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흐림
* * *
아이는 의자를 타고 올라간다.
창문을 활짝 열고, 그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다.
창 밖에 추적추적한 비가 내리고 있다.
겨울을 바라보는 가을비가 창문을 넘나든다.
이따금 빗방울이 아이의 콧잔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린 비가 톡톡 두드리면 작은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으, 추워.'
그녀는 차가운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이는 비를 맞으며 창 밖을 바라봤다. 하염없이.
"…이상해."
그런 데이지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바람꽃은 한숨을 푹 쉬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이상해."
평소에도 이상하던 땅콩이.
그런 꼬맹이가 오늘 하루는 특히나 더 이상하다.
'대체 왜 저래?'
설마 내가 밥 먹어서 삐진건가?
결국 자기도 맛있게 먹었으면서…?
'뭐, 아니겠지.'
바람꽃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꼬마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지 뻔히 알고 있기에.
"치."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바람꽃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의 일이니까.
'…나랑 얘기나 하지.'
큰 맘 먹고 먼저 놀자고 꼬드겨도 반응이 없으니 재미가 없었다.
하여튼…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땅콩이다.
지쳐버린 바람꽃은 데이지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다.
그녀는 침대에 뛰어들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나도 몰라! 나 잘거야. 그리고… 추우면 이거나 덮든가!"
"…??"
그 순간, 데이지는 자신의 머리 위를 뒤덮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뭐지?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이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침대에 누워있는 바람꽃을 바라본다.
조금 심술궂어 보이는 얼굴이 보였다.
뭔가 민망해진 데이지는 이불을 꾹 쥐고서 말했다.
"…고마워."
"됐어, 잘 때 창문이나 잘 닫아."
"응. 알았어."
"…추우면 감기 걸려."
바람꽃은 툴툴거리다가 홱 돌아눕는다.
한편, 데이지는 팔랑거리는 풍성한 꼬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털뭉치는 의외로 심술궂지 않다고.
가끔씩 사탕을 나눠줘야할 것 같다고.
데이지는 이불을 고쳐서 몸에 둘렀다.
제법 포근해서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있으니 조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따듯해.'
그녀는 따뜻한 것이 좋았다.
뜨거운 팬케이크, 김이 나는 수프, 미지근한 체온… 그리고 따스한 햇볕.
그녀는 햇살의 온기를 알아버렸다.
햇볕 아래에서만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데이지(Daisy)는 줄곧 기다린다.
그녀의 해님을.
이제 홀로 겨울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에.
**
쏴아아아.
갑자기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데이지는 새근새근 잠든 털뭉치에게서 눈을 떼고 창밖을 바라봤다.
검은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퍼붓고 있었다.
'으, 시끄러.'
요란한 빗소리.
빗소리는 잠든 털뭉치가 오만상을 찌푸릴 정도로 컸다.
이러다가 깨어나면 어쩌지?
그러면 조금 미안할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데이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늦어."
놓아둔 의자 위로 올라갔다. 의자와 창가가 벌써 축축했다.
이제 정말로 창문을 닫아야할 때였다.
그래도 아쉬우니깐… 마지막으로 딱 한번!
이름하야ㅡ
'찐막….'
진짜 마지막으로.
데이지는 창문을 닫기 전에 고개를 내밀어 본다.
굵은 빗줄기가 그녀의 정수리를 쿡쿡 찔러댔다.
…따가워.
데이지는 두 손으로 머리통을 가리고서 바깥을 둘러본다.
사방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너무해.'
괜히 비만 맞았다는 생각에 우울해 졌다.
"아!"
그 때였다.
그녀가 울상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려고 할 때.
빗속에서 스멀스멀거리는 움직임이 보였다.
착각일까?
데이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어둠 속을 뚫어져라 본다.
많이 흐릿하지만… 사람인 것 같다.
'뭐야? 누구야?'
그 자는 빗 속에서 덩그러니 서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있는 방을 바라보면서…!
"힉…!"
뭔가 으스스해서 무서웠다.
몸을 푹 숙이고, 눈만 빼꼼 내밀었다.
'…귀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수상한 사람을 관찰한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 사람에게서 별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도감과 지루함, 그리고 작은 호기심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다 큰 어른이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왜 우리집 앞에서 있어?'
데이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비 많이 맞으면 열이 나는데….'
어른인데도 모르나?
내가 알려줘야 할까?
데이지는 난감해져서 한숨을 포옥 쉬었다.
'어떡하지? 피터가 모르는 사람을 조심했……?'
