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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유괴하다!-37화 (37/117)

〈 37화 〉 지키지 못한 약속(3)

* * *

두드리 스펜서는 초점을 잃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하얀 수도복, 표정 없는 가면, 차가운 미성, 순백의 검….

정황상 교단에서 온 자다.

…그것도 미신처럼 전해지는 존재.

홀로 죄인을 쫓고 심판하는 자.

가장 낮은 곳을 전전하는 여신의 근면한 검.

'가면을 쓴 이단심판관…!'

심판관은 새하얗고 시렸다.

소문에서 툭 튀어나온 것처럼.

정녕 여신께서 보우하신 걸까?

그렇다고 믿고 싶을 다름이다.

"어, 어떻게…."

허나, 두드리 스펜서는 일말의 의심을 버리지 못한다.

애시당초 자신은 주변에 구호를 알린 적이 없었다.

"…알고 왔소?"

[여신의 계시가 있었다. 늦은 듯 하지만.]

"계시…."

만약 이게 여신의 안배라면…

감히 필멸자가 의문을 품을 수 없었다.

"쿨럭, 쿨럭."

죽어가고 있기에 신의 분노는 사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두드리 스펜서는 그저 침묵하고, 스스로 삼킨 독약의 고통에 진저리를 칠 뿐이다.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마땅치 않다만.]

수도사는 검은 피를 토하는 사내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이윽고 오색의 찬란한 빛이 그 사이에 어우러졌다.

"아, 아아…."

[이걸로 고통만은 없을 것이다.]

"이, 이럴수가."

신성한 빛이 끔찍한 통증을 가져갔다.

거짓말 같은 기적.

그야말로 여신의 자비였다.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라. 계시의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느냐?]

비상한 두뇌라도 죽음 앞에서는 한풀 무뎌진다.

결국 두드리 스펜서는 의심을 내려놓았다.

"대… 대성당… 대성당의, 지하로… 가시오. 언제나, 그 곳이었소… 그 아래에…"

[…….]

수도사는 잠깐 침묵한다.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 외에 알아둬야할 것은.]

"자, 장부에, 적혀… 서재, 바닥에 숨겨…."

두드리 스펜서는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점점 입을 달싹이는 것이 힘겨웠다.

얼어붙는다. 너무 추웠다. 몸의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왜지? 이제 고통은 없거늘… 여신께서 자비를 베풀었거늘.

'그 마녀만 아니었다면.'

힘이 없는 것이 원통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 분을 위해 못다한 일이 산더미 같거늘.

'…허망하군.'

그 분께서 직접 내려주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 송구스러웠다.

언젠가 그가 세상에 우뚝설 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저하… 강녕…."

마지막 순간까지 입에 담지 않았던 마음이 새어 나왔다.

수도사는 죽어가는 이를 향해 성호를 그었다.

[…너의 신은 너를 알아주길 바라마.]

"가, 감사하…."

그는 짤막하게 숨을 삼켰다.

그 후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

나는 멈춘 사내를 멍하니 바라봤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혼란스러웠고.

동시에, 내가 알지 못한 삶이 여기서 멈추었다는 사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덩달아 굳어버린 내 어깨 위로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너무 곱게 내버려뒀구나. 그 아이와 약속하지 않았니?"

가라앉은 마음이 레베카의 온기로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했다.

나는 상념을 멈추려고 노력했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글쎼."

레베카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반면, 여유가 없었던 나는 다른 생각한다.

그 아이.

푸른 눈동자.

어린 그녀에게 복수를 약속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사정을 말해야죠."

속으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을 해버렸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사라졌다고.

한편, 바람꽃을 달래는 일이 마냥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숙원이 틀어진 셈이니.

나는 땡깡을 부릴 댕댕이를 떠올리며 레베카에게 말했다.

"그 때는 레베카도 거들어요."

"그래, 그러마. 그대가 고생했으니."

이 사태의 원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빈정 상한 댕댕이에게 물릴 걱정은 덜었다.

"…이게 되네."

나는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답답한 가면을 벗는다.

비로소 한시름을 내려놓았다.

'후, 운이 좋았어.'

폴리모프 마법과 적절한 애드립.

진통제와 레베카의 빛 연출.

급조한 계획이었지만, 그럭저럭 두드리 스펜서를 구워 삼을 수 있었다.

