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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36화 (36/117)

〈 36화 〉 지키지 못한 약속(2)

* * *

나와 레베카는 노예상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저택 내부는 의외로 멀쩡했다.

다행히도 유혈 사태는 없었던 모양이다.

"휴."

나는 한결 안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관부터 으리으리한 집이지만.

온 사방이 고요하고 어두침침해서 을씨년스러웠다.

게다가,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뭔가 꺼림칙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라?'

규모가 큰 저택인데도, 시종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 수상쩍었다.

'…설마, 함정인가?'

나는 앞서 가는 레베카를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음? 왜 그러니?"

레베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드래곤이라는 절대적인 위치 떄문인지, 그녀는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고, 악의에 둔감한 면이 있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아직 자정이 되지도 않았는데 불이 꺼져있고,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아요. 마치 들어오라는 것처럼. 너무 수상해요."

나는 예리한 지성을 지닌 명탐정의 톤으로, 못 미더운 조수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오호라, 그것 참 수상하구나. 내가 귀찮은 것들은 모두 재워두었으니 그럴 여지가 없을 것이니."

내가 제기한 합리적인 의문은, 레베카의 황당한 짓거리 때문에 송두리째 박살나 버렸다.

그 놈의 만능 마법…

제 딴에 드래곤이라고, 벌이는 스케일부터가 남다르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혼자서 섀도우 복싱을 한 모양새라서 개쪽팔렸다.

한편, 레베카는 늠름한 표정으로 내 손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실 없긴. 어서 가자꾸나."

그녀는 의외로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 대신에 다짜고짜 어두컴컴한 복도로 발을 내딛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붙잡힌 나는 별 수 없이 그녀의 꽁무니를 뒤따라 걸음을 옮긴다.

"천, 천천히 좀 가요."

레베카의 저세상 가이드를 다시 받게 되어서 그런지… 심장이 너무 두근거렸다.

­또각또각.

­터벅터벅.

고요한 저택에 그녀와 나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

.

"오."

도착한 방은 넓고 호화스러웠다.

방주인이 사치스러운 성향을 보여주듯이, 곳곳에 비싸 보이는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그 삐까번쩍한 사치품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탐욕이 생길 정도였다.

저 황금돼지 하나만 내다팔아도, 우리 꼬꼬마가 좋아하는 사탕을 백 개는 사고도 남을 것 같다.

'군침 도네.'

그런 감상을 하는 와중에,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의외로 그대도 밝히는구나. 그래도 때와 장소는 가리는 게 좋단다. 왜 함정일 수도 있잖니?"

그리 말하는 레베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웃음을 참는 듯했다.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까까지와는 정반대의 입장이라서 더 민망했다.

"…목적어는 붙이시죠?"

소심하게 반항했으나, 그 외에 할 말이 없었다.

하긴… 그녀의 지적처럼 저런 물건에 눈독을 들일 때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이 곳을 찾아온 목적을 떠올렸다.

사치품들에 눈을 떼고 주위를 살핀다.

곧이어 뭔가를 발견했다. 레베카에게 들은대로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나는 구석탱이에 축 늘어져 있는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인가요? 근데, 살아있는 거 맞죠?"

"일단 응급조치는 취했다만…."

레베카는 면목 없다는 듯이 뺨을 긁적였다.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 눈치였다.

'…이걸 쥐어 박을 수도 없고.'

이미 망한 상황에서 괜히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그 자에게로 가까이 간다.

그는 버터라는 귀족과는 정반대로 비쩍 마른 사내였다.

'뒤틀린 암트만.'

놈의 본명은 두드리 스펜서였다.

사람을 사고파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

바람꽃을 비롯한 수인족의 철천지원수.

도플이 전해준 그의 신상에는, 그가 신앙심 깊은 여신교의 신도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넌센스처럼 느껴졌다.

노예상인이라도 천국에는 가고 싶어~ 라는 것도 아니고....

'어질어질하네.'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노예상인이라는 족속은 살아있어봐야 해악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필요한 존재였다.

마치 필요악으로써,그에게도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뭐… 이젠 아니지만.

"망할."

예정되어있던 전개가 송두리째 틀어지게 생겨서 눈앞이 막막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죽어가는 사내를 살폈다.

두드리 스펜서의 얼굴은 거무죽죽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발작하며 침을 줄줄 흘리는 몰골이 석연찮았다.

이 놈이 오늘 내일 한다더니… 레베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제압만 할 생각이었단다.)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 그 자도 순순히 협조하려고 했고.)

(허나… 연옥이라는 물음에 스스로 독을 삼키더구나.)

(어금니에 숨겨둔 형태라 미처 반응할 수 없었단다.)

(불찰이구나.)

독이라니.

게다가 자결이라니…?

레베카의 변명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기에 머리가 복잡했다.

한낱 노예상인에 불과한 놈이… 이따위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나?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살려고 아득바득 거리던 귀족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놈에게 목숨이 여벌로 있거나,

아니면 뭔가를 숨겨야할 것이 있음이 분명했다.

'구린내가 나네.'

나는 후자의 가능성에 무게추를 더했다.

그의 자살 기도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평상시부터 어금니에다가 독을 숨겨두었다는 것.

이 소름 돋는 형태는 이 세계의 원작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제국의 끄나풀이었나….'

황당스럽고 예상치 못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것 외에 두드리 스펜서가 자결을 시도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내 가정이 맞다면…더더욱 이대로 둘 수 없었다.

이 자에게 들을 게 더 많다는 소리였으니.

"해독할 수는 없는건가요? 마법 같은 걸로."