…어?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데이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을 재차 살펴본다.
어째서인지 낯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니, 보면 볼수록 낯이 익었다.
비록 비가 많이 오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가 애타게 기다리던ㅡ
"…피터?"
그가 빗속에서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하염없이.
.
.
"피터어! 아아악! 피터어어!"
데이지는 목이 아프도록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의 짧은 생에서 가장 큰 목소리였다.
쏴아아아.
허나, 애타는 목소리는 닿지않는다.
데이지가 아무리 불러봐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빗소리.'
으… 모야.
그 대신에, 애꿎은 바람꽃만 단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렸다.
그러나, 데이지는 칭얼거리는 바람꽃을 배려해줄 여유가 없었다.
"콜록, 콜록…."
잔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데이지의 눈은 빗 속을 향한 채로 떨어지지 않는다.
차가운 비는 사람을 아프게 만든다.
그녀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힝."
보라색 눈동자는 걱정이 차올라서 점점 축축했다.
이제야 세상을 배워나가는 아이의 머릿속은 새하애졌다.
'왜 그러는 거야? 왜 안 들어와? 아픈거야?'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대로 있으면 안돼!'
데이지는 의자에서 폴짝 내려간다.
다급한 걸음으로 문을 박차고 뛰쳐 나간다.
쾅!
엑! 머, 머야…?!
뜨악한 목소리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
.
한달음에 도착한 정문.
저 문 너머에 그가 있다.
데이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을 밀었다.
철컥.
그러나, 열리지 않는다.
철컥.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이거 때문에…!'
그 사실에 몹시 화가 났다.
데이지는 분을 참지 못하고, 문을 향해 작은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작은 주먹이 닿을 때마다, 애꿎은 나무문이 쩌렁쩌렁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에 따라 작은 주먹도 점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쩌적.
조막만한 주먹은 기어코 항복을 받아냈다.
곳곳에 균열이 가득한 문은 맥없이 열린다.
'따끔거려.'
데이지는 숨을 고르며 문 너머를 살핀다.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있다…!'
피터는 물에 젖은 생쥐만도 못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처음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한 얼굴….'
무엇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데이지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머하고 있어?!"
찌푸린 미간과 부풀린 볼에 심통이 가득했다.
걱정했던 것 만큼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었다.
"아이고."
한편, 피터는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털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눈가를 드리운다.
이제 그에게 코와 입술만 보인다.
데이지는 그 중 입술을 빤히 바라봤다.
그것은 언제나의 호선을 그리며 달싹였다.
"음, 여기에는 어린이는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장황하게 시작하는 말.
그러나, 데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바삐 움직이는 입술을 물끄러미 보았다.
평소와는 다르다.
그의 미소는 파르르 떨리는 새파란 색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이상한 얼굴이었어.'
데이지는 머리카락에 뒷편에 숨어있는 표정을 떠올렸다.
마땅히 설명할 수 없었던 표정.
"그나저나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다니, 그러면 키 안 크는데…."
쾌활한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흐려…?'
그제서야 데이지는 깨닫는다.
피터가 단 한 발자국도 다가오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했다는 것을.
"아."
그 때와 같은 얼굴.
잠깐 잊고 있었던 겨울의 기억.
(…마법을 걸어줄게. 이제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사랑하는 내….)
그녀는 홀연히 사라졌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피터도… 사라져?'
데이지는 입술을 앙다문다.
글썽거리는 보라색 눈동자는 더이상 양보할 수 없는 것을 담았다.
'붙잡아야해…!'
욕심 많은 여신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가지마! 가지마아아!"
"??"
남자는 울상으로 뛰어오는 아이를 발견했다.
이윽고 보게 된다.
철푸덕!
흙탕물 위로 꼬꾸라지는 꼬마를.
"히으, 푸에에, 퉤…."
맛없어....
데이지는 입 안에 가득한 흙탕물의 텁텁함을 느꼈다.
아픔보다도 그게 서러워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울 수 없었다.
"데, 데이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해야 했다.
기회는 한 번 뿐이다.
"괜찮아? 다친 데는? 어디봐봐."
코 앞까지 가까워진 목소리.
흙이 묻은 얼굴을 닦아주는 커다란 손.
보라빛 눈이 반짝거렸다.
목표를 포착했다.
데이지는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응?"
"킁, 잡아써…."
피터의 손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치 얼음장 같았다.
그러나, 욱씬거리는 손 때문인지 그 차가움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얘가 뭘 잘했다고 웃어… 어디 아프지는 않고?"