일이 틀어져서 조마조마 했는데, 최악의 사태는 넘긴 것 같다.

긴장이 풀리자, 맥이 탁 빠진다.

갑자기 들이밀어진 정보 탓에 과부하된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여관으로 돌아가서,

토끼 같은 꼬맹이들에게 어깨라도 주물러달라고 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레베카는 노예상의 시체를 아공간에 갈무리하며 중얼거렸다.

"쯧, 죽는 순간까지 고통 받아야하거늘. 너무 자비롭게 보내주었다."

용은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작지 않은 감정이 뻐끈하게 느껴졌다.

내게 그녀의 분노가 무거운 의미로 다가왔다.

어느 노예상인의 죄악.

내가 외면하고자 했던 것.

그것이 레베카의 역린을 건드린 게 분명했다.

**

어느덧 주변을 정리한 레베카가 내게 말했다.

"슬슬 움직이자꾸나. 이 곳은 오래 있을 곳이 못 되니."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에게 해야할 말이 있었다.

"…그 전에 말이에요."

그런 내 목소리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이 무거운 탓일까? 아니면 목소리가 잠겨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 실은 폴리모프 때문이다.

광신도의 모습을 빌렸더니, 목소리까지 고추 뗀 거 같은 미성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게 내겐 너무 낯간지러운 목소리라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서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거, 마법은 언제 풀려요? 듣기 좀 그런데."

레베카는 진저리 치는 나를 보더니,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흠, 어여쁜 목소리이지 않니? 그대가 스스로 무대 위에 나서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언뜻 보기에는 내가 곤란해 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지만…

그 실상은 캐스팅에서 탈락한 여배우의 심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럴거면 내게 연기는 왜 물어본 거니? 잔재주나 부리게 하고."

레베카는 조명과 연출을 맡은 게 아쉬운 듯했다.

게다가, 그녀는 은근히 연기부심이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그녀의 연기를 회상하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러게 누가 발연기하래요? 레베카가 답이 없으니까 제가 한 거잖아요."

"바, 발연기!? 내가 500년 전에 극장을 주름…."

나왔다. 레베카의 필살기, 라떼는 말이야~.

"네네, 그러시겠죠."

살아있는 화석께서 무리수를 던지는 게 안쓰러워서 넘어가주기로 했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귀찮기도 했고.

"어허, 진짜래도?"

레베카가 내 옆에 바짝 붙어서 하이톤으로 떽떽거렸다.

귀가 따가웠지만,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이런저런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당시에 대배우 루비를 모르는 이가 없었단다. 내가 무대 위에서 손만 내밀면 다들…"

"응, 500년 전 사람 다 죽었네요~."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바로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피터여…? 근래에 들어서 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땅에 떨어졌다고 여겨진다만…."

"너 자신을 알라.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마시죠?"

"어쩜, 갈수록 기어오르는 구나. 감당할 수 있겠니?"

"아니, 레베카가 알아서 내려오는 건데요?"

나는 레베카와의 티격태격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그녀가 내게 맞춰주고 있다는, 그런 생각.

"으으,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레베카의 모습은 생기가 넘쳤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몰라보게 밝아졌다.

"…됐다. 필멸자가 뭘 안다고… 나 때는 이런 거 상상도…."

옆에서 구시렁거리는 드래곤이라니….

그 모습이 우스워서라도 근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뭐, 이제보니 연기 좀 하시네.'

레베카의 주장처럼.

그녀는 정말로 명배우였을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시트콤 쪽으로.

**

어른들이 쏙 빠진 저녁시간.

고기로 가득한 식탁은 퍽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족제비~ 사랑… 아니야. 어쨌든.'

바람꽃은 속으로 좋아서 비명을 질렀다.

그 정도로 흐뭇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바람꽃은 좋아하는 닭다리를 두고도 좀처럼 맛을 즐길 수가 없었다.

다름이 아니다.

평상시와 달리 축 쳐져있는 누군가 때문이었다.

"아앙~"

출출했던 바람꽃은 입안 가득이 닭고기를 베어물려고 할 때였다.

"후우…."

"켁."

그럴 때면, 어김없이 묵직한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하마터면 닭다리가 목에 걸릴 뻔 했다.

바람꽃은 입에 물고 있던 닭다리를 내려놓고, 한숨소리의 주인을 노려봤다.

