죠. 전 레베카를 믿었어요. 이유가 있겠죠."
뼈가 담긴 과거형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역시 그대는 알아주는구나! 암, 언제나 그대는 '내 편'이어야지! 후우,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이구나."
김칫국을 아주 사발째로 들이킨다.
내 불편한 심리를 어느정도 눈치챘을 건데도, 밑밭을 까는 용가리가 영 수상쩍었다.
덕분에 점점 불안감이 차오른다.
애써 침착을 유지하는 내게 레베카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일단 시급한 문제이니, 자세한 건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마. 그대가 말한 상인 말이다."
뒤틀린 암트만.
우리를 연옥으로 안내해줄 노예상.
그 지옥문을 열 수 있는 열쇠까지 지닌 필요악.
전개를 위해서 그 자를 건드릴 수 없었다.
시간이 될 때까지 몰래 감시하는 게 해야만 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레베카에게 충분히 경고했었다.
'에이, 설마. 멍청이도 아니고.'
대책 없이 그 놈을 건드렸을 리가…
"그에게 사소한 문제가 있단다."
허나, 유감스럽게도.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문제라니?"
레베카는 자신의 하얀 뺨을 긁적였다.
여담이지만, 잡티 없이 매끈한 볼이 무척 탄력있고 부드러울 것 같았다.
과연… 그것은 데이지와도 겨뤄볼만 했다.
딴 생각에 잠긴 내게 그녀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썩 유쾌하지 않는 소식과 함께.
"음, 아무래도 그 자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구나."
데헷.
어째서인지… 레베카의 미소 뒤에, 그런 효과음이 들린 것 같았다.
그 대책없는 태도가 어쩐지 그리워져서 가슴이 사무쳤다.
더이상 그녀와 언어만으로 대화를 나눌 인내심이 없었다.
이제 남은 수단은… 그녀와육체로 나누는 대화 뿐.
나는 충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
"피, 피터?"
내 생각보다도 훨씬 보드라운 감촉이었다.
역시나 데이지 급의 파괴력. 조기의 목적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건, 조금 급작스럽구나."
처음에는 당황하더니만, 이내 레베카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치켜 올라간 입가가 쓸데없이 우쭐해 보여서 기분이 확 나빠졌다.
'웃어?'
"큼, 때와 장소는 분간해야지. 역시 그대도 어쩔 수 없이…."
빠득!
'지금 웃음이 나와!?'
참다 못한 나는 스스로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나흐 걱헝… 헤흐?"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던 레베카는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봤다. 어눌한 발음과 얼빠진 얼굴이 퍽 잘 어울렸다.
"이헤 무흐…."
나는 대답 대신에 그녀의 뺨을 쫙쫙 늘렸다.
오오? 데이지만큼이나 신축성이 뛰어났다. 이거라면… 얼마든지 늘릴 수 있을 것 같다.
"아야, 그, 그헤혀! 아하, 아흐다! 나아, 나저."
손에 감정이 잔뜩 실려서 그런지, 볼을 잡힌 레베카가 어쩔 줄 몰라하며 발버둥을 쳤다.
의외로 고통에 약한 듯이 벌벌 떠는 그녀의 모습이… 내 안에 잠들어있던 가학심을 부추긴다.
'울어? 아니, 뭘 잘했다고 울어!'
나는 그렁그렁한 루비색 눈을 감상하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이제부터 뒤졌다고 복창해요."
"므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억울한 목소리.
설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역시 육체적 교감은 불가피할 것 같다.
앞서 두 꼬맹이들에게 그랬듯이.
"뭐긴, 잘못했잖아요. 그럼 혼나야지."
"……!!"
이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가락에 힘을 더했다.
도망치지 못한 레베카는 새는 발음으로 처절하게 외쳤다.
"…나흐 배싱하헤냐!"
블루투스, 너마저!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기분. 잘 기억하도록.
"됐고. 숨긴 거나 털어놔요. 지금부터 거짓말 할 때마다 1센티씩 늘어납니다."
"햐, 햐디마… 나흐 이대하…!"
애나 어른이나…
잘못했으면 혼쭐을 내야 정신을 차린다.
**
어느 겨울의 끝자락.
혼자가 된 아이는 추위를 피해서 짚더미 속에서 잠을 청했다.
홀로 잠에 드는 것은 괴로웠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면 덜 춥다는 것도 배웠다.
그녀에게 있어서 외로움과 추위보다 괴로웠던 것은 굶주림이었다.
겨울은 먹을 것이 부족하다.
하물며 작고 어린 그녀는 혼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굶주릴 수 밖에 없는 계절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어떤 날에는 빈집에 숨어들어가 말린 과일이나 건육을 훔쳐야했다.