"으응, 아파."
"엑! 어디?"
"몰겠어…."
"???"
데이지는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녀의 해님은 연한 갈색.
아쉽게도 오늘의 날씨는 흐림이었다.
'괜찮아.'
데이지는 실망하지 않았다.
"나랑, 집에 가자… *훌쩍."
어쨌든 도망치지 못하게끔 붙잡았으니까.
**
곁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조용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잘 자네."
거의 눕히자마자 잠들어버렸다.
얘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하긴.'
평소대로라면 이 꼬마는 진작에 자고 있어야할 시간이었다.
그런데다가 뜨뜻한 물로 몸을 덮혀놨으니, 잠이 솔솔 올만도 했다.
"헤, 헤…."
무슨 재미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얘가 바보처럼 웃네.
"못난이."
나는 피식 웃으며 이불을 목언저리까지 덮어준다.
혹시라도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니까.
마침 볼따구가 발그레 상기되어 있어서 조금 걱정이 된다.
일단 이마를 짚어본다. 적당히 미지근하고 보송보송했다. 아직 걱정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나는 꿈나라로 떠난 아이를 살펴본다.
그 중 내 손을 꼭 붙잡은 고사리 손.
그 작은 손에 감겨진 붕대.
손이 이 지경이 되도록 문을 두드린 아이의 심정을 상상해본다.
무겁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
아무래도 오늘은 사과할 것이 많은 날인가보다.
오늘의 MVP 흙탕물을 먹은 데이지에게,
하룻밤 사이에 현관문을 잃어버린 여관 주인에게,
아닌 밤 중에 물을 데워줘야 했던 에이미에게,
또 그냥 자다가 깬 바람꽃.
그리고.
저택에 남아 있는 레베카…
…그 곳에 있던 20명 남짓한 사람들.
'미안합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질척거리는 어두운 기억이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지독하게 생생했다.
뿌연 연기 속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쇠냄새와 피비린내.
체념조차 없는 공허한 눈동자.
모두 내가 외면하고자 한 것.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광경.
각오했기에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안일한 생각이었다.
'덜 말랐네.'
나도 모르게 매만지고 있는 데이지의 머리카락은 촉촉하고 매끄러웠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흑발을 보며 생각했다.
이와 닮은 머리카락을.
'A 14.'
어느 소년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피터!)
(족제비!)
나와 엮여있는 자그만한 인연.
세 아이들은 서로 무척 닮아있었다.
그래서 그것만은 견디지 못했다.
나는 두려웠다.
내가 어린 생명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야 한다는 사실이.
"빌어먹을."
그래도 차가운 빗 속이라면.
초라한 죄의식 정도는 흘려 보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오밤중에 헛짓거리를 했다.
유감스럽게도. 아무리 비를 맞아보아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얼어붙어서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아 버렸다.
꼬장꼬장한양심이, 같잖은 정의심이.
가엾은 이들을 발판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나약한 인간이었다.
아주 미련하고, 욕심도 많은 인간. 게다가 지독하게 무르다.
"하아, 이제 어떡하냐."
이왕이면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마치 웹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우으으으."
손 안에 담긴 온기가 불평하듯이 뒤척거렸다.
그런 주제에 손은 놓아주질 않는다. 찰거머리가 따로 없다.
나는 피식 웃으며, 신뢰로 가득한 눈동자를 되새긴다.
그 무구한 눈에 경멸과 실망이 자리 잡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집에 가자… 인가."
언젠가 집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런 허름한 여관이 아닌 궁궐 같은 곳으로.
음, 대충 댕댕이 백마리 정도는 거뜬히 키울 수 있는 마당이 딸린 궁궐이 좋겠다.
그 정도면 소소한 꿈이지 않을까?
이윽고 내 머릿속에 어지러운 활자들이 가득차 올랐다.
(저하… 강녕…)
(로제, 짐은 후환은 남기지 않는다.)
(네, 오라버니. 영겁토록 저주하겠습니다.)
(이제 선택해야하오. 패륜아에게 무릎을 꿇을 것인지, 아니면… 검은 손이라도 잡을 것인지.)
이제 남은 시간은 한달 남짓.
바삐 움직여야한다. 해야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나는 아쉬운 손길을 조심스레 떼어낸다.
의자에 앉는다.
꺼놓은 초에 불을 붙이고, 어느 노예상의 장부를 펼친다.
펜대를 쥔다.
쓰삭거리는 소음은 날이 밝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 *