아쉬움 가득한 내 말에, 레베카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란다. 치유는 신성의 영역이지. 그나마 독이 퍼지는 것을 늦추는 게 최선이었단다. 그것도 머지 않았지만."

빌어먹을 세계관.

드래곤조차 죽은 이는 살리지 못한다.

놈이 복용한 독이 뭔지도 모르니 해독할 수도 없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늦게 전에 정보라도 들어야한다.

그러나.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더구나. 죽음을 각오한 자의 고집은 성가시지."

하는 짓거리에 비해서 고절한 새끼라는 게 레베카의 평가였다.

유감스럽게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놈은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언제 숨이 넘어갈 지 몰라서 시간을 두고 교섭할 수도 없었다.

점점 급해진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정신조종 같은 마법은 못 써요?"

"알고 있으면 진작에 썼겠지?"

레베카가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아, 과연. 맞는 말이네.

"그럼,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고문하면…."

"나는 힘조절을 하지 못한단다. 게다가 거짓을 고하면 어쩌려고."

참 똑똑하고 영리하신 드래곤이다.

근데… 그걸 그리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왜 사고를 치는지?

그녀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답이 없다.

이대로 유일한 단서가 꼴까닥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치료 잘하고, 심문 잘하는 새끼가 딱 그 놈인데.'

내가 무능력한 마을사람이 아니라, 그 미치광이 서브 남주였으면 모든 게ㅡ

'잠깐만…?'

뭔가 긴가민가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먹힐 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대로 멀뚱히 있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레베카."

"응?"

"연기 좀 하세요?"

"뭐, 한때 명연기로 이름을 날린 적이 있지."

**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우중충한 하늘이 보였다.

그 탁한 은빛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가면의 수도사는 우울하다.

이제 그를 괴롭히는 것은 피로감 뿐이 아니었다.

"기사님, 우리 오빠가 정말로 무사할까요? 어머니가 혼자 계실텐데 걱정이에요. 이렇게 말을 타본 건 난생 처음이에요.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높은 곳에 있으니 가슴이 탁 튀이는 게…."

소녀는 병약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입이 활달한 계집이었다.

그것도 너무.

'귀가 따갑군.'

수도사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화전민의 마을에서 이 절름발이를 증인이랍시고 데리고 나온 게 잘못이었던 것 같다.

무거운 머리 탓에 섣부른 판단을 내려버렸다.

수도사의 머리가 지끈거리든 말든, 소녀는 재잘거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진짜 웃기지 않아요? 저희 마을 촌장의 아들은 20살이 되도록 당나귀를 말이라고 착각했어요. 바보 같은 땅딸보. 그리고 전에 우리 오빠가 저 때문에…."

[시끄럽다. 지금부터 조용하지 않으면 버리겠다.]

참다 못한 수도사는 차가운 미성으로 그녀의 수다를 끊어낸다.

그러나, 소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치~ 기사님이 억지로 데려왔으면서 그건 너무 하지 않아요? 끌고 나왔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죠. 이걸 여신님께서 아시면…."

[함부로 그 분을 운운하지 마라. 화전민.]

살벌한 목소리에도, 소녀는 짐짓 태연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마을에서의 소심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소녀의 천역덕스러움에 수도사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문제는 귀가 따가운 수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콜록, 켁, 말을 너무 많이…."

[하아.]

장난스럽게 시작된 기침소리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또인가.'

수도사는 몇 번이고 반복된 일에 한숨을 푹 쉬었다.

[내려라.]

"콜록, 고, 마."

그는 기침을 하는 소녀를 바닥에 앉히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안색이 파랗던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활기가 돋았다.

'주교께서 아시면 경을 치겠군.'

고위 사제의 권능을 화전민 따위를 치료하는데 써버렸다.

교단의 방침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녀는 자신이 누린 호사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몰랐다.

"와, 역시 약발이 굉장해요."

교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신성력은 약발 따위로 취급되었다.

모욕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굳이 그녀에게 처벌을 내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 손가락으로도 부러뜨릴 수 있는 여자였다.

굳이 손을 쓸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히히힝.

"걱정해 준거야? 하인커스!"

그의 애마가 이 절름발이 소녀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이 계집아이도 하인커스를 무척 예뻐했다.

"꺄, 귀여워. 진짜 착해, 너무 예뻐."

­히히히힝.

환상종인 유니콘의 피가 섞여있다는 하인커스는 성정이 순수한 사람만을 좋아하는 영물이었다.

그런 하인커스가 이 소녀에겐 자신의 등을 허락하고 진심으로 반기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죄악이라는 화전민을.

[…….]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 손을 쓰기 난감했다.

그가 알던 것과 달라서….

'후우, 이미 늦었으니.'

수도사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마음에 하늘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바라본 하늘 위의 구름.

어쩐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꺼림칙하군.]

**

'으으….'

죽어가는 사내는, 문득 따스한 불빛을 느꼈다.

찬란한 빛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눈을 떠라. 두드리 스펜서.]

곧이어 자신을 부르는 천상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아름다운 미성은 감히 인류의 목소리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두드리 스펜서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여, 여신…."

[그래, 여신께서 보내셨다.]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린다.

"그, 그. 가면은…."

[여신의 대행자. 성광교의 가장 낮은 검. 그대를 도우러 왔다.]

순백의 가면을 쓴 수도사는 신성한 빛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무척 차가운 미성은 죽어가는 사내에게도 또렷하게 들렸다.

[그대에게 남은 시간이 없도다. 마지막 본분을 다하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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