마땅치 않을 때는 먹다남은 쓰레기를 뒤졌으며, 간혹 짐승들의 밥그릇을 넘봐야했다.
겨울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아이가 훔쳐먹는 양이라도, 식량이 한정된 겨울에는 적지 않은 양이었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식량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했다.
'왜지?'
마을에 숨어든 그녀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빵집 아저씨였다. 얼굴이 아주 무섭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는 실제로도 자주 화내는 사람이어서, 그의 집에는 남자애의 곡소리가 자주 들렸다.
그래서 그의 빵을 훔치다 걸렸을 때는 흠씬 얻어맞을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그 빵집 아저씨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어설픈 도둑과 마주쳤음에도, 그녀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녀를 꾸짖지도, 탓하지도 않았다.
'괜찮을 거야?'
혼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끔찍한 굶주림이 해결되었다.
처음에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
도깨비가 사라진 방.
어린 늑대는 눈치를 살피며 은글슬쩍 저린 팔을 내려놓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살피며 물렁한 팔뚝을 조물딱 거렸다.
"키잉, 볼 아파… 팔도 아파… 배고파…."
다행스럽게도, 한참 동안 도깨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꼬르륵거리기 시작한 배꼽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녁 준비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바람꽃은 피터가 곧바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그제서야 분통을 터트렸다.
"짜증나아아! 내가 왜 혼나야해?!"
난 시킨대로 땅콩이를 데려왔을 뿐인데?
그녀는 꼭 쥔 주먹으로 베개를 콩콩 지르며, 울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허나 좀처럼 억울함이 풀리지 않아서 속이 답답했다.
어째서인지 잔뜩 뿔이 난 족제비 때문에, 땅콩이랑 같이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그것도 [바르고 고운 말을 씁시다] 라는 알 수 없는 팻말을 목에 걸고서!
"족제비 주제에…!"
바람꽃은 방문 너머를 주시하며 자신의 복슬복슬한 귀를 매만졌다.
다행히도 귀는 멀쩡했지만, 자꾸만 그의 잔소리가 귓속을 맴도는 것 같았다.
"씨… 대체 강남이 어디야."
왜 나 때문에 땅콩이가 그곳을 간다는 거지?
거기가 어디길래 나를 혼내는 거야?
바람꽃은 피터가 말한 '진정한 친구'라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싸우고 배신하면서 친해진다니…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일까?
바람꽃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방구석을 응시했다.
그 곳에는 두 손을 구부정하게 들고 있는 작은 형체가 있었다.
파들파들 떨고 있는 얇은 팔이 정말 미련해보였다.
'그니까 쟤가 찐친이라구?'
찐친, 진짜 친구.
족제비의 말에 따르면, 그녀와 저 모자란 땅콩이가 그런 셈이었다.
뭐, 하나도 달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리를 짓는 늑대에게 있어서 동료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물며 땅콩이와는 족제비라는 공동의 적이 있으니… 그럭저럭 교류하기 적당한 상대였다.
'음… 닭다리 정도는 줄 수 있겠어.'
데이지의 가치는 그 정도였다.
허나…
'저 밥팅이는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생각이야?'
유일한 상대가 벽만 보고 있으니 무척 심심했다.
'저릴텐데 적당하지.'
바람꽃은 혀를 쯧 찼다.
미련한 땅콩이를 위해서 똑똑한 자신이 알려줘야할 것 같았다.
"야! 족제비 갔어. 팔 내려도 모른다구."
"……."
대답이 없었다. 마치 벽에다가 말을 거는 기분이 들었다.
"땅콩아, 팔 안 아파? 말이라도 좀 해봐."
"……."
여전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쟤가 벽만 보고 있더니, 진짜 벽이라도 된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이게 나를 무시해?'
바람꽃은 미간을 찌푸렸다. 점점 오기가 붙었다.
그녀는 침대 주변을 펄쩍 뛰면서 데이지의 관심을 유도했다.
"야! 야! 땅콩! 손 내려! 내려봐! 아야얏!"
"……."
"흑, 무시하지마…!"
침대 모서리에 무릎까지 박아가며 노력했음에도 모조리 무시당했다.
벽만도 못한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바람꽃은 초라해진 마음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북부의 늑대가 이런 수모를 당하고 물러설 수 없었다.
말로 해서 듣지 않는다면… 마지막 수단 밖에 없었다.
(상대가 말로 해서 들어먹지 않는다면, 송곳니와 손톱으로 대화를 나누거라. 그러고보니… 그게 네 어미의 특기….)
그녀의 아빠는 마을 최고의 사냥꾼이자, 동시에 설득가였다.
그의 얼굴에 가득한 흉터는 수많은 대화의 결과물이겠지.
'넌 죽었다.'