땅콩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새하얀 수프를 휘젓거리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밥맛이 뚝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답답해…!'

일부러 이러는거야?

나 멕이는 거야?

바람꽃은 그녀의 가훈을 떠올렸다.

밥은 즐겁게 먹어야한다는 아버지의 말씀.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즐거운 식사시간을 망치는 괘씸한 땅콩이.

짜증난 바람꽃은 데이지를 향해서 닭다리를 뻗었다. 이걸로 타협하자는 의미였다.

"야, 적당히 하자?"

"…웅."

그러나, 데이지는 바람꽃의 닭다리를 본체만체했다.

그저 관성처럼 대꾸하는 눈치였다.

'…숨 막혀.'

이대로 밥을 먹었다가는 체할 것 분명했다.

영리한 바람꽃은 꺠달았다.

이 꼬맹이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즐거운 식사는 물 건너간다는 것을.

"헤이, 땅콩. 뭐가 문제야. 섬딩?"

바람꽃은 피터처럼 데이지를 달래보려고 했다.

"…아니야."

"뭐기?"

그러자, 데이지가 눈에 띄는 반응을 보였다.

"섬딩이 아니라, 섬띵이야."

"…어쩌라고."

눈이 또렷해진 데이지가 평평한 가슴을 두드렸다.

반면, 바람꽃은 손톱으로 설득하고 싶은 것을 애써 참는다.

간신히 짜증을 가라앉힌 바람꽃은 데이지에게 물었다.

"야, 너는 배도 안고파? 하루종일 굶었잖아."

"아니, 배고파…."

"근데 왜 안 먹어? 먼저 먹으랬잖아? 그러면 밥 좀 먹으면 안 돼?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야? 왜 내가 밥 먹을 때마다 한숨 쉬지? 으으, 너, 너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말을 하다가 보니 점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땅콩이 진짜 짜증나.

바람꽃이 미치거나 말거나.

데이지는 뾰로퉁한 얼굴로 대꾸했다.

"…기다릴 거야."

"어휴, 모라는 거야."

바람꽃은 그저 답답하고 출출했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고기완자라도 집어먹으려고 했다.

그러자,

"안 돼! 기다려!"

지금껏 얌전히 있던 데이지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짤막한 팔을 바람꽃의 고기 완자를 향해 뻗었다.

바람꽃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악! 놔! 미쳤어?! 내꺼야!"

어린 늑대는 자신의 먹이를 사수하기 위해서 꼬리를 바짝 세웠다.

**

내게 있어서 판타지는 로망이었다.

그래서 웹소설에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가리지 않았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마도 한때의 나는 판타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동경했던 것 같다.

'판타지가 현실이 될 줄은 몰랐지만.'

잡생각에 잠겨있던 내게 레베카가 말했다.

"그대가 내게 말했지… 눈 뜬 장님이 되라고."

"네."

그리 말하는 그녀의 곁에는 검게 칠해진 철제문이 있었다.

그 문 틈 사이로 뿌연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레베카는 문고리에 손을 얹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대를 이해한단다."

"……."

"그대의 우려는 합당했다."

그녀는 손아귀로 문고리를 부수며 힘없이 읊조렸다.

"그러나… 아주 조금… 유감스럽더구나."

"알아요."

"약속을 어긴 내가 가질 생각은 아니지만…"

"그만. 저도 이해해요."

나는 레베카가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의 행동은 세간의 정의로 따지면 올바른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지탄 받아야 마땅한 것은 내 몫이었다.

누군가가 방관은 공범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두드리 스펜서와 같은 연장선에 있었다.

나 또한 외면하고 실리를 취하려 했다. 물론 그 마음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반면에, 그런 나와 달리 레베카는 마치 이야기 속의 주인공 같았다.

강하고 아름다우며, 아픔을 가지고 있음에도 타인을 도우려고 하는 정의로움을 가졌다.

진정한 의미에서 동경하게 된다. 나 같은 놈에게 어울리게 만든 게 죄스러운 정도다.

'어휴, 지지리 궁상이네.'

실시간으로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스스로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실감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죄인의 침묵 속에 철제문이 열린다.

이윽고 나는 눈을 감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듯.

현실이 된 판타지가 내게 고민을 안겨주기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었으므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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