아빠의 충고대로, 바람꽃은 움직인다. 살금살금 데이지의 뒤를 덮치려고 한다.
그녀는 울상일 땅콩이의 목덜미라도 깨물어서 눈물을 쏙 빼줄 생각이었다.
"너… 뭐야?"
그러나, 바람꽃은 설득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상정하지 못한 일을 마주보고 놀란 탓이었다.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땅콩이가…
"웃네?"
헤헤.
웃고 있었다.
마치 실성한 것처럼.
아주 헤실헤실 웃는다.
뭔데?
이유를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어서 무서웠다.
'정신이 나간거야?'
깜짝 놀란 바람꽃은 황급히 데이지의 어깨를 짤짤 흔들었다.
"야, 정신 차려! 많이 아파?"
"??"
그제서야 바람꽃의 존재를 눈치챈 듯, 데이지가 동그란 눈을 껌뻑거렸다.
"응? 모야?"
"응은 무슨… 이 밥팅아! 왜 대답이 없어!!"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짜증이 난 바람꽃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한편, 데이지는 손을 들고 있느라고 귀를 막지 못하고.
귓속을 삐이이 울리는 이명에 우거지상을 지었다.
"힝, 귀 아파…."
"으이구, 멍충아. 손부터 내려봐!"
바람꽃은 고개를 절레 저으며, 억지로 손을 내려주었다.
그제서야 팔이 저린 걸 깨달은 데이지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파, 팔이 찌릿찌릿해. 어떡해, 안 움직여…."
"허."
땅콩이는 모자라도 너무 모자란 것 같았다.
바람꽃은 이게 '찐친'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개구리랑 친구하는 게 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의리 있는 늑대는 모자란 동료라도 버리지 않는다.
게다가… 족제비가 못난 친구를 똑똑한 사람이 챙겨줘야하다고 했다.
'나는 개인주의가 아니야. 고고한 늑대인 걸…!'
바람꽃은 찌릿찌릿하다는 한심한 팔을 조물딱 주물러주었다.
"아흐, 히익."
땅콩이가 몸을 베베 꼬며 꿈틀거리는 모습이 제법 우스웠다.
동시에 무시당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조금 심술이 났다.
"그래서 뭐가 재밌어?"
"응?"
바람꽃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덧붙였다.
"아까 벌 받으면서 웃고 있었잖아. 내 말까지 무시하면서… 왜 그랬어? 너 이상해. 변태야?"
벌 받는 게 뭐가 그리도 좋은 일이라고.
바람꽃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런 그녀에게 데이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났어. 처음으로."
"뭐?"
"처음으로 혼나봤어."
그게 뭐야? 자랑이라도 하는거야?
바람꽃은 데이지의 고백을 듣고나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헤헤, 피터가 혼내줬어."
한편, 데이지는 다시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바람꽃은 그런 동갑내기가 영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해."
땅콩이가 너무 이상하다.
혹시 팔이 너무 아파서 머리가 이상해 진 게 아닐까?
알쏭달쏭했던 바람꽃은 창가에 놓아둔 화분을 쳐다보았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파란색 꽃이,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족제비도 이상하잖아.'
피곤해진 바람꽃은 그 결론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저택은 고요하고 음산해보였다.
흐릿하게 보이는 거대한 형상이 앞으로의 불명확한 전개를 알리는 것 같아서 좀 껄끄러웠다.
더군다나.
'애들 밥 먹이는 게 유일한 낙인데.'
하필 저녁 시간에 여길 오게 되어서 참으로 유감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쓸데없는 걸음을 하게 만든 장본인은 투덜거리고 있었다.
"로드께서도 내게 손찌검하지 않으셨는데… 게다가 그렇게 세게 만지다니…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고작 볼 한 번 꼬집은 걸로 떽떽거리는 게 성가셨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튼튼한 주제에… 엄살이 과하다. 천년의 짬이 무색할 정도다.
평소의 나였으면 레베카가 아무리 성가셔도 적당히 맞춰 줬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나는 매우 저기압이었다.
"그러게 누가 사고치래요. 누가 약속 어기래요? 어디서 잘못을 웃어 넘기려고 해요!"
"…한나절만에 사람이 변했구나. 설마 그 여관…."
"누가 변하게 만들었을까요?"
"……."
노려봐주자, 레베카가 슬며시 눈을 피했다.
말도 못할 거면서 왜 구시렁거리는 건지.
마음 같아선 그녀에게 대한민국 국군의 갈굼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어휴, 말을 말자.'
지금은 레베카를 갈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들은대로 한시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나는 레베카의 저택과는 비교했을 때 선녀나 다름없는 저택을 가리켰다.
"저녁이 식기 전에 돌아가죠."
"…가능하다면."
레베카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